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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Mar 21. 2019

품으로 뛰어드는 짐승은

‘수지비(水地比)’, 비(比)괘는 주역 여덟번째 괘

품으로 뛰어드는 짐승은 잡지 않는다   

  

제 직장 앞에 ‘세렌디피티(serendipity)’라는 커피집이 있었습니다. 신축 건물의 1층에 있던 가게였습니다. 한두 번 들렀던 기억이 있습니다. 대부분 무심코 지나치던 곳이었는데 어느 날 보니 다른 간판으로 바뀌어져 있었습니다. 살펴보니 간판만 바뀐 게 아니라 업종 자체가 바뀐 듯했습니다. 음료만 팔던 찻집에서 경양식도 파는 식당으로 바뀐 것입니다. 새로 생긴 이웃이니 얼굴이나 한 번 트는 의미로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그러나 아직까지 한 번도 들어가 보지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학생 전용 식당인 것 같았습니다). 그 장소가 제게 주었던 첫 인상이 남달랐습니다. "뜻밖의 발견(을 하는 능력), 의도하지 않은 발견, 운 좋게 발견한 것"을 뜻한다는 ‘세렌디피티’가 상호로 등장했을 때 제게는 약간의 혼선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까지 그 말뜻을 몰랐습니다. 그냥 지나치다가 문득 그 뜻이 궁금해졌습니다.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들어오던 중에 그 집으로 들어가자고 했습니다. 일행과 함께 커피를 시켜놓고 그 뜻을 물었습니다. 일행 중의 한 사람이 ‘우연한 발견’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이런저런 용례를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교육계에서는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제목의 영화도 있는데 그 내용이 이렇다는 등의 이야기였습니다. 제가 듣기에 그 단어 자체가 ‘새로운 발견’ 취급을 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로 그 간판을 볼 때마다 세렝게티라는 아프리카의 한 초원이 생각나는 거였습니다. 거대한 삶의 터전이며 치열한 생존 경쟁이 이루어지는 사냥터이기도 한 그곳이 자유연상적으로 자꾸 떠올랐습니다. “세렝게티(Serengeti)는 탄자니아 서부에서 케냐 남서부에 걸쳐 있는 3만 km²가 넘는 땅으로, 30여 종의 초식동물과 500종이 넘는 조류들이 함께 살아가는 곳이다”, 급기야는 인터넷 검색까지 해 보았습니다. 그럴듯하게도, 간판 색깔마저 그린색이어서 더 그곳을 연상케 했습니다. 그러고도 한참이 지난 뒤였는데 불현 듯 그 집 앞을 지날 때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dubliner)이 생각나는 거였습니다. 그리고는 제가 살고 있는 도시가 조이스가 실감나게 그려낸 더블린이라는 도시와 매우 흡사하다는 생각도 들었고, 이어서 그가 강조한 에피파니 (Epiphany)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아마 ‘발견’이라는 연결고리 때문이었지 싶습니다. 에피파니는 원래 그리스어로 ‘귀한 것이 나타났다’라는 뜻으로 한순간 대상의 전체를 깨닫게 된다는 뜻이랍니다. 한자로는 ‘현현’(顯現)이라고 쓰기도 합니다. 에피파니든 세렌디피티든 모두 ‘신기한 발견’이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어쨌든 그 커피집의 간판은 마지막 순간까지 제게 이런저런 복잡한 연상을 제공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무언가 그 앞에 서면 저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세렝게티, 사냥터, 더블리너, 에피파니, 세렌디피티....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문 자유연상이 회오리바람처럼 저를 휩싸고 돌았던 것입니다. 그것들의 서열을 한 번 매겨보았습니다. 세렌디피티가 가장 서열이 낮았습니다. 때때로 그 단어는 낙오되기도 했습니다. 가장 늦게 장기 기억 창고에 저장된 단어이기도 했고, 그 의미도 별반 큰 감동을 주지 않았기 때문인 듯했습니다. 제 생각에(무의식 포함), 모든 발견은 이미 우연인데 왜 그렇게 따로 단어를 만들어 강조해야 하는지 그 연유가 끝내 궁금했던 모양입니다. 평생을 우연한 발견만 기대하며 세월을 탕진한 제게는 아예 존재할 이유가 없는 단어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래 전 이야깁니다. 사냥을 즐기던 선생님이 암 수술을 받고 병원에 계셔서 문병을 갔습니다. 선생님의 가까운 동학, 후배, 제자들 몇 사람만 갔습니다. 좋은 일도 아니어서 널리 알리지 말라는 당부도 계셨습니다. 문병 자리에서 한 후배가 선생님의 사냥 취미를 험했습니다. 생명을 중시해야 한다는 취지였습니다. 듣는 선생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담배도 안 피우시고 운동도 꾸준히 하시는데 그런 몹쓸 병을 얻은 것은 순전히 희생된 생명들의 앙갚음 아니겠느냐는 논리였습니다. 항렬상 제가 나설 자리가 아니라서 가만히 있었습니다만 문병 가서 할 이야기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인과응보’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강조할 일이지 ‘사람 아닌 것’들과의 관계로까지 일방적으로 확장해서는 안 될 사항이었습니다. 사람마다 생명관이 다르고 종교가 다릅니다. 세렝게티의 약육강식을 인간의 윤리로 어떻게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저마다의 사정이 지구상에서 생명을 타고 난 것들 사이의 ‘부득이한 관계’입니다. 자기 종교나 자기 인생철학만 앞세워 남의 그것을 폄하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을 공연히 자기 속마음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듣는 이에게 상처를 줄 요량으로, 사용해서는 더더욱 안 될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생명)에 대한 예의가 아니니까요. 어쨌든 그런 철없는 소리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은 조기에 치료를 잘 하셔서 지금껏 건강하십니다.  

  

구오는 친함을 드러내니 왕이 세 군데로 몰며 사냥함에 앞으로 향하는 짐승을 놓아주며, 읍사람이 경계하지 않으니 길하다. (九五顯比 王用三驅 失前禽 邑人不誡 吉)[왕필, 임채우 옮김, 『주역왕필주』, 도서출판 길, 1999(2쇄), 95쪽]     


‘수지비(水地比)’, 비(比)괘는 주역 여덟번째 괘입니다. 음효가 다섯 개 양효가 하나인 형상입니다. 다섯 번째 양효(九五)가 의미의 핵심이라고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앞 장의 ‘지수사’가 물을 품은 땅이라면, 이 장의 ‘수지비’는 땅 위에 고인 물입니다. 땅 위에 고인 물은 그것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길도 되고 흉도 됩니다. 그 방법을 사냥에 비유하여 설하고 있는 것이 위의 인용대목입니다. 구오(九五)효의 의미에 대해서 상술하고 있는 부분을 옮겨보겠습니다.     

비괘의 주(主)로 이(二)효에 응하고 있어 친함을 드러내 놓는다. 드러내놓고 친하면 친해질 자가 제한되지만, 무릇 외물에 사사로움을 가지지 않고 오직 어진 이만을 함께 한다면, 가거나 오거나 모두 놓치지 않는다. 저 세 군데로 모는 삼구(三驅)의 예는 짐승이 거꾸로 자신을 향하여 오면 놓아주고 자기를 등지고 도망치면 쏘아 잡으니 오는 것을 사랑하고 가버리는 것을 미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사냥할 때 항상 마주 오는 짐승을 놓아주는 것은 친함을 드러내놓고 왕위에 거하여 삼구(三驅)의 도를 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왕용삼구실전금(王用三驅失前禽)’이라 하였다. 중정을 쓰므로 정벌에 상도(常道)가 있어 읍을 토벌하지 않고 움직임에 반드시 반란을 토벌하여 읍인(邑人)이 걱정이 없으므로 경계하지 않는 것이다. 비록 대인의 길함은 얻지 못하였으나 친함을 드러내서 길함을 얻었으니, 이는 위에서 사람을 부리는 방식(上之使)은 되나 왕의 도(上之道)는 아니다. [왕필, 임채우 옮김, 『주역왕필주』, 도서출판 길, 1999(2쇄), 95쪽]     


사방을 막지 않고 한 군데는 터놓고 짐승을 몬다는 것이 ‘삼구의 예’라는 거였군요. 사냥터 자체가 ‘왕도(王道)’를 드러내는 좋은 공간이 아니었으므로 궁여지책으로 ‘삼구’를 끌어들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使)’는 될지언정 ‘도(道)’는 아니라고 말했군요. 사람을 사귀다보면 만사에 ‘사(使)’만 내세우는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생각해 보니 저도 그런 부류에 속하는 것 같습니다). ‘사(使)’의 인간관계는 명확하게 한계가 있습니다. 어느 선 안으로는 들어오지 않습니다. 경계심을 풀지언정 흉금을 터놓고 지내는 내 사람이 되지는 않습니다. 자기는 굳이 ‘친함’을 드러내고저 하는데 상대방들은 종내 품 안으로 뛰어들지 않습니다. 밖으로 달아나기만 합니다. ‘삼구의 예’가 통하지 않습니다. 오직 힘을 가지고 있을 때만 사냥터의 주인이 됩니다. ‘도(道)’를 마다하고 ‘사(使)’만 앞세우며 사냥터의 주인 행세를 하다가는 결국 자신도 ‘삼구의 예’로 내몰림을 당하는 운명에 직면합니다(생각해 보니 얼마 전까지 저도 그렇게 내몰렸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미련 없이 사냥터를 떠나는 것이 해결책입니다. 어쨌든 제겐 ‘도(道)’가 없었습니다. 생긴 것부터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 흔한 “도를 아십니까?‘라는 질문도 여태 한 번 받아본 적이 없었던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2015. 3. 21. 오늘 아침 일부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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