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끄적 그리스 Πρόλογος
한국의 20대라면 아마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라는 책을 읽으며 자랐을 것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한 번 쯤은 봤을 것. 필독서였을 뿐만 아니라 재미도 있다고! 그런데 나는 유난히 그리스 신화에 푹 빠져들었다. 올림포스 신의 가계도를 정리해보거나 그리스 신화에서 기원한 영어단어를 찾아보거나, 그리스 신화를 소재로 한 그림, 책들을 찾아보는 것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 없었다.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의 로마 이름을 따 영어 이름을 Diana로 지은 적 있었을 정도다.
만화에서 벗어나 제대로 된 책을 찾다가 토마스 불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까지 읽게 되었다. 그때 나의 목표가 생겼다. 그리스어로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를 읽는 것. 그리스 신화 박물관을 다니다가 보게 된 아크로폴리스를 직접 눈으로 보는 것. 후자는 막말로 돈만 있으면 가능한 일이지만 전자는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라는 걸 어린 초딩은 몰랐을 수밖에.. 어찌 됐든.. 그리하여 지식인 어머니의 무한 지원에 힘입어 그리스학과로 진학을 할 수 있었고 조금이라도 그리스에 가까워졌으니 만족이다. 11살 이시후의 꿈은 그래도 곧 이루어질 거야
어렸을 때부터 꿈꿔왔던 그리스에서 그리스를 배우고 있지만 처음 만난 사람에게 내 소개를 하다 보면 대부분 놀라며 되묻는다. ‘그리스어요?’ 내가 듣기에도 생소한데 남들에겐 더더욱 그럴 것이다. 최소한 관광이나 무역, 선박, 통역 등 관련 일을 하고 있다면 수긍을 하겠지만, 전공이라고 하면 다들 속으로 뭐라고 말하는지 말하지 않아도 다 보인다. 보통의 어른들은 대부분 쓸데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인지 망한 나라에서 무얼 하려고 하느냐, 취업 경로를 물어보려는 의도가 아니라 그냥 돈벌이가 되기는 하냐며 물어보는 사람도 있다.
사실 나도 내 앞날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 대학원? 성적 관리하기 싫고. 관광업? 몸이 너무 힘들다. 사실 내가 직업을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꿈의 방향성을 직업으로만 한정하기에는 너무 섣부르다. 그나마 가장 구체적인 결론은 ‘내 관심분야와 직접 연관되지 않은 직업을 찾되 언제든지 원할 때 그리스 답사를 떠날 수 있는 곳에 사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너무 포괄적인 꿈인데다가 기회마저 찾기 어려운 것이 실상이다. 당장 7개월 후의 ‘신분’이 보장되어있지 않음에도 될 대로 되라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 전공을 살려 일을 하거나, 졸업하자마자 취직한 회사에서 평생 일하는 사람, 정말 심장이 뛰는 일을 하는 사람이 분명 있겠지만 얼마나? 정석대로 살지 못한다고 굳이 스트레스받을 필요 없고, 어차피 찾아오는 고생을 굳이 사서 해야 하나, 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아직 24년 정도밖에 안 되는 세월이기는 하지만 항상 하기 싫은 일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받기보다는 매 순간마다 느끼는 대로 흐르듯이 살아왔다.
도깨비를 보면서 정말 전생이 있을까 잠깐 생각했지만 인생은 한 번이다.
2014년 그리스 땅을 처음 밟았다. 그리스어를 배우겠다고 목표는 있었지만 사실 내가 그리스를 올 수 있을까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꿈의 순간이었다. 상상치도 못한 많은 운이 따라주었고 좋은 사람들도 정말 많이 만났다. 덕분에 행복한 3개월을 보내고 이게 마지막 일거라 생각했는데 2015년, 2016년 그리고 2017년까지. 역시 사람 일은 한 치 앞도 보지 못한다고 하는데, 이제는 내 삶에 그리스가 없다면 이상할 정도가 되어버렸다. 한국과 그리스를 왔다 갔다 하다 보면 내 삶에서 부족했던 균형이 맞춰지는 것 같다. 앞으로 얼마나 그리스와의 인연이 지속될지는 모르겠지만, 글을 쓰고 사진을 남기며 나의 추억을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사이가 더 돈독해지는 느낌이다.
현재 내 최대 관심사는 ‘그리스’. 그냥 이 곳에서 생활하며 최대한 많은 것을 배우고 가는 것, 그 이외의 일은 나중에 생각하고 싶다. 정말 힘든 세상에 치여 내가 나를 잃어가고 있을 때, 나의 삶을 돌아보기 위해 내 그리스 라이프를 끄적거려보려고 한다.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