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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Mar 20. 2019

여자의 남자, 무간도

여자는 남자의 무의식이다

여자의 남자무간도   

   

죄의식이야말로 모든 병마(病魔)의 원인이다. 육체든 정신이든, 죄의식 때문에 패가망신할 때가 많다. 뻔뻔하게 살수록 각종의 ‘아픔’과 멀리할 수 있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다. 이론(異論)이 없다. 그런데, 여자는 남자의 무의식(죄의식)이다. 누가 그렇게 말한다면 일단 고개를 갸웃거릴 사람이 많을 것이다. 여자가 왜? 그러다가, 조금 시간이 지나면 대체로 남자들은 수긍한다. 물론 예외도 있다. 끝까지 수긍하지 않는 사람(남자)도 있다. 개중에는, 싸가지 없게, 여자야말로 내 삶의 원동력이요 보람(목표)이다라고 말하고 싶은 남자도 있을 줄로 안다. 그런 진상들은 무시하고, 일단 여자는 남자의 죄의식이라는 것을 수긍하기로 하자.  

    

여자가 남자의 죄의식이라는 말을 설명하자면, 모성애(母性愛) 혹은 모성 콤플렉스를 호출하는 것은 물론, 멀리 원죄 의식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가장 멀리는, 이브에게 원죄의 죄업(罪業)을 뒤집어씌운 아담의 죄과가 있다(그 죄과를 후손들이 갚은다). 가장 가까이는, 툭하면 자기 신호 위반이나 과속 벌금을 아내에게 뒤집어씌우는 남편 족속들(공무원 중에 그런 자들이 많다)이 있다. 그저 만만한 게 여자고 어머니다. 예수님도 말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나 때문에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 때문에 울어라보라,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아이를 배어 보지 못하고 젖을 먹여 보지 못한 여자는 행복하여라!’ 하고 말할 날이 올 것이다”라고 비통하게 말했다(루카복음). 십자가를 지고 가며, 주위의 우는 여자들에게 그렇게 말했다. 자식을 잃게 된 어머니의 슬픔, 그것에 대한 아들로서의 죄의식을 그렇게 말한 것으로 나는 이해한다. 아들 된 남자들은 모두 그 말에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 그래야 ‘사람의 아들’이다.  

    

오해가 없었으면 좋겠다. 제목이 <여자의 남자>라고, 동명의 소설(김한길, 1991)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영화 <무간도>(유위강․맥조휘, 2002)에 대한 이야기다. 어제 심심해서 유선방송 채널을 돌리다 한 영화 채널에서 그 영화를 봤다. 오랜만에 눈에 익은 몇 장면을 봤다. 그러면서 <여자의 남자>를 생각했다. 혼돈과 고통의 시간, 무간도(無間道)의 원인(原因, 遠因)으로서의 여자를 생각했다. 영화를 모르는 분들을 위해서, 영화사에서 선전용으로 배급한 줄거리 요약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2001년, 서로 엇갈린 운명의 두 남자가 있었다! 경찰 내부에 침투한 조직 스파이 유건명(유덕화), 그리고 범죄조직 삼합회의 소탕을 위해 침투한 경찰 스파이 진영인(양조위). 서로 엇갈린 운명을 살아가는 이들은 날이 갈수록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낀다. 삼합회에 점점 깊숙이 개입될수록 극심한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던 진영인은 정신과 상담의 닥터 리(진혜림)를 만나게 되면서 마음의 상처를 조금씩 덜어나간다. 삼합회에 위장 잠입한지 10년. 삼합회의 보스 한침(증지위)의 확실한 신임을 얻기 위해 진영인은 심등(진도명)을 제거하기 위한 미끼가 되기로까지 결심한다. 한편, 2002년 12월, 운명은 점차 비극을 향해 내닫는다. 경찰에 잠입한 10년 동안 유건명은 가장 뛰어난 강력반 요원으로 자리를 잡아나가고, 점점 완전한 경찰이 되어가면서 조직에서 완전히 손을 빼고 싶어 한다. 삼합회 보스의 범죄를 캐내는 대대적인 작전 중 서로의 존재를 눈치채게 된 유건명과 진영인. 숨막히는 추격전 끝에 진영인은 유건명에게 총을 겨누지만, 또 다른 조직 스파이에 의해 진영인은 결국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2004년,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는 운명의 결말, 진영인의 죽음 이후 한직으로 쫓겨나 경찰 내부 조사의 대상이 된 유건명. 힘겨운 시간을 보내던 유건명은 경찰 내부 최고의 엘리트인 보안부 반장 양금영(여명)을 보며 자신의 지난 전성기를 떠올린다. 하지만 어느 순간 유건명은 양금영에게 수상한 기운을 느끼고 비밀리에 자체 조사를 시작하게 된다. 양금영에 대한 조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유건명은 삼합회에 맞서는 또 다른 범죄 조식의 보스 심등과 양금영이 얽혀있는 놀라운 비밀들을 마주하게 된다.(이하 생략)      

영화 <무간도>는 총 3편으로 제작되었다. 위의 줄거리 소개에 등장하는 심등(진도명)과 양금영(여명)은 3편의 주인공들이다. 양금영은 1편에서 죽은 진영인의 역할(“나는 경관이다”를 외치는 자)을 수행한다. 물론 비중은 훨씬 약하다. 이를테면 그의 대역(代役)인 셈이다. 1편에서 진영인이 못 잡은 유건명을 3편에서 양금영이 잡는다. 양금영은 자신의 목숨까지 바쳐가며 유건명을 잡는다. 그 부분에서는 인정사정이 없다. 스스로 밝히고 다짐하는 바와 같이, 그는 경관이기 때문이다. 결국 유건명은 ‘무간도’로 떨어진다. 삶도 죽음도 없는 상태로 육체상의 목숨만 부지한다. 


그런데, 위의 줄거리 요약을 보면 여자 주인공 이야기가 없다. 시종일관 이 영화를 ‘남자들의 정체성 서사를 둘러싼 파란만장의 악전고투’로만 묘사한다. 그렇게 영화를 읽어달라는 의도가 엿보인다. 사실, 이 영화는 “뿌린 대로 거둔다”라는 예곤(삼합회의 보스, 진영인의 생부)의 말(2편에서 강조되는 의리계의 아포리즘)과 “나는 경관이다”라는 영인과 금영의 존재 증명 의지(1~3편을 관통한다)를 서사의 두 축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건명은 그 사이에서 혼돈과 고통의 시간을 보낸다. 진정한 경관이 되고 싶지만, 자기는 악의 씨앗이다. 그래서 결국 존재 전환을 이루지 못하고 무간도로 떨어진다. 그의 삶은 “뿌린 대로 거두어진다”. 그건 영인도 마찬가지다. 예곤의 서자인 그도 결국 뿌린 대로 거두어진다. 형인 영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그도 언젠가는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렇게 보면 위의 줄거리 요약에서 여자 이야기를 뺀 것은 당연하고 정당한 것이다. 1편에 나오는 정신과 의사 닥터리(진혜림)는 핵심 인물이 아니다. 진영인의 현재의 애인으로서, 훗날 진영인이 경관이었다는 것을 증거하는 증인의 역할에 만족해야 한다. 진영인은 그녀에게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그녀는 유일무이한 그의 ‘현재의 연인’이지만 1편에서 그녀가 차지하는 비중은 아주 미미하다. 그녀의 비중은 두어 번밖에 나오지 않는 진영인의 ‘과거의 연인’보다 훨씬 무게감이 없다.  

   

그러나, 무간도를 그렇게 단순명료하게 ‘남자들의 이야기’로만 이야기하는 것은 결례다. 공들여 영화를 만든 이들에 대한 결례다. 영화 <무간도>는 이중의 서사구조를 지닌다. 영화 이야기의 표층적 구조는 남자들의 존재 증명과 관련된 투쟁, 그들의 불꽃 튀는 정체성 탐색 과정을 지향하지만, 그 심층적 구조는 전혀 다르다. 한 겹 벗겨내면, 이 영화는 <‘여자가 원하는 남자’의 이야기>다. 이 영화에는 모든 현상의 배후로 작용하는 그레이트 마더(great-mother), 황국장과 한침과 유건명의 우로보로스(ouroboros, 자기 꼬리를 물고 있는 뱀 - 무의식)를 지배하는 여자 ‘메이(유가령)’가 있다. 한침의 ‘현재의 연인’인 그녀는  젊은 날의 한침과 황국장이 동시에 사랑했던 여인이었고, 건명의 젊은 날(진관희)을 지배했던 그레이트 마더(great mother, 무의식의 어머니-연인)였다. 건명은 메이의 아들-연인(son-lover)이 되고 싶었지만 그녀가 한침에게 일부종사(一夫從事)한다는 걸 알고 그녀를 죽인다(예곤 살해의 주범인 그녀를 밀고해 죽게 한다). 황국장이 오랜 친구인 한침을 죽이려 하고, 그것을 안 한침이 부하를 시켜 황국장을 죽이고, 결국은 자신도 자신이 키운 건명에게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모두, 그들이 메이라는 우로보로스, 사신(死神)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부린, 사랑의 마술에 걸린 남자들은 꼼짝없이 우로보로스의 감옥 안에 갇혀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모두 죽어 마땅한 <여자의 남자>들이었다. 작가는 그것으로도 부족해서 건명의 현재의 연인에게도 ‘메이’라는 이름을 부여한다. 현재의 연인, 젊은 메이 역시 사랑의 마술사다. 그녀는 건명에게 하나의 정체성 서사만을 쓸 것을 요구한다. 그것이야말로 ‘여자의 남자’의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이다. 그것이 건명을 결정적으로 흔든다. 그녀의 직업은 소설가다. 이 영화의 텍스트 무의식은 <무간도>가 다름 아닌 그녀의 작품이라고, 그녀가 쓴 죽어 마땅한 <여자의 남자>들의 이야기라고, 귓속말로, 전한다. 그들은 모두 “죽어 마땅한 남정네들이었다”고 그녀는 속삭인다.      

 

거듭 말하지만, 영화 <무간도>는 남자가 전하는 남자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직 여자(연인이자 어머니인 메이)가 욕망하는 것을 들려줄 뿐이다. 그녀의 관점에서, ‘남자는 무엇인가?’, ‘그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등을 묻는다. 남자의 시선, 남자의 욕망을 영화는 강조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영화에서 그리고 있는 이 ‘남자의 시선’이야말로, 여자의 욕망을 의식하고 있는, ‘여성의 욕망에 의해 매개된 남자의 시선’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남자 주인공들은 고작 여성의 아니무스(animus)다. 그들이 돈이나 감투나 하찮은 시기 질투에 전혀 연연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영화 속의 남자 주인공들은 오직 사랑과 본분(本分)만을 탐한다. 그들은 모두 현실 속의 실제 남자들이 아니다. 환상이다. 여자들이 원하는 남자의 환상, 혹은 남자들이 생각하는 그것.      

이 영화의 전편을 흐르는 주제가 <메이의 노래>는 그런 이 영화의 내적 형식을 드러내는, 이야기의 사물적 요소다. 유건명이 사로잡혀 있는 이 노래를 통해 작가는 이 영화가 한 여인의 시선, 그녀의 욕망을 따라 전개된다는 암시를 던진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성살해(2편, 건명의 메이 살해)와 부성살해(1편에서의 건명의 한침 살해와, 2편에서의 건명의 예곤 살해)는 아들-연인의 ‘어머니의 몸’을 취하려는 욕망(외디푸스적 욕망)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를 측정하는 수단이 된다. 그래서 한편으로 그것은 남자(아들)의 욕망으로 나타난 여자(그레이트 마더)의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결국 메이의 ‘(자신의)죽음까지 관통하는 에로티즘’이다. 이 영화의 최종 주인공 건명은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여자의 남자>다(그를 뺀 나머지 주인공들은 모두 죽는다. 그만이 살아서 영원한 혼돈과 고통의 시간, 무간도에 든다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무간도는 결국 우로보로스다).      

같은 <여자의 남자>에 대한 이야기지만, 헝가리의 피아니스트 레죄 세레스(Rezső Seress)가 1933년에 발표한, 숱한 자살을 불러일으킨 동명의 노래를 소재로 삼은 영화 <글루미선데이>(롤프 슈벨, 1999)는 그 반대다. 한 여자(일로나)를 둘러싼 세 남자(자보, 한스, 안드라스)의 삶과 죽음을 보여주고 있지만, 이 영화는 남자들이 생각하는(의식, 무의식) 여자에 대해 이야기한다. 영화의 주인공 일로나는 ‘천사’다(영화에서도 등장인물들에 의해 그렇게 발화된다). <무간도>의 메이가 마녀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과는 대비적이다. 아들이 어머니의 세 남자, 자신의 세 아버지에 대한 보고서를 쓰면서 매긴 어머니의 캐릭터인 탓으로 그렇다(이 영화는 전적으로 아들의 환상이다). 영화 <글루미 선데이>의 텍스트 무의식은 이 이야기가 아버지 모르고 태어난 한 아들의 사모곡이라고 귓속말로 전한다(그는 한스의 아들이다. 그는 아내의 사주를 받은 아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라이오스다. 아들은 어머니를 능욕하고 자신을 버린 아버지에게 복수한다). 그때, ‘아들’는 어쩔 수 없이 타고난 <여자의 남자>다. 아버지 없이 자란 어머니만의 아들이다. 그러므로 일로나는 남성들의 아니마, 아들-연인의 욕망 속에 담겨진 영원한 불패의 어머니상(母像, mother figure)이라고 볼 수 있다. <무간도>가 ‘아들 연인’에게 좌절한 ‘현재의 연인 메이’가 들려주는 ‘여자’의 <여자의 남자> 이야기라면, <글루미선데이>는 어머니를 독차지한 ‘아들 연인’인 ‘남자’가 들려주는 <여자의 남자> 이야기다. 그래서 일로나는 천사(生命)고 메이는 악마(死神)다. 일로나는 천사가 되는데, 메이(유가령)가, 뭇 남자를 매혹시킨 죄로, 어떻든 죽어 마땅한 여자로 그려지는 <무간도>와는 전혀 상반된 결과가 나오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화자가 다르기 때문이다. 한 영화는 연인이, 다른 영화는 아들이 숨은 화자이기 때문이다. 두 영화는 그래서 모든 것이 달라진다. 공통점이 없는 건 아니다. 두 영화의 유일한 공통점은, 언제나 남자들은 여자 때문에 서로를 죽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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