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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Mar 16. 2019

두 번 가르치지 않는다

주역 산수몽

두 번 가르치지 않는다


‘중천건(重天乾)’, ‘중지곤(重地坤)’, ‘수뢰둔(水雷屯)’, 주역 초입 세 괘의 주를 읽고 나니 어렴풋하게나마 주역주(周易注)를 읽는 방법이 손에 잡힙니다. 물론 저대로 읽는 방법입니다. 저는 주역을 거울로 생각합니다. 저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성현들이나 선각들이 주역의 괘를 뽑아서 앞날을 예측하거나 집단의 진로를 일러주는 행위와는 전혀 다른 일임을 미리 밝혀둡니다. 거울 속에서 저를 찾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6효에 대한 각각의 해석을 읽어나가면서 특별히 심금을 울리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부여잡고 깊이 음미합니다. 6효의 연관성이나 그것들이 총체적으로 만들어내는 게슈탈트를 잡아내는 일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므로 그 일에 집착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그 일을 게을리하지는 않습니다. 전체 속에서 하나를 찾고, 하나를 전체로 확대해 눈에 금방 노출되지 않는 어떤 ‘통일성’을 찾습니다. 통일성이 거하는 맥락은 물론 스스로 처한 입장과 물정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논리로 찾지 말고 직관으로 찾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줄’이 계속 자기를 주장하면 모든 것을 버리고 그 ‘한 줄’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그 안에 거합니다.

다만, 반드시 ‘하나에 거할 때’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 점을 망각하면 모든 것이 ‘꽝’입니다. 그 ‘한 줄’이 나의 (허튼, 주역을 펼치는) 욕심과 기대와 희망을 반영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 까닭에 교훈을 얻고자 하면 반드시 그것을 뒤집어야 합니다. 가령 ‘수뢰둔’이 ‘구름이 끼고 천둥은 치지만 비는 아직 안 온다’라니까 그것을 ‘나에게도 언젠가는 기회가 온다’라고 해석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마음이 강하면 강할수록 ‘조만간에 큰 비가(천둥치고 번개친 만큼) 올 터이니 단단히 대비하라’로 읽어야 합니다. 두 번 말할 필요가 없는 ‘요결’(要訣)입니다.


주역의 4괘는 산수몽(괘상은 감하간상, 坎下艮上)이다. 감괘의 형태는 물이고 간괘의 형태는 산이다. 산 밑에 위험한 물이 있다. 4괘의 몽의 괘사는 “亨。匪我求童蒙,童蒙求我。初筮告,再三渎,渎则不告,利贞。”이다. 몽의 괘를 살펴보면 몽을 무지몽매함과 이것을 제거하는 도구인 계몽과 그의 결과 형통을 상징한다. 따라서 무지몽매함을 제거하면 능히 건강한 성장과 형통할 수 있다. 내가 아이로부터 계몽이나 교육을 받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적극적으로 요청하고 내가 아이의 몽매함을 없애주는 것이다. 하늘에게 물어보기 위해 점을 칠 때, 처음 나온 점의 결과는 알려주지만 계속해서 물어보면 가르쳐 주지 않는다. 하늘과 땅이라는 기본 틀에서 어렵게 땅을 뚫고 태어난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무지함을 없애주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이가 물어보면 응당 대답을 해야 하는 것은 어른으로서 의무이지만, 어지럽게 동일한 것을 계속 물어본다면 답변을 주지 않는다.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은 정성이 필요하다. 옛날에 점을 친다는 것은 불확실성에 대한 답변을 신에게 정성을 다해 묻는다는 것이고 이것이 천인합일의 사상의 근저를 이루고 있다. 또한 유교에서 교육과 예절을 중시하는 것은 이 제4번째 산수몽 괘의 해석으로부터 나온 듯하다. 후손들의 건강한 성장을 도와주는 것은 먼저 태어난 사람의 의무이며 그러한 배움의 자세가 되어 있지 않을 경우 가르쳐도 소용없다는 뜻이 아닐까? [출처] 산수몽_제4괘|작성자 중국 이야기지기


아침에 집사람한테서 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방 안에서 꾸물거리고 있는 저에게 ‘두 번 안 말한다’라고 엄하게 꾸짖었습니다(커피 끓여 놓았으니 가져가라고 말한 직후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단박에 저는 ‘두 번, 세 번 하면 모독함이니, 모독함에는 알려주지 아니한다(再三瀆, 瀆則不告)’(주역 4 蒙卦注)를 배웠습니다. 그 한 말씀에 몽매한 이가 되어서 단숨에 계몽되었습니다. 커피를 끓여서 식탁 위에 올려놓고 가져가라고 분부하셨는데 제가 아마 못 들었나봅니다. 기다려도 오지 않길래 밖으로 나와서 툴툴거리며 커피잔을 들고 들어가는 뒷통수에다 대고 그렇게 따끔하게 일침을 놓았습니다. 몸에 안 좋다고 몇 달째 ‘다방 커피’를 집에서 안 끓여주더니 요즘 며칠간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순한 암말’처럼 먼저 커피 한 잔 안 하겠느냐고 묻곤 했습니다. 감사히 얻어 마시곤 했는데 오늘 아침에 잠시 ‘몽매한 이를 포용하면 길하고, 지어미를 받아들이면 길하리니, 아들이 집을 다스리리라(산수몽, 九二)’(包蒙吉 納婦吉 子克家)에 심취해서 비몽사몽을 헤매다 그만 ‘말을 탔다가 내려서 피눈물이 흐르’는 형국(수뢰둔, 上六)이 되고 말았습니다.

산수몽(山水蒙), 괘의 형국이 산 아래 물이 있는 위태위태한 모양이라 하니 한시도 자기를 돌아다보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라는 가르침으로 새깁니다. 상대가 누구든 늘 두려워하고 섬기는 자세로 임하면 내 몸에 화가 미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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