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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Mar 18. 2019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 에로티즘

원초적 본능, 써머스비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 

    

살면서 목숨까지 걸만한 일이 무엇일까요? 인생의 가치 중에서 자신의 삶과 교환 가능한 것은 무엇일까요? 각인각색(各人各色), 사람마다 다를 줄로 압니다. 돈에 목숨 거는 이, 사랑(戀情)에 목숨 거는 이, 신앙이나 의리나 명분에 목숨 거는 이, 부모 자식에 목숨 거는 이, 학문에 목숨 거는 이, 사람마다 목숨 거는 일이 다 다릅니다. 물론,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자기 목숨과는 바꾸지 않으려는 이도 있을 겁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자기 목숨이 가장 중한 것이 되겠지요. 보통 사람들에게는 ‘목숨을 거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영화나 소설의 주인공들은 쉽게 목숨을 겁니다. 그들은 이를테면 ‘문제적 개인’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 서사를 써 나가는 인간일 때가 많습니다. 그들은 항상 자신을 그냥 두지 않습니다. 무엇으로든 세상에 스크래치를 남기려고 합니다. 자신의 상처로 조금이라도 세상이 변하기를 원합니다. 삶의 목적과 과정에 대해 고민하고 자신이, 자신의 이름이, 어떤 의미와 가치로 이 세상에 남을 것인가에 대해 고민합니다. 그것을 위해 때로는 죽음도 불사합니다. 그들 ‘영화나 소설의 주인공’만을 두고 말한다면, 인간의 삶에서 죽음과 교환 가능한 것은 크게 보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에로티즘이고 하나는 정체성 서사입니다. 


에로티즘은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본디부터 그것은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입니다. 꼭 ‘로미오와 줄리엣’이 아니더라도 에로티즘은 언제나 죽음 곁을 서성입니다. 에로티즘을 원하는 삶, 에로티즘에 사로잡힌 삶은 항상 죽음의 유혹을 받습니다. 에로티즘과 죽음은 서로 상극인 만큼 가깝습니다.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이기는 자신의 정체성 서사와 관련된 의지나 믿음이 강한 삶일 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일반적으로, 그런 이야기를 담은 영화나 소설은 결구(結句)를 ‘주인공의 죽음’으로 마감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보면, 결국 미인이나 영웅을 몰락시키는 것은 에로티즘과 정체성 서사(이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원초적 본능>(폴 버호벤, 1992)과 <써머스비>(존 아미엘, 1993)는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에 관한 영화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원초적 본능>이 에로티즘 쪽이라면 <써머스비>는 정체성 서사 쪽입니다. 

    

두 영화 공히 줄거리나 특정 장면이 널리 알려진 것들이라 자세한 소개는 약하겠습니다. <원초적 본능>은 ‘삼각형의 욕망(주체의 욕망은 항상 매개자의 욕망을 모방한다)’으로, <써머스비>는 ‘아버지의 이름(말, 법)’으로 간단하게 요약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원초적 본능>은 자타가 인정하는 에로티즘 영화입니다. 에로티즘이라고 해서 함부로 얕봐서는 안 됩니다. 에로티즘의 철학적 기반은 인간 존재의 영속성 추구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동시에 에로티즘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해방’을 지향합니다.  

   

먼저 에로티즘에 대한 공부부터 해보겠습니다. 에로티즘은 단순한 생식 욕구, 성행위와는 구별되는 철학적 기반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연 본래의 목적과는 별개의 심리적 추구로 이해됩니다. ‘자연 본래의 목적’은 물론 ‘생식’입니다. 인간의 성적 욕구가 ‘생식’이라는 자연법칙의 굴레에서 벗어날 때, 일종의 형이상학적 목적성을 지닌 에로티즘이 발생합니다. 그러한 관점은 로오렌스(D.H.Lawrence)의 ‘성(性)문학’에서도 구체화된 바가 있습니다. 신비주의를 지향하는 로오렌스의 에로티즘은 ‘우주적 생명력의 구현’으로 개념화될 수 있는 성질의 것으로 파악됩니다. 로오렌스는 개인의 성 체험을, 당사자인 두 남녀 사이의 제한된 차원 안에 가두지 않았습니다. 대우주에 만연하는 거대한 질서와 역동적인 생명력에 동참하는 그 어떤 활력으로 묘사해 냅니다. 그와 같은 로오렌스의 탈개인적(탈인성적, impersonal) 에로티즘은 우리나라의 황순원 소설에서도 발견됩니다. 다만, 로오렌스가 성(性)문학적 표현과 함께, 상층민적 정신주의(母 인물형, mother figure)와 하층민적 육체주의(父 인물형, father figure)의 대립구도 속에서 자기 확대적 애정실현의 전형을 창출하고 있는 반면, 황순원은 보다 보편성을 띤 인간 심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황순원 소설은 계층의식적 갈등을 내포하지 않은 보다 보편적인 애정실현의 문제를 주로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카인의 후예』(오작녀), 『나무들 비탈에 서다』(옥주), 『움직이는 城』(창애) 등에서 계층의식에 입각한 정신주의와 육체주의의 대립이 일부 보이긴 하나, 주조(主調)는 어디까지나 계층을 초월하는 애정실현에의 욕구 및 그 성취와 좌절에 대한 작가적 관심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존재의 연속에 대한 인간 존재의 향수, 즉 보편적 실재와 자신을 이어주는 최초의 연속성에 대한 추구로서의 에로티즘은 일반적으로 세 가지 형태로 발현됩니다. 육체의 에로티즘․ 심정의 에로티즘․ 신성의 에로티즘이 그것입니다. 이 셋은 한쪽 극단에서 다른 한쪽 극단에 이르는 과정을 분절한 것이기 때문에 각기 독립적이거나 배타적인 것은 아닙니다. 육체와 심정, 그리고 신성은 그 표현의 형태나 대상에 있어서의 차이를 부각하는 관점에 따른 구별일 뿐이다. 모든 에로티즘은 육체의 에로티즘을 기반으로 해서 성립합니다.(G.Bataille(조한경), 에로티즘 및 , 양영수, 『로렌스 문학의 해부 - Sleeping Beauty Motif의 계층의식적 갈등구조』 참조)    

 

부연하자면 에로티즘은, 인간이 불연속적인 존재이면서 자신의 그러한 존재양식을 뛰어넘으려는 도전을 추구하는 곳에서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설적으로, 그것은 죽음과 연결되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만이 영원한 ‘연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에로티즘으로 가는 길목에는 항상 죽음의 유혹이 기다립니다. <원초적 본능>에서 살인사건을 매개로 본격적인 에로티즘 서사가 진행된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우연이 아닙니다(문제적 개인인 두 여인 사이에 끼어든 남자는 누구든 죽습니다). 에로티즘은 언제나 구체적인 형태를 파괴하려 듭니다. 불연속을 전제로 한, 일정한 사회적 형태를 그것은 끈질기게 파괴하려고 합니다. 그래야 영속적인 ‘연속’을 재구성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에로티즘에 의한 영속적인 연속성의 추구는 그 자체로 아이러니입니다, 원칙적으로 에로티즘은 살아있는 생물체에게만 가능한 것입니다. 불연속적 개체가 죽음에 의한 영속적 연속성에 이르는 순간 그것은 소멸합니다. 그런 걸 운명적 아이러니라고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므로, 에로티즘의 철학적 기반은 하나의 역설입니다. ‘에로티즘은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이다’라는 표현은 그러한 역설을 요약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에로티즘이 위에서와 같이 제법 엄숙한 의미를 지닌다니까 이제는 ‘에로티즘 콤플렉스’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꼭 에로티즘 아니더라도, 사람이라면 누구도 콤플렉스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것과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성숙한 인격을 만드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원초적 본능>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모두 자신의 콤플렉스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이군요. 그들의 콤플렉스가 그들을 사랑도 하게 하고 살인도 하게 합니다. 남자 주인공(마이클 더글러스-닉 커랜 형사 역)도 그렇고 여자 주인공들(샤론 스톤-캐서린 트라멜 역, 진 트리플혼-베스 가너 박사 역)도 한결같이 자기(self)와 불화(不和)하는 콤플렉스 때문에 고통받고 있습니다. 그들이 벌이는 삼각관계도 결국은 그 불화의 변주곡인 셈입니다. 그건 그렇고, 이 영화에서(소설이 아닙니다) 진짜 살인범이 누군지가 좀 헷갈립니다. 이 영화의 ‘압도적인 에로티즘’에 사로잡혀서 그만 줄거리를 파악하는데 실패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두 여자 주인공은 서로가 서로의 욕망을 모방하는 이상심리의 소유자였습니다. 르네 지라르의 ‘욕망의 삼각형’이라는 도식으로 설명하자면, 이들은 상호 간 ‘욕망의 내적 중개’라는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서로에게 ‘욕망의 중개자’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중개’의 형식이 <선망/질시>의 양가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내적 중개’였기 때문에 그들은 상대방의 남자를 살해합니다(외적 중개는 드러내 놓고 중개자의 욕망을 모방합니다. 종교적 숭배가 대표적입니다). 그런 남자가 있다면 그녀들은 죽도록 죽이고 싶어 집니다. 이 두 사람 사이에 있던 남자들은 모두 죽게 된다는 영화의 스토리가 그것을 증명하지요. 그렇다면, 남자 주인공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그걸 설명합니다. 두 여자 중 하나를 죽여야 합니다. 그래야 끝이 납니다.  

   

<써머스비>는 그에 비해 한결 쿨합니다. 여러 사람을 죽일 필요가 없습니다. 한 사람만 죽으면 됩니다. 가짜 남편, 가짜 아버지, 가짜 백인 지주, 혼자서만 죽으면 모든 일이 해결이 됩니다. 혼자서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지는 것으로 영웅적 시민의 삶은 완성됩니다. 그런 가짜 남편을 살리려는 로렐(조디 포스터)의 노력도 수포로 돌아가고, 가짜 써머스비(리처드 기어)는 영원한 미국 시민의 전범(典範)으로 남습니다. 그의 묘비명이 그걸 보증합니다. 그는 현대판, 지역판, 가족판, 예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희생양이고 구세주입니다. 교수대라는 십자가를 스스로 선택합니다. 써머스비(사실은 타운젠)가 죽음과 교환한 것은 ‘아버지의 말’, ‘아버지의 법’, ‘아버지의 이름’이었습니다. 그것 없이는 제도도 없고, 계약도 없고, 영속도 없습니다. 그것을 지키는 것이 이 세상 모든 아버지들의 책무입니다. 그는 자신의 보잘것없었던 과거, 누추하고 야비했던 삶으로, 옛날의 그 이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목숨 하나는 구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아버지의 그 모든 것을 잃어야 했습니다. 이미 그러기에는 늦었습니다. 그는 이미 아버지이기를 멈출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미 자신의 정체성 서사를 다시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성공적으로, 영웅적으로, 써 내려간 상태였습니다. 그는 죽음이라는 결구로 자신의 정체성 서사를 완성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봤습니다. 하나는 자신을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남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때로는 자신을 위해, 때로는 남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던질 수 있는 게 인간인 것 같습니다. 그 둘 사이의 긴장이 인간 그 자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좀 오래된 영화들을 가져와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마 그 영화들을 처음 접했을 때의 흥분이 아직도 여운을 남기고 있는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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