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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Mar 16. 2019

글쓰기 인문학 10강

죽어가는 모든 것을 사랑하라, 수묵정원과 가재미


죽어가는 모든 것을 사랑하라

     

이제 마지막 장에 이르렀다. 글쓰기 인문학 10강 중 마지막 강의는 ‘감동적인 글쓰기’에 관한 것이다. 글은 왜 쓰는가? 결국은 감동을 얻기 위해서다. 이 책의 기본편, ‘서사의 효과’에서 “자기 체험에서 출발하라”라고 강조했다. 자기가 가장 잘 아는 것을 써야 독자를 감동시킬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남의 이야기를 옮겨 쓰는 것은 결코 남을 울릴 수 없다고도 말했다. 자기 이야기를 발굴하라는 권고였다. 그리고 또 “자기 상처와 대면(對面)하라”라고도 말했다. 자기 상처의 진면목을 모르는 자는 남의 상처를 어루만져 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가장 쓰기 싫은 이야기를 써서 작가가 되었다"라는 이야기도 했다. 자기 상처에 대면하는 일은 일견 '누구나 할 수 있는 일' 같지만 사실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누구도 자신의 상처로부터 자유로운 자는 없다. 그래서 종내에는 자기기만, 자기연민의 나락으로 떨어지기 십상인 것이 상처와의 대면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특히 식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모두 자신의 상처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는 상처와의 대면이 눈만 뜨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래서 그들은 실패한다. 우리가 시인과 소설가를 존중하는 것은 그들이 식자(識者)가 아니라 현자(賢者)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시인, 작가는 그런 '누구나 할 수 있는 상처와의 대면'을 '누구나 할 수 없는 상처와의 대면'으로 바꾸는 자다. 그들은 진정한 ‘발굴자’다. 그렇게 땅 속 깊은 곳에서 발굴된 원광석 같은 이야기들만이 타자의 상처에 개입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다. 상처 다음에는 무엇인가? 두 말 할 것도 없이 사랑이다.     

모든 읽기와 쓰기는 길 없는 길을 찾아 떠나는, 고독하고 힘든, 혼자만의 도보여행이다. 일단 여장을 꾸려 신발을 신고 길을 나서는 것이 중요하다. 좌고우면하지 않고 혈혈단신, 혼자서 나서는 것이 중요하다. 지도도 없이, 표지판도 없는 길을 홀로 걷는 자는 ‘몸속의 지도’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다. 내 몸속의 지도는 때를 기다려 몸 밖으로 나온다. 그 때까지는 힘들어도 걷는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끝까지 걷겠다는 의지이다. 그 의지가 곧 지도라는 것도 끝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전부’라는 것도 그 때 알게 된다. 그것을 알면 견물생심, 사랑도 비로소 찾아온다(이때의 ‘견물생심’은 물론 반어적 표현이다. 자기를 위한 욕심을 내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위한 욕심을 내라는 뜻으로 쓰인다). ‘사랑’은 모든 표현 인문학의 알파요 오메가다. 죽어가는 모든 것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제대로 된 글을 쓸 수 없다. 문학이든, 역사든, 철학이든, 현재 남아서 후세의 귀감이 되고 있는 모든 기록들은 하나같이 ‘사랑’ 위에 씌어진 것들이다. 그것을 알면 글 인생을 살아내는 자가 되는 것이고 그것을 모르면 평생 학자연해도 글 인생이 무엇인지 한 치도 모르고 살다 죽는 것이다. 『논어』에 등장하는 공자의 가르침을 사랑으로 읽어내는 ‘글쓰기 연금술’의 한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읽기 텍스트는 시라카와 시즈카(장원철 역)의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세상을 바꾸리라(孔子傳)』로 한다. 먼저 공자의 가르침을 살펴보자.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시 300편을 다 암송하더라도 정사를 맡겼을 때 잘 처리하지 못하고, 다른 나라에 사신으로 가 혼자서 응대하지 못한다면, 비록 많이 암송한들 무엇에다 쓰겠느냐?”고 하셨다. (子曰 誦詩三百 授之以政 不達 使於四方 不能專對 雖多 亦奚以爲)[『논어』 「자로」]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얘들아! 어찌하여 시를 배우지 않느냐. 시는 순수한 감정을 흥기시키며, 사물을 이해할 수 있게 하며, 사람들과 어울리게 하며, 원망하되 성내지 않게 하며, 가까이로는 어버이를 섬기고 멀리 임금을 섬기며, 새와 짐승과 초목의 이름을 많이 알게 한다”고 하셨다. (子曰 小子 何莫學夫詩 詩可以興 可以觀 可以群 可以怨 邇之事父 遠之事君 多識於鳥獸草木之名)  [『논어』 「양화」]    

 

시라카와는 “시를 배우는 것은 무엇보다도 우선 정사에 숙달되는 길이었다”고 말한다(131쪽). 공자 생존 당시에는 내치(內治)는 물론이고 외교에도 시 공부가 필수적이었는데, 그 까닭은 그 속에 담긴 ‘교양적 요소’ 때문이었다고 설명한다. 겉으로 아무리 많은 시를 암송한다 하더라도 그 속에 담긴 교양적 요소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제대로 된 시 공부를 한 것이 아니라고 공자가 가르쳤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렇게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은 아무래도  석연찮은 느낌을 준다. 공자가 말한 어순(語順)을 보면 꼭 그렇게 해석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 300편을 다 암송하더라도”라는 말에 우선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떤 까닭에서인지는 몰라도, 이미 ‘시 300편을 암송한’ 사실이 먼저 ‘전제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런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 공자는 말한다. 정사도 잘 처리하고 다른 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응대도 잘 해야 한다. 그러니까 “시를 배우는 것은 무엇보다도 우선 정사에 숙달되는 길이었다”라고 이해한 것은 “시 300편을 다 암송하더라도”라는 전제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 된다,. “시 300편을 다 암송하더라도”가 제일 앞에 놓여있다는 것은 그 행위의 목적이 이미 별도로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를테면, ‘인격의 수양을 위해’와 같은 암묵적인 약속이나 목적이 그 말 앞에 당연히 있었다는 것이다. 

공자의 가르침을 어순에 숨겨진 의미를 고려해서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숙성된 인품을 지니기 위한 필수적 교양으로 ‘시 공부’가 특히 중요하지만, 설혹 그것에 열중해서 ‘300편 암송의 성과’를 내는 경지에 도달한다 하더라도 그 공부의 결과를 실천적 차원(정사나 외교 등)에서 제대로 구현해내지 못하면 그런 노력은 도로(徒勞)에 불과하다”가 된다. 당연히 그렇게 읽어야 한다. 

공자의 두 번째 가르침도 마찬가지다. ‘새와 짐승과 초목의 이름을 많이 알게 한다’에서도 재해석이 필요하다. 그 부분에 대한 해석을 “교과목으로서의 ‘시’는 우선 수많은 새와 짐승과 초목의 이름을 알게 하는 박물학의 교본이었다”(135쪽)라고 시라카와는 말한다. 그야말로 단어들의 외시적 의미로만 읽어낸다. 정자(程子)가 써놓은 논어 집주에 의존한 수동적인 해석이다. ‘글쓰기 연금술’의 입장에서 보면 그야말로 ‘초등학생 수준’의 문식(文識)에 해당하는 설명이다. ‘시’가 마치 초등학교 물상, 생물 교과서인 것처럼 매도된다. 공자와 같은 성인이 달리 할 말이 없어서 “공부를 하려면 아주 박식해야 하니까 동식물 이름을 외우는 것도 중요하다”라는 말까지 해야 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새와 짐승과 초목의 이름을 많이 알게 된다’는 것은 그런 뜻이 아니다. 그 말은 앞 구절들과의 긴밀한 연관 속에서, 그야말로 상호텍스트성 위에서, ‘시적’인 표현으로(언어의 환유적 작용으로), 사용된 것이다. 이를테면 윤동주 시인의 “죽어가는 모든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말과 상통하는 차원에서의, 맥락적 이해를 요구하고 있는 시적 표현이다. 사물에 대한 깊은 이해는 주변의 모든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사랑이 전제되어야 가능한 것이다. 그 이치를, 그런 식으로, 시적으로, 말한 것이다. 특별히 그 부분에 와서 그렇게 표현한 것은, 실로 그 부분이 시의 가장 높은 부분, 시의 정수리라 할 수 있는 내용이었기 때문이었다. 공자는 일찍이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렇게, 시적으로, 시가 ‘새와 짐승과 초목의 이름을 많이 알게 한다’라고 말한 것이다. 공자는 인류가 지닌 모든 것 중에서 시만큼 사랑을 알게 하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앞에서 (시공부를 해서) 그것(보편적 사랑)을 아는 이가 정치나 외교를 못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말한 것도 바로 그 까닭에서였다. 

어쨌든 공자는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했던 사람이었다. ‘새와 짐승과 초목의 이름’도 그 맥락 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공자의 가르침을 맥락적으로 이해하려면 무엇보다도 공자가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공자는 일관되게 인(仁, 보편적 사랑)과 서(恕, 己所不欲 勿施於人)를 강조했다. 번지가 인에 대해 물었을 때 공자는 “애인愛人”이라고 답했다(『논어』 「안연」). 결국은 사랑이었던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새와 짐승과 초목의 이름을 많이 알게 한다’라는 말을 통해 공자는 생태의식으로 표출되는 사랑(박애)을 강조한 것이다. 이때의 ‘생태의식’은 환유적으로 전 우주적으로 확장된다. 그 뜻 이외에는 다른 그 무엇도 없었다고 봐야 한다. ‘새와 짐승과 초목의 이름을 많이 알게 한다’에서 다른 것을 읽는 것은 오직 오독일 뿐이다. 그 중한 가르침을 그저 ‘박물학 교본’ 정도로 읽어낸다는 것은 너무 황당한 처사다. 반어적 표현으로, ‘견물생심’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그야말로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독법이다.      


  수묵 정원과 가재미 

    

인간은 상징(象徵, symbol)의 동물이다. 상징 없이는 인류문화가 아예 불가능했을 지도 모른다. 기호학에서는 상징을 기호의 세 유형 중의 하나로 이해한다. 상징은 도상(icon), 지표(index)와 함께 기호를 이루는 한 요소이다. 기호학에서 말하는 상징은 가장 추상적인 기호이다. 도상이 물체의 모습을 본따고 지표가 일의 원인과 결과를 반영하는 반면 상징은 순전히 임의적인 계기에 의해 만들어진다. 이를테면 언어나 숫자가 그 대표적인 것이다. 상징은 임의적으로 만들어진 관념이나 기호에 속하기 때문에 그 상징을 사용하는 집단 안에는 반드시 어떤 공동의 약속 같은 것이 존재한다. 상징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사용하는 ‘집단의 약속’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일반적으로(일상에서나 시에서) 사용하는 ‘상징’이라는 말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보통은 추상적인 관념(딱히 말로 표현하기 힘든)을 환기시키는 어떤 구체적인 것을 이를 때가 많다. 비유적 이미지든 서술적 이미지든, 은유든 환유든, 구체적인 어떤 것이 사용되어 한두 마디 말로 표현하기 힘든 어떤 감정이나 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것은 모두 상징(상징적)이다. 시인들은 그런 상징을 만들어내는 타고난 기술자들이다. 아주 자연스럽게 그 기술을 구사한다. 그래서 시에서 만나는 좋은 상징들은 대개는 자유 연상의 결과처럼 보일 때가 많다. 의식적인, 지적인 조작의 흔적이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다음에 살펴 볼 장석남의 시 「수묵 정원9」나 문태준의 시 「가재미」 같은 작품들이 그 대표적인 경우라 하겠다.    

  

<수묵(水墨정원 – 번짐> (장석남) 


번짐, 

목련꽃은 번져 사라지고 

여름이 되고

너는 내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

번짐, 

번져야 살지 

꽃은 번져 열매가 되고

여름은 번져 가을이 된다

번짐, 

음악은 번져 그림이 되고 

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

죽음은 그러므로 번져서 

이 삶을 다 환히 밝힌다

또 한 번- 저녁은 번져 밤이 된다

번짐, 

번져야 사랑이지

산기슭의 오두막 한 채 번져서

봄 나비 한 마리 날아온다 


이 시는 시 전체가 상징적인 문장으로 되어 있다. 주제도 하나의 상징적 문장으로 요약된다. “삶은 번짐이다”라는 말을 다양하게 변주한다. ‘번짐’이라는 상징어가 모든 문장의 술어가 되고 있는 까닭에 무슨 말을 하든지 이 시 속의 시적 화자의 말은 다 상징적 표현이 된다. 그렇게 ‘번지는 문장’을 만들어내는 것은 물론 시인의 ‘번지는 마음’이다. 언젠가 이 시를 두고 학생들에게 가장 마음에 드는 문장 하나를 골라보라고 했다. 초독(初讀)을 한 뒤였다. 이런 저런 의견이 많이 나왔다. “목련꽃은 번져 사라지고”,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 “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 “번져야 사랑이지”, “봄 나비 한 마리 날아온다”, 등등이 주로 꼽혔던 것 같다. 학생들에게 상징에 대해서 설명하고 재독케 한 후 다시 물었다. 그러자 조금 달라졌다. 설명들이 탈락하고 묘사들이 선호하는 문장들로 뽑혔다. 가장 많이 표를 얻은 것이 “산기슭의 오두막 한 채 번져서 봄 나비 한 마리 날아온다”라는 마지막 구절이었다. 학생들이 맞느냐고 내게 물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첫 구절이 가장 좋다. ‘목련꽃은 번져 사라지고’라는 표현은 내가 평생 목련꽃을 보면서 느껴온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느낌’을 (현재까지는) 가장 높은 수준에서 포착하고 있는 말이다. 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오는 표현이다. 그 다음 말들은 오직 그 느낌을 (교훈이 되는) 말로 설명하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첫 구절만이 생물(生物)이고 나머지는 다 냉동이다.” 그리고, 학교 곳곳에서 자라고 있는 목련 나무들을 한 번 보라고 했다. 봄의 전령으로 탐스럽게 피어나는 목련꽃의 그 아름다운 자태가 어떻게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 사라지는지를 보라고 했다. ‘번짐’이라는 말 이외에 다른 그 어떤 말로도 목련꽃의 살신성인을 표현해 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도 말했다. 시는 그렇게 최고의 정신을 담아내는 것이라고도 말했다. 그런 관점에서 생태학적인 관점에서 문학의 소임을 말하고 있는 다음의 구절도 참고로 소개한다.   

  

만물에 대한 연민의식, 특히 쉽게 다치거나 소멸하는 연약한 존재에 대한 각별한 애정은 생태의식의 가장 중요한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멸종 위기에 처한 동식물을 보호하는 일이나 사회적 약자를 특별히 배려하는 일은 다 같이 인간의 도덕적 행위 가운데서 특히 고상한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특히 쉽게 다치거나 도태되는 약한 것들과 어울려 함께 살아가려는 태도가 곧 생태적 태도의 기본이다. 대기나 물의 깨끗함뿐만 아니라 돌이나 풀이나 벌레 같은 것들과도 함께 어울려 사는 세상, 강한 것과 약한 것이 서로 각자의 방식으로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이 생태적인 이상이다. 이 이상에 가까이 가려는 노력은 너무나 연약하고 여려서 쉽게 고통 받고 쉽게 도태되고 쉽게 망가지는 모든 존재들에 대한 섬세한 관심과 애정을 포함한다. [이남호, 『문학에는 무엇이 필요한가』 중에서]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구체적인 형상을 가진 것이 말로 표현하기 힘든 관념의 세계를 감동적으로 포착하고 있는 시를 한 편 더 살펴보자. 문태준의 시 <가재미>이다. 널리 애송되는 시 중의 하나다.  

    

<가재미(문태준)   

  

김천 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 투병 중인 그녀가 누워 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 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아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 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 버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속에 나란히 눕는다

산소호흡기로 들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 준다    

 

위의 시 <가재미>는 ‘암 투병 중인 그녀’에게서 ‘가재미’를 보고 가재미의 여러 속성과 그것이 주는 느낌으로 ‘그녀’에 대한 연민의 정을 세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장석남의 <수묵정원9-번짐>에서 ‘번짐’이 차지하고 있는 위상을 이 시에서는 ‘가재미’가 차지하고 있다. 중심 상징어다. 이 시에서 가재미는 모든 열악한 상황의 대명사이자 병상에 누워서 제대로 거동할 수 없는 ‘그녀’의 물체적 형상을 비유하는 말이다. 그리고 그 ‘가재미’ 느낌은 나에게로 전이되어 두 사람 사이를 잇는 ‘모든 생명의 대명사’로 확장된다. “그녀는 가재미고 나도 가재미고 우리 모두는 가재미 신세를 면할 수 없다”라고 시적 화자는 말한다. 어머니(어머니와 같은 존재)로 추정되는 병상의 ‘가재미’를 어머니나 큰어머니 고모와 같은 구체적인 호칭으로 부르지 않고 ‘그녀’라고 부르는 것도 그런 ‘의미의 확장’을 시인이 기대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학교에서 문학 수업을 하다 보면 상징과 비유의 차이에 대해서 질문을 받을 때가 종종 있다. ‘상징주의’라는 말도 나오고, ‘비유어’, ‘상징어’라는 말도 나오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다 구별되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학생들은(입시 위주 교육의 폐단이다) ‘말들의 책임과 경계’에 대해서 관심이 많다. 그런 입시용 질문을 받을 때는 좀 단순무식하게 말을 해줘야 한다. “상징은 그 자체의 문맥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의도하는 다른 관념을 환기하고(더블), 비유는 오로지 보조관념이 지시하는 의미로만 존재한다(싱글)”라고 일단 말한다. 그리고 다시 교정 작업에 들어간다. ‘비유어’나 ‘상징어’ 같은 말을 되도록 쓰지 말고, 명사적 이해보다는 동사적 이해를 많이 하라고 당부한다. 비유는 은유와 환유만 생각하고, 상징은 그것이 환기해 내는 과정이나 효과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 보라고 권한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라는 상징적 표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기 안으로 생물 ‘가재미’ 한 마리를 데려가야 한다. 자연산이든 양식이든, 한 마리씩은 살아있는 가재미를 한 마리씩은 품고 있어야 공감이 된다. 모든 텍스트는 내 콘텍스트 안에서 재구성될 때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이 된다. 위의 시에서 ‘가재미’는 병환으로 바짝 마른 어머니(와 같은 존재)의 신체를 보고 떠올린 이미지, 생각, 감정(연민의 정, 분노, 안타까움, 후회) 같은 것들이 일제히 달려 나와 만들어낸(찾아낸) ‘세상에서 하나뿐인’, 생물 가재미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가재미 한 마리를 데려 나온 것으로 이미 한 편의 시가 탄생한다. 목련꽃이 ‘번진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 곧 한 편의 시였듯이 병상에 누운 어머니가 곧 가재미라는 것을 아는 순간 시는 이미 탄생한 것이다. 하나이면서 여러 가지를, 슬픈 모든 것을, 제 한 몸에 품어내는 이 생물 가재미 한 마리로 시인의 ‘상징적 상상력’은 다른 모든 시시한 언어들을 일망타진한다. 그다음 절차는 독자를 위한 배려다. 시인은 우선 독자들의 수준을 고려한다. 자신이 찾은 가재미 상징이 순순히 입장할 수 있도록 미리 길을 닦는다. 친절하게 ‘가재미처럼’이라는 직유법을 써서 독자들에게 일종의 ‘도상적 상상력’을 발동시켜 보라고 미리 권한다. 그러고 나서 자기 안에 있는 것들을 ‘ 생물 가재미’를 통해 감각적으로, 구체적으로, 전격적으로 꺼내 놓는다. 그렇게 순차적으로 독자들의 공감과 호응을 불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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