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 이건 바로 사야 해
2015년 첫 실거주 집을 사고, 2016년 첫 투자용 주택을 샀습니다. 20대 후반에서 30대로 접어들던 시기였는데 이렇게 집을 두 채나 사다니, 저는 참 돈이 많았나 봐요. 당연히 그렇진 않았습니다. 그냥 그 당시 주택 가격이 지금보다 쌌고, 담보대출이 많이 나왔고(ltv 70%까지), 전세가율이 높아서 그랬습니다. 적은 돈으로도 집을 살 수 있었던 시절이었어요. 저는 그즈음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막 부동산 가격에 관심을 갖게 된 때였어서 원래 이런 건가(집값의 30% 정도 되는 자본금으로도 집을 살 수 있는 건가) 했을 수도 있을 거예요. 그렇지만 다행히도 우리는 모든 정보가 공개된 시절에 살고 있는 탓에, 그때 당시의 그런 상황 즉, 적은 돈으로 집을 살 수 있는 상황이 굉장히 이례적인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KB부동산 통계가 대부분 2000년대 초반부터 자료가 나와있기 때문에 2006~2008년 부동산 폭등 시기에는 전세가율이 지금보다 한참 낮았었고 집값 오르는 속도도 어마 무시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죠.
그래서 2주택이 된 이후에도 물건 서칭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언젠가는 2006년과 같은 폭등이 또 한 번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부동산 카페도 쉬지 않고 들락거렸습니다.
요새는 어느 동네가 오르나.
어느 동네에 새로운 상품이 공급되나.
사람들은 어떤 단지에 열광하나.
시장의 축이 재건축인가 분양인가 구축 아파트인가.
누가 가르쳐주지는 않지만 부동산 시장에서 알고 있으면 도움이 되는 것들을 공부했습니다. 교과서 달달 외우는 공부가 아니라 이렇게 흥미진진한 실전 공부가 있다는 걸 학교 다닐 땐 왜 몰랐을까요. (물론, 요새는 유튜브나 강의를 통해서 쉽게 배울 수 있게 되었지요.)
한창 부동산 공부에 빠져 지낼 때에는 서울 시내 지도를 펼치면 어디에 어떤 단지가 있고 시세는 대략 어느 정도이다 라고 맞힐 수 있는 정도까지 되었습니다. 그 당시 결혼하는 친구들이 조언을 구하면 나름대로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게 분석해서 알려주기도 했었죠. 혼자 공부하는 것도 좋았지만 이렇게 다른 사람과 같이 의견을 나누고, 또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건 정말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집 구하는 사연을 빌미로 각자의 사정이나 살아온 배경들을 듣는 것 또한 큰 재미였습니다. 아 정말 사회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구나, 다양한 사정들이 있구나 하는 것을 말이죠. 뭐니 뭐니 해도 제일 부러웠던 건 결혼하면서 양가에서 재정적으로 많은 도움을 줘서 큰 고민 없이 서울 요충지의 재개발 아파트를 살 수 있는 케이스였던 것 같아요. 다 같이 같은 출발선에 서서 달리기를 시작했는데 누군가는 정말 모터를 달고 뛰는구나. 그게 없는 사람들은 모터를 스스로 달아서 뛰어야 되겠구나.
그러던 어느 날 흙 속의 진주 같은 단지를 발견했습니다. 도심지에 위치하고 지하철역 코앞에 1천 세대 이상 대단지, 조건이 꽤 괜찮은데도 아직도 미분양이 있다네요. 사실 주거지로 그렇게 각광받는 동네는 아니어서 저도 그동안 무심코 지나쳤는데 분명 여기는 좋은 입지가 맞았습니다. 그런데 미분양이 있다고? 당장 투자할 돈은 없었지만 남편을 꼬셔서 주말에 임장을 갔습니다.
높게 쳐진 펜스와 뿌연 흙먼지 날리며 들락거리는 공사차량들
인근 시장 사이 좁은 골목길 무방비하게 배출된 쓰레기 더미들
다 쓰러질 것 같은 벽돌 건물에 아슬아슬하게 달려있는 부동산 간판.
골목 안 집집마다 내놓은 화분과 살림살이들.
시공사 선정을 기다리는 주변 구역들과 여기저기 붙은 현수막.
기가 찬 남편이 한 마디 합니다.
하. 이 동네는 진짜 여기서 더 이상 나빠질 게 없어 보인다.
그래서 사기로 결심했습니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남편은 이 날 몸도 무지 피곤하고 힘들었는데 동네 분위기도 너무 심란해서 짜증이 많이 났다고 해요. 재개발 구역 어디에나 있을 법한 할아버지 부동산 사장님의 일장연설(내가 이 동네에서 몇십 년을 살았는데 말이야 블라블라)에 진짜 입을 틀어막아버리고 싶을 정도로 엄청 짜증이 났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서울살이 8년 차였던 남편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이런데가 결국 부동산 가격은 많이 오른다는 것을. 저는 남편 설득을 위해 도시기본계획 상 이 동네의 위상이 어떻게 바뀔 것이며, 주변엔 이런저런 편의시설이 많다며 온갖 좋은 것 다 갖다 붙여 가며 설명했지만 남편은 그냥 여긴 발전할 일만 남은 동네니까 사도 좋겠다고 했습니다. 사실 부동산 투자를 하면서 너무 많은 정보를 다 알고 있기보다는 우리 남편 정도 감과 결단력만 있으면 오케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부동산 개발업에 종사하고 있는 저의 같은 회사 동료들을 비롯해 업계 사람들 중에는 의외로 무주택자 또는 폭락론자가 많은데, 그 이유는 '너무 많이 알아서'인 것 같거든요.
그런데 문제는 돈이 없었습니다. 당장 계약금이 약 7천만 원 정도 필요했고 입주 때 전세를 놓는다고 해도 중도금 이자에 에어컨 옵션 비용 등까지 합치면 1년 반 뒤에 약 1.5억 정도가 필요할 것 같았거든요. 당장 7천만 원도 문제였고, 또 아무리 안 먹고 안 써도 1년 반 만에 7천만 원을 모으는 것은 빠듯해 보였습니다. 아 어떡한다. 너무너무 사고 싶은데 돈이 없네. 그동안 주택담보대출 갚으면서 따로 저축해둔 돈이 조금 있긴 했지만 이걸로 비비기에는 너무 터무니없었어요.
그래서 은행에 갔습니다. 생애 첫 신용대출을 받으러요. 다행히 남편과 저 모두 7천5백만 원 정도는 빌려줄 수 있겠다고 했습니다. 연봉도 그만큼이 안되는데 그렇게 많이 빌려준다구요? 심지어 이자율이 1%대라고 합니다. 세상에 이래서 대출받으러 대기업 다닌다고들 하는구나 하는 걸 체감했습니다.
그런데 이자율이 주택담보대출보다 낮은 건 참 이상했습니다. 주택담보대출은 확실한 담보물건이 있는 상태인데도 이자율이 2%대 였습니다. 심지어 부동산 가격은 오르고 있는 중이라 ltv(담보가치대비대출비율)은 점점 낮아지는 상황이었구요. 신용대출은 말 그대로 신용을 기반으로 대출을 해주는 거라, 이 사람이 아무리 좋고 안정적인 직장을 다닌다고 하더라도 직장을 관두거나 사고를 당해 일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면 바로 신용을 잃을 수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이자율이 1%대라니. 심지어 제가 다니고 있던 회사는 그즈음 부채비율이 400%에 육박해 채권단이 부채 관리가 필요할 정도로 경고할 정도로 재무상태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기업문화나 일하는 방식은 언제 망해도 이상하지 않으리만큼 주먹구구식이었다는... 읍읍)
부동산 투자를 하면서 이런저런 대출을 알아보다 느낀 점 중에 하나는, 우리나라는 기업에는 대출의 문턱이 낮고 개인에게는 참 높다는 것이었습니다. 가계부채보다 기업부채가 훨씬 비율이 높은데도 가계부채는 항상 문제고 기업부채나 정부부채는 언론에서 거론 조차 안 되는 경우가 많죠. 기업은 생산활동을 하는 주체이고 또 항상 운영이 정상화되어야 개인도 생산활동에 참여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봐야 할까요. 우리나라는 자영업자 비율도 높은 편인데 금융이 다소 기업 친화적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은 의문스러운 점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일개 보잘 것 없는 개인인 저는 대기업 버프를 등에 업고 1%대 신용대출을 일으켜 이 더 이상 나빠질 게 없는 동네의 물건 하나를 계약합니다. 투자자 세계에 발을 들인 지 4개월 만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