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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작인 Oct 26. 2021

돈맥경화를 조심해

흑자도산하는 멍청이가 나였다니



일반적으로 휴직 또는 퇴사를 고민하면서 가장 많이들 하는 걱정이 월급 없이 생활을 어떻게 하느냐인 것 같다. 어찌 됐건 하루에 일정 시간 사무실에 앉아있는 행위를 반복하면 통장에 다달이 급여가 꽂히는 삶을 살아왔는데 갑자기 그게 없어진다고 생각하면, 생활비는? 카드값은? 애들 교육비는? 몇 달간은 통장 내 잔고로 버틸 수 있겠지만 그 잔고마저 바닥이 나버린다면 꽤나 갑갑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급여가 없어질 때를 대비해서 나름의 대책을 수립해놓고 휴직 또는 퇴사에 들어가야 한다. 이렇게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 나는 과연 어떤 대책을 만들어 놨었을까?



웃기게도 나는 별다른 대책이 없었다.

이건 실화다, 실화.



 

Photo by Brett Jordan on Unsplash



사실 대책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고 좀 계획이 헐렁했다. 우리 집은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는 편은 아니(었)다. 부부가 다달이 회사로부터 받는 월급도 우리나라 가계 소득 평균 대비 적은 편이 아니었고, 쌓아놓은 자산 또한 적지 않았다. 어디 가서 막 엄청 부우우우자시네요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당장 먹고 살 걱정이 있지는 않은 정도였다. 그래서 눈앞의 생활비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계획은 좀 대충 세워도 어떻게든 되겠지 라는 안일한 생각이 있었다.



나는 재무 상태를 점검하는 데에 있어서 나름 해박하고 실제로도 꼼꼼히 따지고 있는 편이라고 생각했다. 분기별로 자산 가치 변동을 따지고 저축과 대출 원리금 상환 내역을 정리해 순자산을 평가하고, 여유자금은 얼마나 되는지, 또 투자금 회수는 어떻게 되고 있고 그 회수자금을 어떻게 쓸 건지 계획했다. 회계를 따로 배운 적은 없지만 재무상태표와 현금흐름표 하나는 잘 정리했다. 내가 만든 엑셀 시트를 보고 우리 남편은 어디 가서 "이거 우리 와이프가 만든 거예요" 하고 자랑하고 싶다고 했다.



 

Photo by Campaign Creators on Unsplash



그 대신 손익계산서 작성은 좀 소홀히 하는 편이었다. 손익계산서라 함은 다달이 들어오는 수입 대비 지출 내역이 얼마나 되는지, 일반적으로 말하는 가계부 같은 것이라고 하겠다. 가계부를 상세히 쓰지 않은 이유는 다달이 월급을 받아도 이래저래 쓰고 나면 남는 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말하니까 소비를 어마어마하게 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사실 남는 돈이 없도록 저축과 대출원리금 상환을 꽉꽉 짜서 넣어놨다.



그런데 매달 수입의 절반이 사라지게 되면 손익계산서가 어떻게 되겠는가? 당연히 펑크가 날 것이다. 끊긴 월급에서 내가 회사를 가지 않음으로써 준 지출을 빼면 약 3백만 원 정도의 공백이 생겼다. 이 공백을 어떻게 메꿀 것인가.



휴직 전 (헐렁하게) 세운 계획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보겠다.

일단 올해 상반기에 수익형 부동산을 매입했고, 또 다달이 들어오는 근로소득도 있어야 사람 구실 할 명분이 좀 더 살 것 같아 구매대행도 시작했다. 그리고 그간 매입해놓은 부동산들로부터 매년 회수되는 에쿼티까지 합치면 월 3백 정도는 충분히 메꿔질 것 같아 큰 걱정이 없었다. 그리고 여유자금도 1년 이상 버틸 정도로 있었고 또 우리에게는 신용대출과 예금담보대출이라는 막강한 돈주머니(?)가 있지 않은가.



그렇지만 사람 일이라는 게 이렇게 딱딱 맞아 떨어질 리가 없었다. 올해 매입했던 수익형 부동산에서는 아직 수익이 안 나고 있었고, 구매대행은 초기 단계라 손실과 이익 경계에서 아슬아슬 겨루고 있는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구매대행이 거의 자본이 들지 않는다고는 하나, 어쨌든 물건을 구매해서 보내고 배송이 완료된 후 고객이 구매를 확정한 뒤 또 며칠이 흘러야 오픈마켓으로부터 판매금을 정산받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한두 달 정도 자금이 묶이게 마련이다. 이런 상황에서 휴직에 들어가자마자 투자용으로 지방 부동산을 매입했다. 잔금 기간이 넉넉했고, 잔금을 치를 때까지 임차인을 구하면 투자금이 얼마 들지 않는 곳이었다. 전세 수요도 높은 곳이었고 집 상태도 괜찮아서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보았다.



Photo by Kelly Sikkema on Unsplash



그러던 어느 날, 부동산에서 전화가 왔다. 매도인이 잔금일을 한 달 당기고 싶다는 것이었다. 급작스럽게 수술을 하게 돼서 이사를 빨리 하고 싶다는 사연이었다. 그렇게 하면 앞으로 잔금 기일까지 한 달 정도밖에 안 남는데 임차인을 구해서 잔금을 치르는 건 무리였다. 아무리 급하게 집을 구해도 한 달만에 들어갈 집을 찾는 사람은 별로 없으니까. 사실 계약서 상 잔금은 아직 두 달 남았었기 때문에 이제부터 임차인을 구하면 계획대로 똑 떨어지겠다 싶었는데, 아 뭐 이런 매도인의 사정을 내가 봐줘야 하나? 싶었다. 그런데 또 아파서 갑자기 수술을 한다는데 생활 저변을 정리할 시간이 있는 게 좋겠다 싶긴 했다. 나도 둘째 낳고 복직하려는데 이사가 겹쳐서 회사에 양해를 구해 한 달 정도 복직을 늦춘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매도인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여기서 안 된다고 버티고 있어 봤자 매도인이 임차인 구하기 쉽도록 집을 잘 보여줄 것 같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부탁을 들어주면 매도인에게는 좋은 거고, 부탁을 안 들어주면 그냥 둘 다 안 좋은 결과가 나올 텐데 굳이 심뽀 부릴 이유가 없어 보였다. 더군다나 계약하고 한 달 사이 시세가 꽤나 올라서 계약 파기라도 당한다면 결국 내 손해였다.



다행히 잔금 치를 돈을 꿍쳐놔서 큰 무리는 없었다. 이럴 줄 알고 내 통장 잔고로 잔금까지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의 집을 골랐었는데 욕심부리지 않길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텅장이 된 내 통장 잔고를 보고 있으니 왠지 옆구리가 시려왔다. 또르르...



그리고 대망의 카드 결제일이 다가왔다. 대충 계산해보니 잔고가 부족하다. 여유자금은 있었다. 남편 통장에... 카드값 메꾸게 남편한테 돈 좀 부쳐달라고 하기가 머쓱했다.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나. 그동안 당신도 먹고 마신 비용이야, 결제 부탁해. 뭔가 어색하다. 은행에 넣어둔 예금이나 보험을 담보로 대출을 받을까. 어차피 한두 달이면 전세입자 구해져서 바로 돈이 들어올 텐데 딱 이 한두 달만 버티면 될 것 같은데. 아니 어차피 맞벌이 가정에서 남편 돈이나 내 돈이나 그게 그건데 달라고 하는 게 그렇게 이상한가? 이럴 줄 알았으면 남편 통장 털어서 잔금 치를걸.



불안한 마음에 부동산에 전화를 해 봤다.

사장님. 전세 문의는 아직인가요?

조금 시간이 걸리네요. 사모님. 그냥 파시는 건 어때요? 시세가 많이 올랐어요.



계약한 지 두 달 밖에 안됐는데 몇천만 원이 올랐단다. 역시 내 안목은 틀리지 않았어. 근데 그럼 뭐하나. 당장 내일의 카드값 결제가 걱정인데.



photo by Towfiqu barbhuiya on unsplash



가끔 신문에 기업의 법정관리, 워크아웃 등과 같이 나오는 말 중에 하나로 ‘흑자도산’이 있다. 재무제표 상으로 흑자이긴 하나 당장의 현금흐름이 막혀 대출 만기를 지키지 못해 디폴트가 나는 것이다. 대체로 든든하게 쌓인 수주잔고와 앞으로 들어올 막대한 이익금에 자신만만해져 무리하게 경영활동을 펼치다가 궁지에 몰리게 되는 경우다. 그런 기사를 볼 때마다 항상 리스크에 대비해야지, 우쭐하지 말아야지, 잘못하단 훅 간다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내가 그 꼴이 날 줄이야. 나는 그런 멍청이(또는 간 큰 용자)가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다.



과연 이 위기를 잘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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