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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작인 Sep 28. 2021

휴직자의 생활계획표

치열함과 느슨함 사이



휴직하자마자 바로 자가격리와 병간호라는 풍파를 맞게 되어 약 두 달간 휴직자가 아닌 전업 돌봄 노동자의 생활을 했다. 더위가 한풀 꺾인다 싶을 무렵 다행히 아이들은 제 생활패턴을 찾아갔다. 드디어 나에게도 시간적 여유가 생기게 되었다.



휴직하기 전 나름대로 꾀했던 하루 루틴이 있었다.

아침에는 일어나서 하루를 시작하기 전 운동을 하거나 글쓰기를 하고, 아이들이 어린이집을 가면 비즈니스(부동산이든 쇼핑몰이든 뭐든)를 시작해서 하원 할 때 맞춰서 퇴근하고 아이들을 데리러 가고, 그 이후로는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패턴이었다. 하루를 시간 단위로 쪼개어 보면 딱 5시간이 나온다. 이 5시간 내에 취미생활과 비즈니스를 끝내야 한다.





휴직하면 뭐 되게 시간이 많이 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내 시간이 너무 적었다. 아이들을 돌보는 주양육자가 되겠다는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8시간 일하던 삶에서 5시간 일도 하고 취미 생활까지 해야 하니 시간을 엄청나게 집약적으로 써야 했다. 거기다가 업무 시간 외 돌봄 노동의 시간과 강도는 더 길어지고 세졌다.



5시간을 뜯어보았다. 그다지 긴 시간도 아니어서 딱히 뜯어보고 할 것도 없지만 나에게는 너무나도 소중한 시간들이기에 철저하게 분석해서 계획을 세우고 싶었다.



일단 아침 1시간은 원래 하던 대로 글쓰기에 할애하기로 했다. 여기에 운동을 추가했다. 그날그날 컨디션에 따라서 일주일에 3번 글쓰기, 2번 운동 이런 식으로 번갈아가면서 이 시간을 쓰기로 했다. 휴직의 결정적인 이유가 허리디스크였던 만큼 건강 회복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침 달리기와 자전거 타기에 맛을 들이고 있던 터였다.





그리고 오전 업무시간(2시간)은 쇼핑몰 주문처리를 하고 부동산 관련 자료수집과 분석에 쓰기로 했다. 업무 집중도가 높은 시간이기 때문에 주문처리처럼 정확한 업무 처리가 요구되는 일이나 자료 분석같이 머리를 많이 쓰는 일을 하려고 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블로그에 수집한 자료를 정리해서 게시하는 것까지 목표로 했다.



오후 업무시간(2시간)은 밥 먹고 졸릴 시간이므로 단순 업무인 쇼핑몰 상품 업로드를 배정했다. 상품 업로드는 기계적으로 하면 되는 일이므로 이 시간에 경제나 자기 계발 유튜브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든 계획은 완벽했다.

고 생각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 구멍을 발견했다. 독서에 배정된 시간이 없었다.



회사 다닐 때는 출퇴근 지하철 안에서 독서를 많이 했다. 그런데 집에서 일을 하게 되니 그런 시간이 사라져서 억지로 독서를 위한 시간을 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오전 업무를 조금 타이트하게 해내고 그 시간에 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 시간도 너무 빠듯했다. 결국 점심시간에 밥 먹으면서, 아이들이 만화영화 보는 시간에 겨우 책을 조금 읽는다. 덕분에 휴직하고 나서는 어려운 책을 읽지 못하게 되었다. 쉬면서 그동안 잘 못 읽던 어려운 책도 좀 읽고 하려고 했는데 막상 현실은 실용서 한 권도 겨우겨우 읽어내는 실정이다.



Photo by Chris Benson on Unsplash




위 생활계획표대로 생활한 지 어언 한 달 정도 되어간다. 실제로 잘 실천하고 있냐는 물음에 솔직히 100% 자신 있게 대답하기는 어렵다. 특히 아침 6시부터 7시, <글쓰기와 운동 시간>을 잘 못 지킨다. 정확히 말하면 운동을 잘 안 한다. 평생을 걷기를 제외하곤 운동을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운동 1시간씩 하는 게 쉽지가 않다. 이렇게 글로 남기면서 다시 한번 다짐을 한다. 이것만 쓰고 달리기 하러 나가야지.



오전 오후 업무시간 4시간도 너무 빠듯해서 부동산 관련 자료 분석을 잘 못 하고 있다. 전국구 대장 아파트 가격 자료를 표준화하는 작업을 해보려고 했는데 현실은 그냥 뉴스 읽으며 시황 따라가기도 벅찬 수준이다. 그러니 블로그 자료 게시도 물 건너갔다.



왜 좀 더 시간을 효율적으로 써서 더 많은 걸 해내지 못하니 하며 자괴하지 않기로 했다. 이미 하루 24시간 중에 나 혼자 보내며 놀 수 있는 시간이 제로에 가까운데 여기서 더 채찍질하다가는 번아웃이 올 것 같아서다. 사실 이렇게 말은 하지만 자괴감이 아예 안 드는 건 아니다. 이것도 자기 암시다. 그러지 말아야지 말아야지.



지속적으로 가능한 삶의 방식을 추구해보려고 한다. 너무 치열하지 않게, 그렇다고 또 너무 느슨하지도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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