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코로나라는 건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시절, 우리는 미세먼지 때문에 마스크를 열심히 쓰고 다녔다. 심한 날에는 도로변 아파트 벽면에 새겨진 브랜드 마크가 식별이 안될 정도로 뿌옇기도 했다. 답답한 시야에 가슴까지 답답해지던 그런시기에우리 가족은 싱가폴로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첫째 어린이 집에서 만나 친하게 지내게 된 가족이 있는데, 회사 업무로 1년 동안 싱가폴에 가서 살게 되었고, 고맙게도 우리 가족을 초대해 주었다. 해외여행은 신혼여행 이후로 가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애들을 데리고 해외를 나간다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같은 게 있었는데, 지인이 싱가폴에 이미 살고 있다니 큰 부담 없이 떠날 수 있었다.
공항으로 출발하는 날, 아침 일찍 아이들을 깨워 준비를 서둘렀다. 혹시라도 여권을 두고 가는 건 아닐까? 비행기 티켓은 잘 챙겼나? 문단속은 잘한 건가? 며칠이나 집을 비우고 멀리 떠난다는 생각에 이런저런 걱정들로 가방을 몇 번이나 확인하면서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에 도착해서 정신없이 수속을 마치고 면세점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니 그제야 마음이 놓이면서 여행의 설렘으로 들뜨기 시작했다. 무사히 수속을 마쳤다는 안도감과 무거운 캐리어를 맡겨버린 홀가분함, 여행을 시작하는 설렘 등 온갖 좋은 기분들이가슴 가득 차올랐다.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복도는 깔끔하게 청소되어 있었고, 사람들의 발소리와 이야기 소리에 다들 설렘이 묻어 있는 듯했다. 다양한 매장들을 구경하며 돌아다니다 보니, 커다란 통유리 너머로사람들을 기다리는 비행기들이 보였다. 공항 특유의 그런분위기가 참 좋았다.
공항 안에 안내를 도와주는 로봇들이 있었는데, 역시나 우리 아이들은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굳이 필요 없는 것들을 물어보며 로봇을 쫓아다녔다.
5~6시간 정도 되는 비행시간 동안 아이들은 게임도 하고 애니도 보고 잠도 자면서 나름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나도 책도 보고 영화도 한편 보면서 비행을 즐겼다. 영화는 우연히 찾은 싱가폴 배경의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오후 늦은 시간에 창이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출국 수속을 마치고 나오니,친구 가족들이 공항까지 나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첫째와 친구는 둘이 워낙 단짝 친구였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둘의 눈물겨운 상봉을 기대했지만, 그냥 가볍게 인사만 하는 차가운 상봉 장면이 연출되어 조금은 아쉬웠다.너무 오랜만에 만나 처음에는 좀 어색한 듯 보였지만, 곧 예전처럼 신나게 놀기시작했다.
우리는 공항 밖으로 나와서 동남아의 우버인 그랩으로 차를 불렀다. 늦은 오후였지만, 아직 뜨거운 공기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도착한 차를 타고 친구네 가족이 살고 있는 아파트로 향했다. 싱가폴에서는 차를 구매하려면 세금을 워낙 많이 내야 해서 웬만한 사람들은 자차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교통체증도 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랩을 포함한 대중교통 안에서 음식을 먹는 것도 불법이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친구네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는 단지 가운데 넓은 수영장이 있었다. 수영장에서는 학교를 끝낸 고등학생 몇 명이 수영을 하면서 놀고 있었다. 우리 아이들도 워낙 물놀이를 좋아해서 단지 내 수영장이 너무 부러웠다. 집에서 그냥 수영복 입고 나가서 수영하고 놀다가 집으로 바로 들어와서 씻으면 된다니... 그리고 1년 내내 여름인 싱가폴이라서 이렇게 단지 내에서 야외수영장을 운영할 수 있구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파트는 월세가 200만 원 정도라고 했다. 다행히 친구네 집은 회사에서 월세를 지원받고 있었다. 만약 내가 월세를 그만큼 내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등골이 휘다 못해 부러져 버릴 것 같았다. 싱가폴 아파트의 특이한 점으로는 부엌 한쪽으로 가사도우미 전용 방이 따로 있다는 것과 음식물 쓰레기를 포함한 모든 쓰레기를 바로 지하로 내려버릴 수 있는 쓰레기 전용 탈출 통로가 있다는 것이었다.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기 위해 수시로 왔다 갔다 해야 되는 내 입장에서 이것도 무척이나 부러운 일이었지만, 이렇게 마구 모인 쓰레기들을 도대체 어떻게 다 처리하는지 괜한 걱정도 되었다.
우리 일행은 저녁을 먹으러 아파트 근처의 로컬 식당으로 향했다. 저녁이라 나름 걸어 다닐만한 날씨였고, 가까운 거리라 다 함께 걸어가기로 했다. 싱가폴도 우리나라만큼 치안이 좋아서 아이들을 데리고 밤거리를 돌아다니는 게 전혀 불안하지 않았다.
식당에서 나는 맛있게 밥을 잘 먹었는데, 첫째 아들이 향신료 냄새 때문인지 조금 힘들어했다. 나는 후각이 거의 마비되다시피 둔한 편이어서 어떤 냄새 때문에 힘들어하는지 조차 알지 못했다.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아쉬운 마음에 맥주를 좀 더 마시고 잠자리에 들었다. 내일은 유니버설 스튜디오에 가기로 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난 나와 둘째는 단지네의 놀이터로 향했다. 놀이터에는 여러 인종의 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단일 민족 국가에 사는 우리 눈에는 그 모습이 이색적으로 보였다. 백인 아이들과 그 주변에 앉아서 수다를 나누고 있는 동남아계 보모 분들도 많이 보였다. 한 백인 여자아이는 우리 둘째한테 다가오더니 둘째의 볼록한 배를 쓱 만졌다. 난 그 상황이 너무 웃겨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