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과 요조

피에르 드리외 라 로셸 『도깨비불』

by 책장

피에르 드리외 라 로셸은 늘 죽음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여인과의 결별로 자살을 생각했고, 정치학교 졸업시험에 낙방하고도 자살을 생각했으며, 1차 세계대전에 종군했고, 파시스트 선언을 후회하며 세 번의 자살시도 끝에 생을 마감했으니. 매 순간 죽음을 떠올리는 삶이란 어떠한가.


「잘 가라, 공자그」에서는 세상은 엿이나 먹으라는 듯 자크 리고의 죽음을 두둔하는데, 더께가 진 멜랑콜리에 께름칙하더라. 얼마큼의 죽음을 보고 들었건 죽은 사람을 떠올릴 때마다 아릿한데, 자살이 아름답다니. 1920년대 전후 파리의 우울이라 압축하기에는, 자살을 남성적인 행동의 정점이라고 여겼다는 드리외의 과격한 기질을 무시할 수 없을 것 같다. 『도깨비불』의 알랭은 리고를 모델로 둔 인물이고 나는 결국 알랭을 이해하게 되었지만, 자살이 아름다울 만큼 삶이 허무하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너는 실없이 죽었지만 너의 죽음은 결국 인간이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오로지 죽는 것뿐이며 그 자존감, 인간이 지닌 존엄성에 대한 느낌-끊임없이 모욕당하고 멸시받았던 네가 지녔던 그 느낌-을 정당화하는 것이 있다면 인간은 언제라도 삶을 내팽개치고 하나의 생각, 하나의 감정만으로 단숨에 그 삶을 희롱할 각오가 되어 있음을 증명했다.” 「잘 가라, 공자그」 중


삶이 참 모질게 굴어서, 조롱이라도 하듯 제 숨통을 겨누는 삶. 그러니 알랭의 죽음은 삶을 짊어지지 못한 자의 가여운 말로도 아니고, 자기 환멸로 그득한 자의 무기력한 변명도 아니다. 데카당스나 댄디즘을 끌어들이지 않아도 『인간 실격』의 요조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나는 요조를 좋아했던가. 연민을 느꼈던가. 인간 군상들에 환멸을 느꼈던가. 아니면 나의 칙칙한 내면을 마주했던가. 당시에는 병든 인간들을 방치해두고는 애먼 인간에게 상처를 준 요조에게 퍽 질렸더랬다. 인간 실격이라고 지레 선언하기 있기냐, 외치고픈 단순한 마음이었달까.


요조든 알랭이든 아니꼬울 만큼 염세적이다. 알랭이 ‘나도 브랑시옹처럼 되고 싶었는데’라고 중얼거리지 않았더라면, ‘완벽한 저택에서 상냥한 친구와 길고 긴 행복한 하루를 보내는 일’을 곱씹어보지 않았더라면, 여전히 아니꼬운 염세주의자로 남았을 텐데. 알랭의 중얼거림에 흠칫하고 말았다. 자살이 ‘일상에 의해 활력이 녹슬어버린 사람들의 밑천’이라면, 왜 그리 녹슬었는지라도 알아줘야지 싶었다. 요조도 알랭도 손쓸 수 없는 인간이라고 낙인찍기에는, 우울에 갉아먹혔을지언정 인간의 온정이라고 할 만한 것들을 갈구하지 않았나.


부디 전보로 회신 바람. 당신이 필요함. 촌각을 다투는 일.
당신의 애인이 파리에 있어요.
끈기와 희망을 갖고 당신의 편지를 기다림.


알랭은 도로시에게 보낼 전보를 세 번에 걸쳐 다듬는다. 여자가 주는 돈은 ‘밤이며 마약’이었고 마약은 ‘죽음에 감염’되는 것이었으니 전보를 보낸다는 건 죽음을 연장하는 행위인데, 알랭은 아이러니하게도 글을 쓰며 삶의 감동을 느낀다. 다음 날이면 시들해질 테지만 품고 살아가기에 얄팍하지만은 않은. 알랭은 끝내 죽었지만, 아무래도 나는 각진 것보다 둥근 것이 더 좋아서, 자그마한 삶의 감각에 마음이 동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