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는 나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한다. 행복은 셀프
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사귀게 된 남자 친구가 있었다. 약 2년 정도 사귀고 헤어졌었는데 우리는 그 2년 동안 거의 싸우지도 않았고 사소한 트러블도 없었다. 마지막에도 아무 이유 없이 그냥 헤어졌다.
대학교 3학년 여름방학, 나는 독일에서 진행하는 워크샵에 참석하기 위해 유럽으로 향했다. 열흘 간의 워크샵이 끝난 후 약 3주 동안 더 자유여행을 하다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한 번도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떨어져 지내본 적이 없었기에 비행기를 타러 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 당시 서울의 동쪽 끝에 살았던 남자 친구는 친히 인천공항까지 바래다주겠다고 따라왔다. 출국 게이트 앞에서 나는 그를 두고 꽤 오랜 시간 꺼이꺼이 목놓아 울었다. 누가 보면 이민 가는 줄 알았겠다 싶을 정도로.
그리고 나는 비행기를 탔고 거짓말처럼 울음을 뚝 그쳤다. 비행기 안에서 멀쩡히 책도 보고 잠도 자고 기내식도 먹고 가끔 나눠주는 주스도 야무지게 받아먹었다. 처음 비행기 탔을 때 내 몰골을 보고 눈치를 보는 낌새였던 옆자리 아저씨랑 죽이 맞아가지고 여행지 정보도 많이 교환했다.
그렇게 애틋하게 헤어졌음에도 약 한 달 간의 유럽 일정 중에 나는 그에게 거의 연락을 하지 않았다. 워크샵 기간 동안에는 바쁘기도 했고 그 이후의 여행 중에도 핸드폰을 켜 두지 않았다. 그 당시엔 2g 폰만 있을 때라 국제전화는 요금 때문에 아예 할 생각을 못했고 300원인가 했던 문자메시지나 가끔 보내겠거니 했었는데 결론적으로 한 번인가 두 번인가 그가 보낸 잘 지내냐는 문자에 답장 한 번씩 보낸 것 말고는 따로 연락을 안 했다.
남자 친구 없이 한 달을 살아보니 내가 얘랑 왜 사귀었던가 싶을 정도로 아무 감정이 없어졌다. 그래서 돌아오자마자 헤어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그냥 곁에 있을 누군가가 필요했던 것 같다. 공강 시간에 같이 시간을 때울 누군가, 점심시간에 같이 밥 먹을 누군가, 주말에 같이 놀아줄 누군가. 그냥 그런 사람이 필요했던 거지 그 남자가 필요했던 건 아니었던 것 같다.
헤어짐을 고하는 나에게 남자 친구는 도대체 왜 그러냐고 혹시 다른 사람이 생긴 거냐고 다그쳤다. 그런 건 아닌데 나는 사실 네가 좋아서 만나던 게 아니었던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 사실을 몰랐을 땐 괜찮았는데 이젠 내가 그걸 알아버리게 돼서 더 이상 사귀는 사이로 지낼 수 없다고. 노력해보면 되지 않냐고 다시 만나보면 되지 않냐고 되물었던 것도 같은데 암튼 그 이후의 이야기는 기억이 안 난다. 그렇게 남자 친구는 이별의 이유에 대해 납득을 하지 못하고 헤어졌다.
그리고 그 남자 친구는 한 달도 안돼서 새로운 여자 친구가 생겼다. 결국 그 사람도 내가 너무 좋아서 만났다기 보단 그냥 같이 있을 사람이 필요했는데 그게 나였던 게 아닐까.
관계는 나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다. 이성친구가 생기면, 결혼을 하면 이 지긋지긋한 인생이 좀 바뀔까. 저 거지 같은 상사가 없어지면 내 직장생활이 좀 나아질까. 잠깐은 나아질 수 있지만 그걸로 내 인생을 바꾸지는 못한다. 결국 내 인생은 내가 바꿀 수밖에.
이별 후 나는 그와 연애한 기간만큼이나 혼자 지내면서 홀로 주말을 보내고 공강 시간을 때우고 혼밥도 즐겼다. 한 달씩 여행도 여러 번 나가고 클럽도 가보고 소개팅도 하고 애프터도 받아보고 헌팅도 당해보고 썸도 타보고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별 걸 다해봤다. 그 친구는 나와 헤어지고 만나기 시작한 여자 친구와 오랜 연애 끝에 결혼했다던데 문득 행복할까 궁금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