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 노동 끝판대장, 병간호와 마주하였다.
열흘간의 자가격리가 끝나고, 그 후로 2주나 더 지속된 아이의 가정보육과 줌 수업이 끝나고 드디어 정상 등원을 하게 되었다. 아직 코로나는 가라앉을 줄 몰랐지만 가정보육과 온라인 수업을 지속하는 것은 모든 가정을 파탄 나게 할 것만 같았기에 모두를 위해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7살짜리 첫째 아이는 바로 적응을 했다. 집에만 있다가 유치원에 가서 친구들과 선생님을 만나서 이야기하고 장난치고 뛰고 놀고 하는 게 너무나도 즐겁다고 했다.
그런데 4살짜리 둘째 아이는 달랐다. 사실 둘째는 형의 자가격리기간 열흘이 끝난 뒤 바로 어린이집을 나가도 되는 상황이었지만, 그 당시가 급격하게 코로나 확진자수가 늘어나는 추세이기도 했고 형과 엄마가 집에 있는데 자기만 어린이집을 가려고 하지 않아 그냥 집에 데리고 있었다. 이게 화근이었었던 것 같다. 형이 유치원을 가게 됐는데도 얘는 영 어린이집을 가려고 하지 않았다. 원래도 집과 이불을 좋아하는 아인데 갑자기 이걸 떨쳐두고 어린이집엘 가라고 하니 세상 서럽게 울 수가 없었다. 3살 때부터 어린이집을 잘 다녔었는데 얘가 왜 이럴까. 이제 좀 컸다고 집에서 엄마를 독차지하고 싶은 걸까. 그렇지만 엄마도 집에서 할 일이 있는데 계속 이렇게 집에만 있을 수는 없어. 결국 아침에 갔다가 점심 먹고 오기로 약속하고 얼르고 달래 겨우 어린이집을 보냈다.
그러나 억지로 간 어린이집 생활은 곧 탈이 났다. 등원 이틀 만에 감기에 걸렸다. 둘째만 걸린 게 아니라 첫째도 같이 걸렸다. 사실 누가 먼저 걸렸는지는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확실한 건 둘 다 집에서만 지내다가 단체생활을 하게 되니 어디선가 바이러스를 옮아온 것이라는 것. 역시 아직 보내지 말았어야 했나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첫날은 아이 둘 모두 하루 종일 열이 났다. 혹시 코로난가? 싶어서 의사인 친구에게 물어보았다. 그렇지만 이 친구라고 알 수가 있나. 그냥 지나가는 열감기일 수도 있는데 열만 나면 다들 코로나냐고 묻는 상황에 소아과 의사인 친구도 지친 것 같았다. 그래 3주 넘게 집에 있었는데 코로나 걸리는 것도 이상하지. 더군다나 자가격리 해제될 때 이미 음성 판정도 받았는걸. 그렇게 정신을 다 잡고 4시간 간격으로 해열제를 챙겨 먹고 머리에 물수건 올려주고 갈아주고 열 재고 열이 떨어지면 안도하고 다시 오르면 절망하는 24시간을 보냈다.
둘째 날 아침, 첫째 아이는 털고 일어섰다. 동생은 아직도 이불과 한 몸이었다. 계속해서 해열제를 챙겨 먹고 물수건도 올려주고 몸도 닦아주고 열이 내릴 수 있는 온갖 방법은 다 썼다. 이렇게 적으니까 되게 평온한 병간호처럼 보이지만 그 과정에서 아이의 저항이 어마 무시했다. 약도 안 먹어, 물수건도 싫어, 축축한 거 짜증 나, 귀에 온도계 넣는 것도 싫어, 다 싫어 싫어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다. 밥은 당연히 안 먹었고 하루 종일 주스와 젤리만 먹었다. 그리고 밤이 되자 첫째도 언제 나았었냐는 듯 다시 열이 오르며 이불과 한 몸이 됐다.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은 원래 낮에는 아무렇지도 않다가 밤만 되면 아픈 거라고 태평한 소리를 했다. 그리고 또 밤새 열 재고, 때때마다 해열제 먹이고, 안 먹는다고 버티면 주스와 젤리로 유혹해서 약을 먹이고, 그렇게 해서 열이 떨어지면 안도하고 다시 오르면 절망하는 밤을 보냈다.
그러는 사이에 나는 급격하게 지쳐갔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밤새 병간호를 하고 낮에는 낮대로 아이들의 짜증과 요구를 받아주느라 탈진상태였다. 그동안 남편은 뭐했냐고? 태평하게 잠만 잤다 라고 하면 욕하기 딱 좋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우리 남편도 투병 중이었다.
사실 첫째 아이의 자가격리가 해제된 직후 남편은 수술을 받았다. 오랫동안 앓고 있던 지병 때문이었는데, 병원에서는 별 것 아니라는 듯이 이야기했다는데 알고 보니 전신마취를 동원한 수술이었다. 수술 후 회복하는데도 시간이 꽤 걸리는 것이었을 텐데, 하필이면 남편이 마취제 부작용으로 약 일주일간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두통에 시달렸다. 내리 휴가를 쓰며 집에서 회복기를 가졌는데 안방에는 줌 수업한다고 첫째 아이가 들어앉아있고 수시로 둘째가 들락날락 거리며 아빠 이거 해줘 저거 해줘 하는 통에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 나도 최대한 남편이 쉴 수 있도록 배려해준다고 하긴 했는데 혼자서 감당해내기 어려운 가정보육 상태에 남편도 역시 충분히 휴식을 취하진 못했을 것이다. 주간에는 친정 엄마께 애들을 좀 봐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었는데, 남편이 수술 사실을 가족들에게 알리고 싶어 하지 않아서 그러지도 못했다. 아이들 돌보느라 온 정신이 다 빠지는데 아픈 남편 수발까지 들어야 하는 상황까지 되니 내 상태도 말이 아니었다.
다행히 첫째 아이는 그래도 열감기가 곧 떨어졌다. 둘째는 결국 병원까지 갔다. 병원에서는 항생제를 처방해줬고 다행히 바로 나았다. 코로나 아니냐는 의심을 받을까 걱정했는데 병원에서는 코로나의 ㅋ자도 꺼내지 않았다. 나중에 의사인 친구 이야기를 들어보니, 병원은 코로나 확진자가 다녀갔다고 하면 병원 문을 2주 동안 닫아야 해서 어지간해서는 코로나 의심을 잘 안 한다고 했다. 의사들도 참 힘들겠다 싶었다.
이렇게 해서 일주일 간의 열감기 투병이 끝나나 했다. 다 낫고 드디어 어린이집 등원 하루 했더니 이번엔 또 바로 장염에 걸렸다. 첫째도 옮았는데 다행히 3일 만에 나았다. 둘째는 일주일이 넘게 설사를 했다. 초반에는 열도 났다. 위에서 언급한 해열제-물수건-열재기-내리면안도/안내리면절망 사이클을 며칠을 반복했다. 흙탕물 빛깔의 지사제는 죽어도 안 먹으려고 해서 설사가 도통 멈추질 않았다. 억지로 먹이면 토하고, 젤리로 달래려고 하면 젤리만 쏙 골라먹고, 안 먹는다고 울고불고. 아니 도대체 달걀도 인공으로 만들어내는 이 21세기에 약 맛은 아직도 이 지경인 걸까. 혹시 다른 병원에 가면 다른 약을 처방해줄까 싶어서 다른 병원도 가봤는데 약은 똑같은 흙탕물 색이었다. 신이시여....
아픈 이야기 너무 계속 쓰면 나도 힘들고 읽는 사람도 힘드니까 이 정도로만 써야겠다. 아무튼 열감기에 장염까지 덮쳐서 약 2주 넘게 병간호만 했다. 아참, 그러고 보니 장염 낫자마자 둘째가 바로 식품 알레르기로 두드러기가 나서 온몸을 긁는 병도 생겼었다. 다행히 이건 알레르기 시럽 먹고 하루 만에 나았지만 손 힘도 어지간히 센 울아덜 힘차게 벅벅 긁어댄 통에 다리에 난 손톱자국은 며칠을 더 갔다. 누가 보면 채찍으로 맞은 줄 의심했을 것 같았다.
이 기간을 다 겪고 나서 이제와 돌이켜보니 '아 그때 정말 힘들었는데' 하는 기억으로만 남았지만 그 순간에는 정말 너무너무 힘들고 하루하루가 절망적이었다. 나는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증상에 차도는 없고 오히려 더 상황이 악화되기만 하는 걸 보며 무력감이 커져갔다. 이 와중에 나의 일은 뒷전으로 미뤄졌고 나의 욕구는 어디서도 분출할 수 없었다. 나도 사람인지라 지치고 힘들어지면 아이들에게 짜증을 낼 때가 생겼는데 그러고 나면 더 기분이 안 좋았다. 나도 감정이 있고 한계가 있는 사람인데 이걸 표현하는 것 자체가 죄책감 드는 일이라니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정부모님과 건강을 회복한 남편의 도움도 많이 받았지만 아이들이 아픈 것에 대한 전적인 책임이 나에게 있는 것 같아 항상 중압감에 짓눌렸다.
작년에 '서울의 엄마들'이라는 프로젝트에 참여했었다. 문화기획자 김다은의 독립출판물 프로젝트로, 2020년, 서울, 엄마, 코로나, 돌봄 등의 키워드와 유관한 사람들 10명의 인터뷰를 모아 책으로 냈던 기획이었다. 나는 서울에서 나고 자라 도시계획을 공부하고 부동산 관련된 일을 하는 두 아이의 엄마로서, 서울과 도시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또 2020년 서울시민들에게 큰 화두였던(지금도 화두인) 부동산 문제에 어떻게 엄마로서 대응하고 생각하는지에 대해, 그리고 여성의 사회적 참여와 경제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풀었었다. 그때까지 나는 내가 정말 정말 평범한 서울시민, 그리고 서울에서 살아가는 동시대 여성의 표본의 전형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그런데 출판물을 지인 몇 명에게 나눠주고 피드백을 받다 보니 나의 이러한 생각은 와장창 깨지고 말았다. '서울의 엄마들' 책은 조금 특이한 형태였는데, 본문의 인터뷰는 익명으로 나와있고 책의 끄트머리에 누가 누구였는지 밝혀놨다.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 사람이 어떤 글을 썼는지,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한 편견, 선입견을 없애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런데 내 글은 익명이지만 '여기요 여기 경작인 있어요^^' 하고 손들고 있더란다. 그 이유를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사실 나는 다른 인터뷰이들과 다르게, 다른 엄마들과 다르게 돌봄에 대한 지분이 약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첫 아이를 낳고 나서 7개월 만에 회사에 복직했었다. 아직 제대로 기지도 못하는 아이를 두발로 서고 의사소통 가능하게 만든 것은 우리 엄마였다. 아이가 아파도 주간에는 할머니가 봐주고 나는 야간에만 보초를 서면 되었다. 그러다 보니 돌봄에 대한 책임과 노동강도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휴직을 하고 집에 있다 보니 이게 24시간 나의 일이 되었다. 뭐가 조금만 잘못되어도 나의 책임인 것 같았다.
그때 같이 인터뷰했던 엄마들 중에는, 장애아를 키우고 계신 분도 있었고, 아픈 가족을 돌보다 보니 돌봄이 적성에 맞는 걸 발견하고 호스피스가 된 분도 계셨다. 이분들은 모두 5~60대라 나보다 훨씬 긴 세월 동안 돌봄 노동을 해왔을 텐데 그것에 대한 힘듬이랄지 원망이랄지 하는 것들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미 지나간 세월이라서, 또 이게 내 적성이라서 내가 선택한 것이라서 그럴 수도 있다. 그렇지만 누구나 다 그 현실에 닥치면 힘든 건 매한가지일 것이다.
그분들과 내가 다른 점은, 돌봄 노동은 세상 어디에도 누구에게나 꼭 필요한 것이라는 인식, 그리고 이 노동이 그만큼 중요하고 숭고한 것이라는 인식이 있었냐 없었냐에 있다고 본다. 나는 그동안 생산성 높은 일에만 집중해왔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일, 돈을 많이 버는 일, 누구에게나 세련되고 팬시해 보이는 일, 남들이 선망하는 일. 그러나 대통령 아들이라도, 수조 원대 자산가여도 유아기와 병과 늙음은 통제 불가능하므로 돌봄은 꼭 필요하다. 사실 필요성으로만 따지면 어떤 일이 사회적 지위가 높아야 할지, 선망의 대상이 되어야 할지 바로 알 수 있다. 그 결과는 기존 사고방식과는 딴판일 것이다. 잠시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봄 노동에 대한 처우가 이 모양인 건 그동안 사회적으로 암묵적으로 특정 집단에게 이 노동을 강요했고,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집에서 놀면서 그깟 병간호 며칠 했다고 불만 오지게 하는구먼 하고 빈정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그 사람의 그릇이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내가 해마다 수십, 수백억 원의 부가가치를 생산하고 수천만 원, 수억 원의 세금을 내며 사회 간접자본을 충당한다고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진다. 돈 잘 번다고 유세 떠는 거냐고? 이렇게 생각해도 그냥 그 사람의 그릇이려니 한다. 돈을 아무리 많이 벌고 사회적 지위가 아무리 높은 사람이라도 '돌봄'이라는 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이야길 하고 싶은 것이다.
이번 일을 겪으며 하나 결심하게 된 것이 있다. 앞으로 어떤 일을 하든 돌봄에 공백이 생길 때 유연하게 대처 가능한 형태의 일을 하겠다는 것. 국가적 재난 상황에 독박 쓰게 되니 힘들긴 참 힘들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독박 쓸 수 있는 것도 나의 원더우먼과 같은 능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에. 일도 잘하고 돈도 잘 버는데 가족도 잘 보살피는 원더우먼이 될 테다. 이런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고 에너지를 쏟는 걸 보니 나는 아무래도 수명이 좀 짧아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서울의 엄마들> 관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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