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선규 Mar 15. 2019

글쓰기 인문학 10강

글이 글을 부르는 글쓰기

글이 글을 부르는 글쓰기


책을 읽다 보면 책의 내용이 글쓰기를 권할 때가 있다. 해석을 요청할 때도 있고, 반박을 부를 때도 있다. 그와 함께, 내 안의 어떤 표현 욕구를 부추겨서 책 속의 내용과는 전혀 관계없는 글쓰기를 독려할 때도 있다. 점복서나 예언서 같은 것을 읽을 때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난다. 본디 그런 책들은 브로카 실어증(문법 장애)이나 베르니케 실어증(유추 장애)의 양태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문장이나 문맥 자체가 모호하거나 비문법적일 때가 많다. 비약이 심하고 비유나 상징이 돌발적일 때가 많은 것이다. 그러니 독자의 주관이 개입할 소지가 많아진다. 필요한 몇 개의 구절을 가져와 자기 이야기를 만들고 싶을 때가 많다. 문제는 그렇게 해서 재미있고 유익한 이야기가 나오느냐는 것이다. 만약 그런 글쓰기가 성공한다면 이외로 파장이 큰 감동을 준다. 


<말은 탔으나 왔다 갔다 한다>


주역 세 번째 장 수뢰둔(水雷屯) 육이(六二)에서는 ‘말은 탔으나 왔다 갔다 한다’가 심금을 울립니다. 그 대목이 나오는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육이는 어렵게 왔다 갔다 하며 말을 타고 맴도니, 도적이 아니면 혼인하리라. 여자가 곧아서 시집가지 아니하다가, 십 년 만에 야 시집가도다. [왕필, 임채우 옮김, 『주역왕필주』, 도서출판 길, 1999(2쇄), 54쪽)


그리고 주해에 “때가 바야흐로 어렵고 힘들어 바른 도가 아직 통하지 아니하니, 멀리 건너가서 행함은 나아가기가 어려우므로 ‘말은 탔으나 왔다 갔다 한다’고 하였다.”라는 설명이 뒤따릅니다. ‘바른 도가 아직 통하지 아니하니’를 세상 물정으로 보지 않고 제 속사정으로 간주하니 아주 딱 맞는 계시가 됩니다.


최근 몇 년 동안은 멀리 나아가서 할 일이 없으니 주변 반경 2km 안에서만 왔다 갔다 합니다. 출근하고, 학식 먹고, 도장 가서(요즘은 학교서 합니다) 운동하고, 집에 와서 씻고, 몇 자 쓰거나 TV를 시청하고(요즘은 가금 넷플릭스도 봅니다), 잡니다. 그 모든 것이 반경 2km 안에서만 이루어집니다. 수신(修身)하고 제가(齊家)하는 일만 합니다(집사람 활동 보조나 페이스북 관리가 주 업무입니다). 때로는 ‘도적’만 아니라면 누구에게라도 달려가서 그의 ‘쓰임’이 되고 싶은 생각도 듭니다만 아직은 역부족이라 때를 기다립니다. 좋게 생각하면, 아직은 ‘바른 도가 통하지 않’는 형편이라 그저 ‘왔다 갔다’할 뿐입니다. 그렇게 도적만 아니라면 누구라도 좋으니 나를 데려가 달라는 노처녀의 심정에 동병상련합니다만, 또 한 편으로는 ‘여자가 곧아서 시집가지 아니 한다’라는 대목이 마음에 걸립니다. 행여 제가 그런 못난 처지가 될까봐 염려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곧 그런 피해망상(과대망상)을 접습니다. 제가 봐도 저는 전혀 곧은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얼마 전에 학교 가는 지하철 안에서 들었던 독설 한 마디가 생각납니다. “못나게 생긴 것들이 서방 하나씩은 꼭 꿰차고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다”라는 말입니다. 그 말이 너무 충격적이라 돌아다봤습니다. 기품 있고 우아하게 생긴 제 또래의 중년 여성이었습니다. 무슨 심사에서 그런 말이 나왔는지 저로서는 통 알 수가 없었습니다. 혹시 아직 시집 못(안) 간 과년한 자식이 있어서 그런 악담을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또 다른 사정이 있는지도 모르겠고요. 여성들의 사회 진출을 독려하는 말일 수도 있겠습니다. 만약 그 독설이 주역만큼이나 계시가 되는 것이라면 언필칭 저도 그 ‘못나게 생긴 것’ 중의 하나에게 근 40년 가까이 포로로 살아온 셈입니다. 그럴 수는 없는 일, 반어법으로 읽을 수밖에 없는 계시입니다. 요즘 세상에 ‘서방 하나 꿰차고 방구석 차지를 할 수 있는 자’들만큼 능력 있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로 읽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것보다 더 넓은 계시 영역을 가진 말이라면 ‘깜냥도 안 되는 것들이 처세에는 밝아서 분수에 안 맞는 벼슬자리 하나씩은 꼭 꿰차고 다닌다’로 읽어야 할 것이고요. 더 넓히고 싶다면, 모르겠습니다, 요즘 왔다 갔다 하는 북미정상회담을 떠올릴 수 있으려나요? 그렇게 넓히면 누가 ‘못나서 안방을 꿰찬’ 인물인지가 궁금합니다. 아니면, 둘 다일까요? 


사족 한 마디. 제가 최초로 저희집 안방마님의 포로가 된(될 조짐을 보인) 장면을 ‘수뢰둔’(구름이 끼고 천둥은 치지만 비는 아직 안 온다)을 만난 기념으로 한 번 재구(再構)해 보겠습니다. 대학 4학년 땐가, 음악다방에서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갑자기 제 앞으로 한 ‘암말 같이 걷는 소녀’가 따박따박 걸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구두를 신었는지 운동화를 신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잔뜩 다리에 힘을 주고 영락없이 ‘암말처럼’ 걷고 있었습니다. 아마 통로 바로 앞에 앉아 있는 우리를 많이 의식하고 있다는 표시였지 싶습니다. 얼굴은 ‘민짜’였고(뚜렷한 윤곽이 없었고) 몸은 허리가 없는 통짜였습니다(그런 단점을 커버하려고 두루뭉술하고 긴 상의를 입었던 것 같습니다). 느낌으로 두어 살 아래인 것으로 보였습니다. 표정이 좋았습니다. 그냥 흘낏 한 번 보고 헤어졌는데 집에 오니 ‘저 여자와 결혼할지도 모르겠다’는 계시가 왔습니다(지금 주역 이야기를 하는 중입니다). 제 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게 꼭 제가 ‘도적만 아니라면’ 시집을 오겠다는 강력한 의사 표현 같았습니다. 멀리 가봐야 그 얼굴 그 몸매로 사내 하나 꿰차기가 쉽지 않다는 걸 잘 알았던 모양입니다. 꿈에서까지 자기를 데려가라고 졸라댔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 그 내용을 적었습니다. ‘나는 오늘 결혼할 여자를 만났다’가 주 메시지였습니다(창고 깊숙한 곳에 들어가 있어 지금 공개가 불가한 점을 양해해 주십시오). 그리고는 한 2년 잊고 지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 여전히 짬짬이 음악다방 출입을 하였는데 옛날의 그 ‘암말 소녀’가 다시 나타났습니다. 그러더니 저를 꿰찼습니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저를 포로로 삼고 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어릴 때 한 골목에서(골목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서) 살았던 인연이 있었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가까이 있는 것들은 다 무서운 것들이라는 걸요. 어쨌든 집사람은 성공해서(?) 중년의 나이에 다시 만난 동창생이 얼굴을 못 알아볼 정도로 기품 있고 우아한 꽃중년 여성으로 탈바꿈했습니다(죄송합니다). 저를 말 삼아 저보다는 훨씬 멀리까지 왔다 갔다 합니다(집사람의 행동반경은 적어도 제 4배는 족히 됩니다). 구름이 끼고 천둥은 치지만 비는 아직 안 온다니까 저도 때가 되면 제게 맞는 말을 얻어 타고 멀리 나갈 기회가 한 번은 오겠죠? 암말이든 숫말이든 도적의 말만 아니라면 타고 나갈 셈입니다요. 수뢰둔! <양선규, 페이스북, 2019. 3. 15.> 


주역의 한 구절을 가져와서 자신의 추억을 되살리는 한편, 추태를 보이는 세간의 ‘못생긴 것들’을 풍자하는 글이다. ‘말을 탔으나 왔다 갔다 한다’는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았음을 말한다. 기다리다 때가 오면 세차게 말을 몰아 목적지를 향해 달릴 기세다. 그러나, 말 위에서 ‘왔다 갔다 하는’ 심정은 늘 조급하다. 그 마음은 ‘도적만 아니라면 누구에게라도 시집가고 싶은’ 노처녀의 심정이다. 살다 보면 그런 때를 자주 만난다. 젊어서 운전면허 시험을 보던 때가 생각난다. 수 없이 떨어지는 사람도 있고 단번에 붙는 사람도 있다. 붙을 때의 기분은 하늘을 찌를 듯이 기쁘다. 그러나 일찍 면허를 딴 사람들은 그 뒤로 수많은 시험에 노출된다. 자만과 방심이 부른 크고 작은 사고에 많은 괴로움을 겪는다. 차라리 ‘말을 탔으나 왔다 갔다 하는’ 신세를 오래 가지는 게 나중을 생각하면 더 나을 수도 있다. 그만큼 조심하고 또 운전대가 몸에 붙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 보통은 그렇게 주역의 이 대목을 해석하고 자신을 되돌아보는 일에 이 이야기를 활용할 것이다. 그러나 위 예시문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고 엉뚱한 연상을 불러와서 자기 나름대로 이야기 하나를 만들어낸다. 결혼담도 들려주고 자신의 수신제가가 언젠가는 사회를 위해서 유용하게 쓰이길 희망한다고 너스레도 떤다. 수신도 제가도 못하는 자들이 ‘서방(권력자) 하나는 꿰차고’ 온갖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세태 비판도 한다. ‘글이 글을 부르는’ 글쓰기의 한 전형이라고 하겠다.  


작가의 이전글 말은 탔으나 왔다 갔다 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