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진짜 휴직을 한 이유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뒤 쓰기 시작하는 데까지 3개월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내 안의 자가 검열 장치가 과연 내가 이 글을 써도 되는가, 그럴 자격이 있나, 정말 진심인 건 맞나, 글로 잘 풀어낼 수 있을까 수없이 묻고 또 고민했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한번 정리하고 가야 할 문제고, 또 나에게도 해줘야 할 말이기에 이제서라도 쓰기로 결심했다.
추락은 두려우나 착륙은 두렵지 않다.
약간 구태의연한 것 같으면서 작은 울림이 있는 이 말을 내가 처음 들은 건 유퀴즈 bts 편에서였다.
사실 나는 bts가 빌보드를 휩쓸기 시작한 지 몇 년이 지났는데도 그들을 잘 몰랐다. 방탄소년단이 7명이라는 사실도, 방탄소년단=bts라는 사실도 몇 개월 전에 알았다. 우리나라 가수 최초로 빌보드 1위에 올랐다는 사실이, 내로라하는 아티스트들이 모이는 미국에서 상을 탔다는 사실이 정말 대단한 일이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가슴으로는 크게 와닿지 않았다. 그들이 누군지 잘 몰랐기 때문이다. 그저 수년 전 올림픽공원 근처에 살던 시절, 그들의 공연 현수막이 걸린 걸 보며 그룹 이름이 참 특이하네라고 생각했던 기억뿐이었다.
2013년에 데뷔해 올해 9년 차 가수가 된 이들은 처음엔 그냥 수많은 아이돌 그룹 중 하나였다. 데뷔가 보장되지 않는 깜깜한 연습생 시절을 거쳐 첫 정식 무대에 서고 앨범을 내고 단독 콘서트를 열 정도가 되면 꽤 성공한 가수가 된 것이니 이제 무대에서 내려와도 좋다고 생각했던 그런 평범한 아이돌 그룹 말이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빠른 시간 안에 성공했다. 그런데 그 성공이 생각한 데서 끝나지 않았다. 국내 무대를 넘어 해외 무대에 서게 되었고 매년 신기록을 갈아치웠다. 그냥 자기들이 좋아하고 잘하는 노래와 춤과 공연을 열심히 한 것뿐인데 사람들은 그들을 대단한 사람으로 칭송했고 그들이 가진 것 이상의 의미를 부여했다. 평생 한국어를 모국어로 쓰고 살아왔으니 한국어로 가사를 쓰고 노래를 부르는 건 당연한 일이었는데 어느새 국가를 대표하는 한국문화선교대사가 되어있었다.
상상 이상의 성공은 되려 부담으로 돌아왔다. 애드벌룬을 타고 하늘로 날아오르기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보니 이 애드벌룬이 우주까지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아무도 애드벌룬을 타려고 마음먹을 때 우주까지 날아갈 걸 상상하지 않는데 말이다.
이다음은 대체 뭘까.
이제 어디로 향해야 할까.
무엇을 더 해내야 할까.
어떻게 해야 할까.
여기서 더 성공하지 못하면 어쩌지.
사람들을 실망시키면 어쩌지.
인기가 식어 서서히 잊혀져 가느니 박수칠 때 떠나는 게 낫지 않을까.
어린 나이에 사회에 나와 그 누구도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길을 가게 되었을 때 느꼈을 그 막막함, 두려움, 설렘과 함께 커져가는 불안감이 전해져 왔다.
난 bts도 아니고 bts 같은 월드 스타급으로 성공한 사람도 아니지만 이들의 고백에 크게 마음이 울렸다. 이 방송을 보면서 펑펑 울었다. 한 번으로 부족해 세 번 정도 더 돌려봤고 그때마다 참 많이 울었다.
나에게 성공이란 무엇이었을까. 자아가 생기기 시작한 고등학생 땐 저명한 학자나 전문가가 되는 걸 꿈꿨다. 대학생 땐 도시계획 총괄 책임자나 서울시 부시장, 또는 대학교수 같은 전문직이면서 명예까지 뒷받침되는 사람이 되길 원했다. 물론 회사에 취직한 이후에는 그냥 이 회사에서 임원만 달아도 꽤나 성공한 것이겠구나 싶었다.
성공으로 향하는 길은 멀고도 험난해 보였다. 내가 원하던 분야의 전문가가 되려면 기본적으로 박사학위가 필요했고 풍부한 학술 논문과 저서는 물론 실무 경험, 심지어는 해외 경험까지 필요했다. 내가 꿈꿔왔던 성공한 삶 중에서 가장 난이도 하급이라고 생각했던 '회사 임원' 이 될 확률도 1%가 한참 못 된다고 한다. 더군다나 나는 그 흔한 여성 팀장도 없는 남초 회사에 다니고 있어 깨야할 유리천장이 남들보다 몇십 배, 몇백 배는 더 두꺼웠다. 회사와 결혼을 해도 어려운 마당에 나는 엄한 남자와 결혼을 해서 애까지 둘씩이나 낳아버렸으니 뭔가 그 길에서 좀 더 멀어진 것 같다.
물론 이런 성공을 위한 가장 기초적인 발판을 닦기 위해서는 평범한 사람들이 삶에서 지키고자 하는 몇 가지 정도를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도 어린 시절엔 몰랐다. 나는 n포 세대의 정점에 서 있다. 취업, 연애, 결혼, 출산, 내 집 마련 등등 n개의 지극히 평범한 미션을 하나씩하나씩 달성해 나가다 보니 어느새 정상가족이라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지만, 내 삶은 어느새 어릴 적 꿈꾸던 성공과는 멀어져 있었다.
그런데 30대 초반, 뜬금없이 나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터졌다. 부자가 돼버린 것이다. 약 십여 년 전 취업을 하고 사회에 나와 일하기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통장에 찍혔던 월급 266만 원. 그리고 지금은 그것의 1,500배가 넘는 자산을 일궜다.
자산이 많아졌다고 해서 하루하루가 달라진 건 없었다. 아침 6시쯤 일어나 부지런히 회사에 갈 준비를 한다. 칼퇴를 한다는 전제하에 꼬박 11시간을 회사를 위해 바치고 녹초가 되어 돌아오면 저녁 7시. 허겁지겁 저녁을 챙겨 먹고 아이와 잠시 시간을 보내다 보면 어느새 잘 시간이다. 나는 하루의 끝을 기억하는 일이 잘 없었다. 누운 상태로 5분만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거나 움직이지 않을 기회가 생기면 바로 기절하듯 잠들어버리기 때문이다. 운 좋게 아이를 재우고 내가 잠들지 않은 날은 맘카페에 들어가 엄마표놀이, 엄마표영어를 검색해보기도 한다. 어차피 이걸 해줄 시간도, 체력도, 마음의 여유도 없겠지만.
사실 나 자신을, 또 주변을 돌아볼 여력도 없이 정신없이 살아왔던 터라 내가 부자인가 하는 생각도 별로 못했었다. 내가 꽤 부자가 됐다는 걸 실감하게 된 건 2018년 아동수당을 신청하면서였다. 지금은 어린아이를 키우는 모든 가정에 아동수당을 지급하지만 최초로 도입되던 2018년에는 소득/자산 상위 10% 가구를 제외하고 지급했었다. 기준이 발표되고 나서 설마 안 되겠어? 했는데 설마가 사람을 잡았다. 내가 상위 10%라니, 이렇게 일상을 유지하는 것조차 힘든데 이런 삶이 상위 10%라니?
그때부터 생각이 많아졌던 것 같다. 회사에선 매일같이 일에 치이고 사람에 치였다. 심지어 어떤 날은 남의 프로젝트 뒤치다꺼리만 하다가 하루를 다 보내는 날도 있는 그저 그런 대리 나부랭이인데 업계 20년 이상의 경력을 인정받아 LH 심사위원으로 등록되어있는 부장님보다 돈 걱정이 없었다. 후배들한테 커피를 사줘야 할까 봐 점심시간마다 밥 먹고 사라지기 바쁜 부장님(서울 자가의 대기업 다니는)은 현실세계에도 있었다. 그런 부장님들을 대신해 나는 후배들 커피를 사주고 푸념을 들어주는 누나(때론 이모)가 되었다. 어차피 2번의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으로 인해 진급도 꿇은 마당에 그냥 후배 사원들 쪽에 붙는 게 편했다. 무주택인 50대의 부장님은 아이의 수능 시험 코앞인 시점에 집주인이 실거주를 위해 나가 달라는 말에 시름이 깊어지셨다. 내가 임대 주고 있는 아파트의 임차인 중에는 대기업 상무님도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우리 남편이 직장을 이 집 근처로 옮기게 되는 바람에 만기 즈음 그 상무님께 집을 비워달라고 요청했던 건 회사사람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물론 고3 수험생을 둔 상태는 아니었다)
그때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돈이 있어야 마음 편하게 공부도 할 수 있고, 회사에서도 소신대로 행동할 수 있고, 새로운 도전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내가 꿈꿔왔던 성공이라는 그림은 반쪽짜리에 불과했다는 것을. 그렇지만 나는 이제라도 깨달았고, 또 돈이 있으니 성공을 향한 발만 내딛으면 되겠다 싶었다. 실제로 우리 남편에게도 회사에서 비굴하게 굴지 말고 소신 있게 행동하라고 이야기하곤 한다.(사실 내가 말 안 해도 원래 그럴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어릴 적 꿈꿔왔던 성공을 위해 조금 더 공부를, 경험 쌓기를, 회사생활을 더 잘할 수 있게 되었을까?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애둘 키우며 나인투식스 출퇴근하는 것만으로도 하루 24시간이 부족한데 그동안 불려놓은 자산을 지키는 것까지 하려니 힘들었다. 그냥 물리적으로 허덕여서 힘들었던 것도 있고, 정신적으로도 스트레스가 너무 심했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10년 만에 평생 먹고살 자산을 쌓았다. (계속 이렇게 말하니 엄청나게 부자 같지만 실상은 그냥 내 그릇이 간장종지만큼 작아서 그런 것이다. 오해 마시길....) 아무튼 나는 한마디로 벼락부자가 되었다. 이 과정을 오롯이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해온 나로서는 까딱 잘못하다간 벼락거지가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지금까지 쌓아놓은 것을 잃지는 않으면서 또 좀 더 수익을 내고 싶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직 진짜 부자라고 하기엔 부족해보였다. 나는 high risk - high return, low risk - low return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인데 앞으로의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갈등이 됐다.
나는 부동산 개발업 분야에 종사하기 때문에 욕심부리다가 골로 가는 걸 꽤 많이 보고 들어왔다. 파산, 이혼, 배신, 감방, 때로는 병이나 상해를 입는 경우까지 봤다. 부동산 개발로 돈 버는 것도 쉽지만 망하는 건 더 쉽다는 걸 수도 없이 간접적으로 체험했다. 그래서 더 이상 리스크를 지는 게 두려웠다. 이 정도 자산, 이 정도 cashflow, 이 정도 투자지식이면 어느 정도의 리스크는 감내할 수 있다고 머리로는 생각했지만 막상 선택의 순간이 되면 리스크테이킹을 하고 싶지 않아 졌다. 아니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렇게까지 하냐, 그냥 이 정도만 있어도 나는 족한 걸, 지금도 이미 충분히 많이 가졌어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뒤쳐지는 이 사회에서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몇 년을 있었더니 정말로 뒤처지더라. 그걸 알면서도 보고만 있으려니 스트레스가 최고조에 달했다. 그 사이에 겨우겨우 진급을 해서 과장이 되었지만 생활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업무 스트레스가 과중되는 타이밍에 코로나가 창궐해서 엎친데 덮쳤다는 정도? 집에 없는 엄마보다 할머니를 더 따르던 아이들은 갑작스런 재택근무로 집에 있는 엄마의 존재에 혼란스러워했다. 이 와중에 나는 부동산을 학문으로 공부했고, 부동산 개발업 회사에 근무하고 있으며, 부동산으로 개인적으로도 큰돈을 벌어 세금도 왕창 냈는데, 정부와 언론은 나 같은 사람을 ‘불로소득을 편취해 사회를 망치는 적폐 세력’으로 몰고 가기까지 했다.
모든 건 엉망진창이었다. 그때 이거 말고 저걸 샀더라면, 강남으로 갔더라면, 그걸 팔지 말았더라면, 늦었다고 생각했었던 때라도 꼬마빌딩을 샀더라면, 그냥 서울에 아무 땅이나 사서 건축허가라도 받아놨더라면, 아니 차라리 주식이나 코인을 샀더라면... 후회를 많이 하는 타입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워낙 놓친 게 많다 보니 후회의 가짓수도 점점 늘어났다. 만약에 그때 그것들을 다 해냈다면 어땠을까. 나는 지금쯤 수백억, 수천억 대 자산가가 되었을까? 그렇게쯤 돈을 많이 벌면 꽤 성공했다는 생각이 들었을까? 그럼 그 다음은 뭐지? 더 많은 돈? 명예? 권력?
해결책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멈춤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 쳇바퀴 같은 굴레를 인위적으로 끊어내는 고리. 그래서 휴직을 했던 것 같다. 집에 있는 동안 '휴직 과연 잘 한 선택인 걸까'라는 후회도 했다. 그리고 정말 비상식적으로 기존에 하던 일과 연관성이 정말정말 제로인 구매대행을 시작했다. 이 말도 안되는 새로운 사업으로 회사 월급만큼 수익을 내려면 진짜 회사 다닐 때처럼 많은 시간을 들여서 해야 할 것이고, 소소하게 지방 부동산 투자 한 두 개 해서는 그동안 투자 수익 낸 걸 따라가기가 어려울 게 뻔하다. 막연한 두려움도 있다. 다시 제도권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아니 꼭 제도권으로 돌아가야만 하나? 그래도 역시 돌아가야겠지, 하루에도 열두 번씩 생각이 바뀐다. 그렇지만 휴직 기간 동안 이건 확실히 깨닫는 것 같다. 나는 추락이 두려웠구나. 이제 착륙을 하고 싶었구나.
어느 정도 올라갔으면 착륙할 준비를 하는 것도 괜찮다는 것.
더 올라가서 더 멋진 풍경을 보면 좋을 수도 있지만 이쯤에서 내려오는 것도 괜찮다는 것.
이걸 인정하고 싶었구나. 이렇게 위로받고 싶었구나.
그동안 나는 추락하는 게 두려웠다. 리스크테이킹 했다가 한 순간 망해버릴까봐. 그렇다고 주저하느라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가 뒤쳐져서 벼락 거지가 될까 봐. 한편으로는 어릴 적 꿈꾸던 성공, 예를 들면 공부나 사회적 대의명분, 정의 같은 것이 아닌 돈을 좇는 게 불명예스럽다는 생각, 이런 불명예스러움을 두고 남들이 나를 타락했다고 비난할까 봐. 남들은 내가 얻은 걸 포기해가면서 결국 어떻게든 성공을 이뤄내는데 나는 편하게 가려다 결국 추락하고 말까봐. 남과의 비교, 남들의 시선, 그런 것들이 내 욕구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했던 것 같다.
남은 휴직 기간 동안에는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잘 착륙할 수 있을지를 연구해봐야겠다.(연구라니…또 시작인듯. 절레절레) 가끔은 또 좀 더 날아오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겠지만 일단 착륙하는 방향으로 가도 괜찮다고 마음을 잡았으니 됐다. 날다가 또 내려왔다가 또 조금 더 날다가 또 내려오고 그러기도 하는 거지 뭐.
이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한 주말 동안 갑자기 많이 아팠다. 결혼 후 9년 동안 한 번도 이렇게 하루 종일 누워있던 적이 없었는데 남편이 놀랠 정도였다. 24시간 중에 20시간을 넘게 누워있으면서 한 조각씩 한 조각씩 글을 써냈다. 10개월 간의 긴긴 휴직 기간이 이틀로 응축되는 기분이다. 이제 그만 울고 주말동안 혼자서 독박육아하느라 고생한 남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러 가야겠다. 그동안 함께 해줘서 고마웠고 또 앞으로도 함께 가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