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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Mar 19. 2019

아침 나절 동안 세 번 빼앗기다

주역 천수송

아침나절 동안 세 번 빼앗기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좀 살아 보니 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인생의 ‘끝’에 가까워지니 더 실감합니다. 저는 지금 제 ‘끝’에 만족합니다. 소년고생은 좀 있었으나 대체로 무난한 삶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분에 넘치는 복락 속에서 평생을 보낸 것 같습니다. 일신에 큰 병도 없었고, 가족 중 누구도 큰 아픔을 겪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사제동행(師弟同行), 건강과 친목을 위해 동고동락 하는 검우(劍友)들이 30년 가까이 함께 해 오고 있어 마음 든든합니다. 너무 고맙습니다. 직장에서도 고마운 분들을 자주 봅니다. 어제는 타 과의 후배 교수 두 분이 찾아와서 한 분은 밥을 또 한 분을 차를 사 주셨습니다. 늙으면 지갑은 열고 입은 닫으라고 했는데 다음에는 꼭 제 지갑을 열 작정입니다. 외로운 가운데 그나마 좋은 분들과 함께 할 수 있으니 감히 스스로 흉한 ‘끝’은 아니라고 여깁니다.  

   

송은 믿음이 있으나, 막혀서 두려우니, 중간은 길하고, 끝은 흉하니, 대인을 만나봄이 이롭고, 큰 내를 건넘은 이롭지 않느니라. (訟有孚窒惕 中吉終凶 利見大人 不利涉大川) [왕필, 임채우 옮김, 『주역왕필주』, 도서출판 길, 1999(2쇄), 76쪽]     


천수송(天水訟), 주역 여섯 번째 송괘(訟卦)는 ‘막힘을 보고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무엇이든 완전히 이루려 하다가는 결국 끝에 가서 흉하게 된다고 경고합니다. 얼마 전에 어떤 자리에서 그 비슷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오래 전부터 불화의 씨앗이 되고 있는 미결 문제를 두고 “이 참에 뿌리를 뽑자”라고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그때 제가 말렸습니다. “그냥 미결로 가자. 지금으로선 그 길이 최선이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단숨에 뿌리 뽑힐 일이었으면 지금까지 그렇게 미결상태로 남아 있을 일도 없었습니다. 결국은 또 누군가의 이해가 개입해서 살벌한 다툼이 벌어질 것이 뻔했습니다. 싸우는 것은 피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없던 사람이 들어오고, 없던 룰이 생기다 보면 당연히 불평불만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반드시 손해 보는(본다고 생각하는) 쪽이 생깁니다. 그쪽에서 보면 ‘기울어진 운동장’이 강요되는 형국입니다. 그렇지만 그것들을 일거에 불도저로 밀어붙이고 새 운동장을 만들겠다고 나서서는 곤란합니다. 또 누군가 득을 보고 누군가가 손실을 입습니다. 억울하게 손해를 본 쪽에서 들고 일어납니다. 그러다 보면 부득불 ‘끝’이 안 좋습니다. 모임과 조직에 치명적인 상처가 될 때가 종종 있습니다. 10년 전 쯤 저도 등 떠밀려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불도저 기사가 한 번 되었다가 큰 봉변을 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수인인 저야 매 몇 대 맞고 끝났지만 주범으로 몰린 이는 아예 장살(杖殺)을 당한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 때는 반드시 ‘대인’을 만나보고 지혜를 얻어야 하는데 일부 소인배들의 충동질에 넘어간 결과였습니다. 끝이 아주 ‘흉(凶)’했습니다.   

   

상구는 혹 허리띠를 상으로 하사하더라도, 아침나절 동안 세 번 빼앗기리라. (上九 或錫之鞶帶 終朝三褫之) [왕필, 임채우 옮김, 『주역왕필주』, 도서출판 길, 1999(2쇄), 82쪽]     


상으로 받은 것을 아침이 채 다 가기도 전에 세 번 빼앗기는 것이 송사(訟事)의 끝이라고 주역은 가르치지만 아직 ‘끝의 흉’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그 간절한 가르침을 순순히, 속속들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여기저기 싸워 이겨보겠다는 만용(蠻勇)들이 넘쳐납니다. ‘옳으면서도 지는 것이 용맹이다’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마음속으로 되뇌어야 그들과의 충돌을 피할 수 있습니다. 참고 또 참아야 합니다. 그래야 흉을 면할 수 있습니다. 제가 겪은 바로는 이해의 당사자들보다는 그 불평부당함을 부추기는 주변 인물들이 더 나쁜 자들이었습니다. 그런 자들은 오직 이(利)를 취할 일에만 골몰하기 때문에 따로 선악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선악을 구분하지 않는 것만큼 악한 것이 없습니다. 소인배들의 끝없는 탐욕과 자기만 아는 보신(保身)욕이 온갖 악을 만들어냅니다. 차도살인(借刀殺人)도 서슴지 않습니다. 물론 그들이라고 흉한 ‘끝’을 피해 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 사리사욕에 가득찬 소인배들이야말로 ‘최후의 피해자’입니다. 굳이 사례를 수집할 필요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는’ 주역에 그렇게 나와 있으니까요. 끝에 가서는 ‘아침나절에 세 번씩’ 받은 상을 모조리 다 빼앗깁니다. 일신이 망하고 가족이 크게 다칩니다. 종내에는 자기들끼리도 분란이 생겨 뿔뿔이 흩어집니다. 멀리 눈길을 돌리지 않더라도 가까이에서도 그런 ‘천수송(天水訟)’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요즘도 한 건 보고 있습니다). 세상 일이 사람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님을 또 알겠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저 역시 그런 ‘중간은 길하나 끝은 흉한’ 일을 도모한 적은 없었는지, 불현 듯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2015. 3. 19. 오늘 아침 일부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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