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차 쓰고 부동산 계약하러 가는 직장인
떨리는 마음으로 첫 집을 계약한 지 일 년도 안 되어 2주택자가 되었습니다. 처음이 어렵지 그 다음부터는 쉽다는 말을 실감하게 되었어요.
이번 글에서는 두 번째 집, 그러니까 생애 첫 투자용 주택을 계약하던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첫 투자 주택 예산은 약 1~1.5억 정도로 설정했어요. 그 당시 저와 남편 연봉을 다 합치고 한 푼도 쓰지 않아도 만질 수 없을 큰돈이었습니다. 이렇게 큰돈을 투자하게 되는데 나 혼자서 결정할 순 없다고 생각했어요. 남편이 어느 정도 이해한 뒤에 투자를 진행해야 혹여 실패하게 되더라도 죄책감이 덜 할 것 같았습니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지친 몸을 소파에 묻고 아무것도 안 하고 맥주 한 잔 하면서 티비 보고 싶어 하는 남편을 식탁에 앉혀놓고 이 단지는 이게 어떻고 저 단지는 저게 어떻고 하면서 브리핑을 했습니다. 저는 브리핑이라고 생각했는데 남편은 억지로 떠먹여 주는 부동산 공부 같았다고 합니다. 막 안 먹겠다는 입을 벌려서 억지로 넣어줬습니다. 역세권, 초품아, gtx, 용적률, 용도지역 등등 모르는 용어들과 어려운 개념들은 물론 주변 단지들의 시세, 앞으로의 입주물량까지 다방면으로 직접 꼭꼭 씹어서 입에 넣어줬습니다.
남편은 부동산에 문외한인 완전 일반인이었어서 질문들이 기상천외했습니다. 세상에 어떤 금융사도 투자심의 때 심사역이 이렇게까지는 안 물어볼 것 같은데... 하며 툴툴거리면서도 남편과 상의하길 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만큼 여러 방면으로 생각할 수 있었으니까요.
앞선 글에서 이야기 한 3개의 단지 (마포구 A단지, 성동구 B단지, 동대문구 C단지)가 마지막까지 경합을 벌였습니다. 서로의 장단점을 비교하며 설명도 하고 토론도 하며 나름대로 세 단지에 대해 세부적으로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사실 큰 틀에서는 셋 다 조건이 비슷비슷해서 뭘 골라야 할지 갈피가 안 잡혔습니다. 마음속으로는 성동구의 B단지가 끌렸지만 단순히 마음이 끌린다고 그걸 고를 순 없다고 생각했어요.
이제 실제 거래할 수 있는 매물을 파악하면서 범위를 좁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마포구 A단지는 미분양 상태였어서 저층부는 바로 계약이 가능했고, 동대문구 C단지는 매물 자체가 많지 않았고 아직 가격이 오르지 않은 상태여서 그런지 부동산들이 조금 소극적이었습니다. 두 단지 모두 애가 닳도록 계약하고 싶은 물건이 보이진 않았어요. 그리고 어느 날 점심시간 성동구 B단지 근처 부동산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이때가 설날 연휴 직후였습니다. 부동산 사장님들마다 설날 연휴를 기점으로 2~3천씩 호가가 높아졌다고 합니다. 다 같이 설날에 가족들과 모여서 부동산이 오를 것으로 예측했나 봐요. 아가씨, 지금이라도 빨리 잡어. 안 그러면 있는 매물도 다 나가고 없어.
그 길로 바로 파워포인트를 열어 단지 배치도에 거래할 수 있는 적당한 매물 4개를 표시하고 각각의 가격, 장점과 단점 등을 적어 남편에게 보냈습니다. 남편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 2번으로 하자.
- 왜?
- 니가 2번을 고르게끔 만들어놨네.
제가 답을 정해놓고 물었다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2번으로 하자고 통보할걸 괜히 들러리 세우느라 기운만 뺐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단지 간 비교 같은 것도 필요 없었는데 뭐했나 싶어요.
그렇게 바로 가계약금을 보내고 계약일을 잡았습니다. 매도인은 지방에 사시는 분이라 평일 오후만 계약이 가능하다고 해서 계약 날에 오후 반차를 썼습니다. 드디어 저도 반차 쓰고 부동산 계약하러 가는 직장인이 되었습니다.
두 번째 부동산 매매 계약인데도 떨렸습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문을 열고 들어간 부동산에는 사람이 북적였습니다. 오면서 창문 너머로 슬쩍 들여다본 다른 부동산들도 모두 손님이 있었습니다. 확실히 거래가 많긴 하나보다 싶었어요. 혼자 계약하라고 보낸 남편도 떨리긴 마찬가지였는지 계약을 기다리는 사이에 전화가 왔습니다. 침착하게 잘하고 와.
앉아서 계약을 기다리는 동안 부동산에 있는 사람들을 보며 오만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저 사람은 얼마에 샀을까?
나보다 비싸게 샀을까?
그냥 알아보러 온 사람일까?
다들 아줌마 아저씨들이네.
나 같은 꼬꼬마가 이렇게 비싼 집을 사도 되는 걸까.
초조한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의연한 척했습니다. 그러다가 부동산 사장님이 복사하러 간 사이, 잠깐 전화통화하러 간 사이 계약서 문구 하나하나 빼놓지 않고 꼼꼼히 읽어보았습니다. 중개사법에 나와있는 형식적인 문구까지 두 번씩 읽은 것 같아요. 매도인 주민등록번호도 한 번 두 번 세 번 확인했습니다.
북새통에도 계약은 일사천리로 진행됐습니다. 날인 란에 도장을 찍자 부동산 사장님이 계약금을 송금하라고 했고 모바일뱅킹 오류 한 번 없이 송금을 완료했습니다. 만나서 인사하고 계약서 나눠갖고 헤어지는데 30분도 안 걸렸습니다. 잔금 날 다시 뵙자고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떴습니다.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건가 하며 무릎에 힘이 풀리면서도 후련하면서도 두근거리면서 또 여러 감정이 복잡하게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끝난 게 아니었습니다. 대출을 받기 위해서 은행에 가야 했어요. 사실 이때만 해도 ltv, dti만 맞으면 신청하는 족족 대출이 무조건 나오던 시절이라 대출신청을 아무 때나 해도 상관없었지만 몇 시간 남은 소중한 반차를 그냥 허비하느니 생산적인 일에 쓰고자 은행 일까지 모두 마무리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미리 알아본 근처의 은행으로 가 번호표를 뽑고 기다렸습니다. 기다리면서도 서류는 잘 챙겼나 계약서는 잘 있나 계속해서 확인하느라고 오히려 주민등록증을 대기 소파 위에 두고 갈 뻔했습니다. 드디어 차례가 되어 창구에 앉았습니다.
고객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아 네 주택담보대출 받으려고 하는데요.....
?!!
창구 너머에는 어릴 적부터 잘 알고 지내던 친오빠의 친구가 앉아있었습니다. 은행원이라 꼼꼼하고 돈을 잘 관리할 것 같아서 제 결혼식 때 축의금도 받아주었던 바로 그 오빠 친구였어요. 가족들이 걱정할까봐 부동산 투자하는 건 비밀로 하려고 했는데 너무 의외의 장소에서 들통이 나고 말았어요. 역시 세상에 비밀은 없나 봅니다.
- 여기로 이사 오려고 그러니?
- 아니요. 그냥 투자용으로 사놓으려구요. 오를 것 같아서요.
- 여기 지금도 집값 비싼 것 같은데 더 오를 것 같다고 생각하는지 사람들이 많이 대출받으러 와. 그나저나 너는 벌써부터 부동산 투자하는구나. 눈을 빨리 떴네.
- 뭐 그냥.... 한번 해 보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