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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Mar 19. 2019

오백년 바람에 씻기우고

가족주의와 정통 무협, 검우강호

오백년 바람에 씻기우고검우강호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변치 않는 구원이 하나 있다. 바로 가족(家族)이다. 가족은 그 자체로 구원(救援)이다. 불패(不敗)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제어할 수 없는 욕망의 각축장, 강호(江湖)의 절정 고수들도 가족주의(家族主義)와 만나면 여지없이 패퇴한다. 가족을 위하고, 가족을 지키려는 한 사람, 불패의 사랑을 꿈꾸는 주인공에게 그들은 속절없이 무릎을 꿇는다. 

인간의 힘으로는 결코 단죄(斷罪)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절대악도 결국은 가족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 근자에 나온 정통 무협영화 『무협』이나 『검우강호』가 그렇다. 『동방불패』나 『와호장룡』 등에서 잠시 유예되었던 가족주의는 그렇게 화려하게 부활한다. 작게는 의리고 크게는 명분인 무협(武俠)의 행동강령은 두 시간짜리 영화 안에서는 ‘가족을 만들고 지켜내기’라는 축약된 구도 속에서 자신의 전면모를 드러내어야만 한다. 전래의 무협극들은 대체로 그 도식을 지켜왔다.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든, 『용문의 결투』든, 『유성호접검』이든, 영화는 늘 ‘가족’의 울타리를 중히 여기는 자와 그것을 버릴 것을 강요하는 자나 무시하는 자 간의 혈투를 보여준다. 제대로 의리를 아는 제자든(외팔이), 대의를 위해 사랑을 희생하는 우국지사든(주유안), 사랑을 위해 변심한 자객이든(맹성흔) 그들은 모두 ‘가족’의 중함을 아는 자들이다. 물론 그들과 반대쪽에 선 자들은 그렇지 않다. 폭력을 일삼는 흑도의 무리든, 내시 집단이든, 자객 집단이든 그들은 가족적인 온정을 벽안시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그것의 의의를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파괴한 자리에 자신의 입지를 세우려 한다. 그래서 그들은 죽는다. 결국은 망한다. 


한때 가족주의 이외의 주제가 무협영화를 혹사시킨 적이 있었다. 정치, 역사, 심리가 주제넘게 횡행했다. 대의와 명분을 앞세운 민족주의(중화주의), 현재 권력을 위한 역사(고전)의 재해석, 디테일 묘사에 치중한 인간성(선악이나 폭력) 연구 등등에 무협영화의 에너지가 집중적으로 투여되던 때가 있었다. 이소룡, 성룡, 이연걸, 주윤발, 임청하 등의 자연산 혹은 인공적인 현란한 기예에 지나치게 의존, 주제가 기예를 위해 견강부회되던 때도 있었다. 새로운 주제의 발굴에 혈안이 되면서 부지불식간에 ‘일반 영화와의 경쟁’에 진입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이른바 ‘홍콩 느와르’에 밀려 장르로서의 존재 의의를 완전히 잃고 사라진 적도 있었다. 

최근 들어 무협 영화의 부활이 눈에 띈다. 현재 무협 영화의 부활은 두 가지 서로 다른 방향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역사적 사건(고전)의 재해석과 가족주의의 부활이다. 삼국지나 초한지, 아니면 개별적인 역사적 인물(적인걸, 관운장)을 재해석해서 스토리텔링을 만들고 무협의 요소를 가미하는 것이 그 하나다. 정통 무협과는 거리가 있는 모습이다. 본디 강호 무사와 관병(官兵)은 각각의 행동반경을 따로 가지고 있다. 그 둘을 섞다 보면 어느 한 쪽이 다치게 되어 있다. 그렇게 보면 이들 ‘재해석파’들은 딱히 무협 영화의 부활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면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자연히 다른 한 쪽으로 관심이 쏠린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무림 영웅들(『검우강호』, 『무협』)의 재등장이 주목된다. 『검우강호(劍雨江湖)』(수차오핑․오우삼, 2010)와 『무협』(진가신, 2011)은 무협극에서의 가족주의의 본격적인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검우강호(劍雨江湖)』에서 정우성과 양자경이, 그리고 『무협』에서는 견자단과 탕웨이가, 그 무엇으로도 침해할 수 없는 ‘가족의 존엄’을 보여준다. 전자는 ‘원수를 사랑하는’ 부부 인연을, 후자는 ‘생명성의 보고’로서의 가족을 강조한다. 『무협』에서는 아이들까지 등장함으로써 더욱더 ‘가족의 존엄’이 강조된다. 비록 부자간 핏줄 인연이 없더라도 ‘가족’은 그 자체로, 인류를 존재케 해 온 것으로서, 존엄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스스로 가족주의의 첨병임을 자처하는 것이다. 무협 영화 『무협』에서 볼 만한 것은 바로 그것이다. 결혼에 한 번 실패한 여인 탕웨이와 인간의 정(사랑)에 굶주린 ‘돌아온 탕자’ 견자단의 ‘눈물 나게 하는 가족애’ 하나면 그 영화는 충분하다. 나머지는 모두 우수마발이다. 불패의, 난공불락의 ‘가족’을 만들어 삶의 진정한 의미를 구성하겠다는 주인공들의 의지를 표현해 내는 견자단과 탕웨이의 연기가 볼만했다. 그런 의미에서 훼방꾼 금성무나 왕우의 역할은 오로지 그들 ‘가족’의 존재감만을 위해, 그것을 위협하여 흔들다가 망하고 마는, 보조적 존재에 머물 뿐이다. 금성무의 허잡함(?)은 그런 측면에서 이 영화와 잘 어울렸다. 물론, 오랜만에 영화로 돌아온 왕년의 ‘의리의 사나이’ 왕우의 악역도 볼 만했다. 그의 전신에서는 카리스마가 흘러넘쳤다. 한때 그의 얼굴에 대해 의심의 눈길을 보낸 적이 있었다. 왜 그가 그런 답답한 얼굴로 한 시대를 풍미하는 대스타가 될 수 있었는지가 궁금했다. 이번에 그 의문을 해소했다. 카리스마였다. 그의 형형한 눈빛, 그의 꽉 다문 입술에서는 아무 때나 카리스마가 넘쳐흘렀다. 세상에 거저 되는 것이라고는 어디에도 없었다.


본론으로 들어가자. ‘가족주의’가 우리의 주제다. 주지하는 것처럼, ‘가족’은 무협극이나 서부활극의 중핵적인 요소다. 무협극이나 서부활극에서 ‘가족’의 역할이 어떤 것인지는 다음과 같은 일반론적인 해설을 통해서도 쉽게 확인된다. 가족, 혹은 의사(擬似) 가족으로서의 ‘도장(道場)’이나 마을이 악당들에 의해서 심각하게 위협받거나 유린되는 것으로 보통 무협극이나 서부활극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40여년 전에 크게 히트한 쇼부러더즈사의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獨臂刀)』(장철, 1967)가 바로 그런 식의 정통 무협극에 속하는 것이다. 주인공은 도장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고 불구가 되지만 비급을 얻어 스스로 무예의 고수가 되고, 과거의 사적인 원한관계를 뛰어넘어 대의를 실현하는 ‘의리의 사나이’가 된다는 줄거리다. 주연을 맡은 왕우(王羽)라는 배우가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그의 영화가 나올 때마다 극장 앞이 늘 장사진을 쳤다. 『용문의 결투(용문객잔)』나 『유성호접검』도 많은 인기를 누린 작품이었다. 그 두 작품은 가족주의를 표나게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주인공 간의 사랑을 강조함으로써 ‘가족’의 의의를 묵시적으로 인정하는 포즈를 취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무협극에서의 가족의 의미가 점차 퇴색되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동방불패』, 『동사서독』, 『황비홍』, 『와호장룡』 등으로 넘어오면서 감독들은 새로운 주제를 무협극에 접목시킨다. 역사나 심리, 추리소설적 요소가 깊숙하게 들어오게 된다. 당연히, 주제를 효과적으로 실어 나르기 위해 과장된 시공간으로서의 ‘강호’가 중요시되고 ‘가족’의 의미는 축소된다. 주체의 욕망, 민족정체성 서사, 의리담론, 확장된 무예의 영역이 전경화되면서 가족은 설 자리를 잃게 된다. 미장센도 여타 장르에 비해 손색이 없게 된다. 점점 물색 좋은 영화로 나아간 것이다.


얼핏 좋은 방향인 것처럼 보였는데, 그 결과는 참담했다.  『동방불패』, 『동사서독』, 『황비홍』, 『와호장룡』은 영화를 관람한 관객 수와 관계없이,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특히 『와호장룡』은 일말의 서구적 관점(도가적 초월을 선망하는 서구인의 시선)이 가미되어, ‘가족’을 간절히 원하는 자와 그것을 버리고 ‘강호’를 찾아 떠나는 자와의 미묘한 심리적 갈등을 잘 포착함으로써 무협영화의 수준을 한 단계 격상시켰다는 평까지 들었다. 누구는 그 영화를 ‘홈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으로 나누어 설명하기까지 했다. 내가 [가족/반(反)가족]으로 나누듯이 그는 [자유/억압]으로 영화의 공간을 나눈 것이다. 일종의 노마디즘이었다. 『와호장룡』은 그런 해석이 가능한 영화였다. ‘초월(超越)’이라는 관념이 서구적인 영화문법으로, 가늘게 한 가닥, 들어와 있었기에 가능한 설명이었다. 

그러나 그 뒤를 따르는 후속작들, 그런 비정통파 무협극들의 후예들은 관객들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실험은 한 번이면 족했다. 낯설게하기는 한 번이면 족했다. 반복이 허용되지 않았다. 이를테면 규범적 예술양식(전통극, 동화, 종교 전례 등)에 속하는 것이 정해진 규범으로부터 지나치게 벗어날 때 당하게 되는 ‘화난 독자로부터의 소외’를 속속들이 경험하게 된다. 그 뒤로는 누구도 무협영화에 열광하지 않았다. 객석은 그저 쓸쓸할 뿐이었다. 어쨌든 무협극은 ‘잘난 척’ 하다가 큰 낭패를 겪게 된다. 


『검우강호』와 『무협』의 가족주의는 그러므로 실패를 거울삼아 ‘큰 욕심 내지 않는’ 정통 무협극으로의 회귀이며, 동시에 일방적인 작가주의 경향이 그동안 저지른 ‘관객에 대한 무례’에 대한 사죄의 의미를 지닌 ‘반성문’이라고 할 수 있다. 『무협』이 ‘왕년의 전설’ 왕우를 ‘절대악’으로 등장시키고(그를 죽일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늘뿐이다. 불패의 신공을 지닌 그는 인간에게는 굴복하지 않는다. 벼락을 맞아 죽는다) 그를 오마쥬하는 ‘외팔이’ 씬(scene)을 일말의 주저도 없이 연출해내는 것도 바로 그런 역사적 맥락이 있기 때문이다(이번에는 주인공 견자단이 외팔이가 된다). ‘반성문 제출’의 의미, 그것을 감독이 의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구원받아야 하는 존재다. 가족만이 인간을 거기까지 실어 나르는 수레가 될 수 있다. 가족은 구원에 이르기 위한 선택 과정이 아니라 필수적인 전제이며 가족을 위한 희생과 헌신은 당연히 구원의 필수요소가 된다. 자기희생 없는 사랑은 없으며, 사랑의 절대적인 현신은 오직 가족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그 규범을 어기면 무협이 아니다. 돌아온 무협극들은 소리 높여 그런 메시지를 전한다. 가족이 다시 주제로, 중심으로 들어와 있다. 그래야 된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변하지 않아야 할 것은 변해서는 안 된다는 것, 바로 그 인간세의 변하지 않는 규범에 순종하는 것이 인간된 자들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무협영화의 변천사는 그런 가르침을 우리 모두에게 베푼다.


『검우강호』가 지닌 몇몇 가지의 부박(浮薄)하거나 조잡(粗雜)스러운 요소들은 그런 차원(대승적 차원)에서 기꺼이 용납되어야 할 사소한 문제들이다. 요즘 유행하는 ‘양악 수술’과 같은 ‘얼굴 고치기’ 모티프가 남용되는 것도 봐줄 만하다. 변신(거듭나기)을 통한 내적 존재 변환만이 진정한 구원의 전제 조건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대중적 화소(話素)를 가미한 것으로 이해된다. 일종의 줄기세포의 의미를 지닌 달마대사의 시신을 둘러싼 ‘보물찾기’ 모티프 역시, 9품 내시 전륜왕의 남성 회복, ‘가족 만들기에 대한 간절한 염원’을 효과적으로 담아내기 위한 피치 못할, 억지 춘향격인, 갈등(서사구조) 요구의 결과라고 봐 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런 허잡하고 조잡한 것들 사이에서 유독 빛나는 것들도 없지 않아 있다. 자신의 치명적인 결점을 상대에게 전이해 스스로 극복한 체달의 경지(장교어졸, 용회이명, 우청우탁, 이굴위신)로 그를 제압한다는 것은 이 영화가 보여준 또 하나의 ‘주제를 넘보는’ 탁월한 예술적 기법, 내용을 창출하는 화법(話法)이다. 그 ‘장교어졸’ 류의 화소는, 단순히 ‘네 칼로 너를 치리라’의 수준을 훨씬 상회하는, ‘오직 스스로 자신을 넘어선 자만이 승리할 수 있다’는 교훈을 내재한, 상급 이야기로 이 영화를 이끈다. 이른바 ‘고급 이야기의 품격’을 이 영화에 부여해 주는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 그 화법에 힘입어, 주제적 차원의 메시지인, 한 사람(육죽)의 희생과 헌신이 다른 이의 육신(세우)을 통해 여러 사람에게로 확산된다는 ‘희생과 사랑’의 서사가 실감 나게 전달된다. 이른바 ‘사랑의 전이’를 묘사하는 작가의 방법이 꽤나 자연스럽다. 전륜왕과 그의 일당들이 상반적으로 보여주는, 틈만 나면 대립하는, ‘욕망의 각축’과 선명하게 대비되면서,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희생과 헌신, 구원에 이르는 ‘완전한 사랑’의 현상학이 자연스럽게 관객들에게 전달된다.


영화를 말로 설명하는 것처럼 우매한 일도 없을 것이다. 영화는 누가 뭐래도 ‘보고 느끼는 예술’이다. 주인공의 눈빛 하나만으로도, 행동을 강화하고 완성해내는 주제음악 하나만으로도, 화면을 붉게 물들이는 낙조의 색감 하나만으로도, 순간적으로 감동과 열락을 경험하는 것이 영화다. 문자 그대로 영화는 종합예술인 것이다. 그래서 가족 이야기는 이 정도에서 그친다. 주제는 하나의 요소에 불과하다. 다만, 『검우강호』는 메시지가 중한 영화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가족의 중요성을, 희생이야말로 사랑의 가장 완전한 형태라는 것을, 표나게 강조하고 있다. 가족이야말로 인간이 만든 그 어떤 관념들보다 앞선 것이다. 자기를 버리고 상대를 살리는 것, 그것이 사랑의 요체고, 가족을 만드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영화는 전달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백미(白眉)는 육죽과 세우에 의해 계속적으로, 반복적으로, 음송(吟誦)되는 아난의 고사다. ‘완전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오래된 노래다(물론, 전비(前非)를 뉘우치면서, 죄 많은 자로서, 강아생과 같은 훌륭한 남편감을 만나서 행복을 추구할 자격이 자기에게 있느냐고 자책하는 세우의 회심(回心)이 전제될 때 ‘아난의 돌다리’의 울림도 제대로 전달될 것이다).


 아난이 출가하기 전 길에서 만난 한 소녀를 사랑했다. 아난의 괴로워하는 모습을 본 부처님이 그에게 물었다. 아난아, 네가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이 어떠냐. 그러자 아난이 대답했다.


저는 돌다리가 되기를 원합니다(我願化身石橋).

오백년 바람에 씻기우고(受五百年風吹)

오백년 햇볕에 쬐이고(受五百年日晒)

오백년 비에 맞은 후(受五百年雨打)

오직 그녀가 저를 밟고 건너가기만을 바랍니다(但求此少女叢橋上走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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