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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Mar 17. 2019

강을 건너면 길하다

새로운 인생 개척

강을 건너면 길하다


주역 다섯 번째 수괘(需卦)는 ‘수천수(水天需)’입니다. ‘수는 믿음이 있으니, 빛나고 형통하며, 곧고 길하니, 큰 내를 건넘이 이로우니라’(需有孚 光亨貞吉 利涉大川)가 첫 줄에 나오는 괘주(卦注)입니다. 예나제나 단연코 ‘큰 내를 건너면 이롭다’가 저의 심금을 울립니다. 이 대목에 있어서는 제게 약간의 전장고사(典章故事)가 있습니다. 언젠가 모종의 결단이 요구될 때 사무실 넓은 공간에서(그때는 제가 보직을 맡고있을 때였습니다) 동전을 던져 육효를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나온 괘가 바로 수괘였습니다. 10년 전쯤이었을까요? 아직은 혈기방장했을 때였습니다. 세상은 어지럽고 군웅은 할거하니, 강을 건너면 이롭다 하는 점괘를 두고 굳이 망설일 것이 없었습니다. 강을 건너지 말라는 가족과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혈혈단신 출사표를 던지고 전장(戰場)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제가 일생 중 치른 전쟁 중에서 가장 저조한 성적이었습니다 그야말로 ‘꽃이 지는구나, 못난 놈’, ‘이섭대천’(利涉大川)이 아예 그 판을 떠나서 다른 곳으로 가라는 뜻인 줄을 안 것은 그로부터도 한참 뒤의 일이었습니다. 

 

구삼(九三)은 진흙에서 기다림이니 도적이 이르게 되리라. 육사(六四)는 피에서 기다리다가 구멍으로 나가도다. 구오(九五)는 술과 음식에서 기다림이니 곧고 길하니라. 상육(上六)은 구멍에 들어감이라. 기다리지 않은 손님 세 사람이 오리니, 공경하면 마침내 길하리라. [왕필, 임채우 옮김, 『주역왕필주』, 도서출판 길, 1999(2쇄), 74쪽]


그때는 눈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지만 그 후 ‘도적’도 만나고, ‘피’에서 기다리기도 했고, 때 아닌 ‘술과 음식’도 만났습니다. 돈도 잃고 명예도 잃고 몸도 많이 잃었습니다. ‘기다리지 않은 손님 세 사람’은 구멍에 들어가 은인자중(隱忍自重), 어려움이 끝나기를 기다린 후에 맞이한 3년이라 생각합니다. 그 3년 동안 저는 ‘구멍’에서 나오지 않고 건강도 회복하고 책도 6권 펼쳐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강을 건너면 이로웠을 것’을 놓치고 강을 건너지 못했던 까닭에 겪어야 했던 어려움이었습니다.


사족 한 마디. 인생사에선 항상 무모한 도강(渡江)이 문제를 일으킵니다. 강을 건너는 것은 때로 죽음을 이르기도 합니다. 그동안 강을 건너지 말라고 말리는 손길을 뿌리치고 떠난 이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런데 ‘이섭대천’(利涉大川)이라니, 믿음이 있고, 빛나고 형통하고, 곧고 길한데, ‘이섭대천’이라니, 강을 건너면 이롭다니, 그게 도대체 무슨 뜻이랍니까? 달리 다른 뜻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 좋은 것들을 가지고 그것들의 소용이 닿는 곳으로, 여기와는 다른 곳으로, 새로운 생을 개척하라는 뜻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도적과 피가 기다리는 땅에서 죽거나, 살아도 구멍에 숨어 내내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제가 그때 뽑은 육효가 가르쳐준 ‘오늘의 운세’는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수천수’(水天需), 수괘의 상괘 감(坎)의 덕이 험(險)이고, 하괘 건(乾)의 덕이 건(建)이니 그나마 목숨을 부지하고, 무위의 자리에 처했으니 자리가 마땅하지 않지만, 공경하면 마침내 길함을 얻으므로, ‘비록 자리는 맞지 않으나 크게 잃지는 않는’ 운세로다>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 틀린 것이 없습니다. 굳이 가진 것이 없었으니 굳이 잃을 것도 없었습니다. 곧고 길한 것을 보전하다가 때가 되면 강을 건널 뿐입니다. 이섭대천! 수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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