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고등학교 2학년을 눈앞에 두고 있던 어느 날, 오랜만에 집에 온 녀석은 “엄마, 이것 좀 봐.”라며 내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뭔데?” 하며 받아 든 아들의 휴대폰 화면에는 사진 하나가 떠있었다.
< 아이가 게임을 싫어하게 하는 방법 >
-게임을 열심히 하라고 닦달한다.
-어디까지 진행할 수 있는지 목표를 세우게 한다.
-수시로 레벨 테스트를 한다.
-목표에 대한 진척도를 관리한다.
-숙제로 몇 단계까지 연습해 오도록 한다.
-진척이 늦어지면 혼낸다.
-왜 늦어지는지 이유를 캐묻는다.
-늦는 걸 만회할 수 있는 방법을 묻는다.
-게임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할 때마다 참견한다.
몇 줄 읽어 내려가던 내 입에서 기발하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무엇보다 단순히 ‘공부’를 ‘게임’으로 바꿔두었을 뿐인데 묘하게 설득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나를 보며 아들도 웃고 있었다. 지금은 바쁘게 사느라 게임하는 모습을 보기 힘들지만 한때는 미친 듯이 게임에 빠져 살았던 만큼 녀석도 크게 공감이 된 듯했다.
사춘기 아들의 통제 안 되는 게임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을 엄마라면 ‘이렇게 하면 정말 게임을 싫어하게 되지 않을까? 한 번 시도해볼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초중생 아이들을 둔 지인들의 단톡 방에 사진을 공유하자 폭발적인 반응이 일어나더라.(웃음)
온라인 게임은 아들을 키우는 엄마들에게는 가장 큰 고민이자 과제다. 게임이라고는 오락실의 보글 보글이나 테트리스가 전부였던 나 같은 아날로그형 엄마들의 눈에는 특히나 요즘 게임들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싸우거나 죽이는 식의 전쟁 게임들을 보고 있자면 전부 위험해 보이기만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건 일명 ‘팀전’(여러 명이 팀을 이루어하는)이었다. 팀을 짜서 하는 게임의 경우, 단독 행동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면 안 되기 때문에 아무 때나 게임시간을 멈출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팀원들의 게임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나? 이러나저러나 게임을 통제할 수 없는 이유들만 잔뜩 늘어난 것 같아 더더욱 내 아이가 게임의 노예가 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만 늘어났다.
-막아도 하고 싶은 건 어떻게든 하는구나!
초보 엄마이던 시절, 나는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 미디어나 온라인 게임을 최대한 늦게 접하게 하는 것을 교육 과제 중 하나로 삼았다. 그리고 이런 내 노력은 말을 뗀 시기부터 10살 즈음까지는 잘 조절되어 가는 듯했다. 심지어 스마트폰조차 전교에서 가장 늦은 나이인 중1에 사주었으니 말이다. 엄마인 나는 그렇게 나름대로의 이유를 들며 아들을 잘 통제해오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들이 중학교 1학년이던 시기의 어느 날, 나는 이 모든 생각이 나의 착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들친구: “너 아직도 퓨파(퓨처 파이트)해?”
아들: “어, 나 이거 세계랭킹 4위 찍었잖아.”
아들친구: “진짜? 대박! 미쳤는데?”
집에 놀러 온 친구 녀석의 질문에 당당히 자신이 세계 4위임을 밝히는 아들의 대답을 들은 나는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내가 쏟아온 갖은 노력들은 아무 소용없었던 것이다. 아들은 그토록 열악한(?) 게임 환경 속에서도 세계랭킹을 찍는, 놀라운 성취를 이루어내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아무리 못하게 말려도 하고 싶은 건 눈을 피해서라도 어떻게든 한다는 사실을…. 무조건 못하게 하는 건 결국 숨어서 하게 만드는 현상을 불러낼 뿐이었다.
이후 나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어차피 눈을 피해서라도 할 거라면 내 눈이 닿는 곳인 집에서 하게 만들자고. 그뿐만 아니라 게임을 하는 시간 역시 갈증을 느끼지 않도록 파격적으로 주기로 했다. 그렇게 아들과 나는 주중에는 컴퓨터 사용을 하지 않고, 주말에는 컴퓨터 게임 시간에 제약을 두지 않기로 합의서를 썼다. 그 와중에 주말에 대한 기준이 서로 달라 조정하는 과정을 갖기도 했는데, 다름 아닌 엄마의 주말은 토요일~일요일이고 아들의 주말은 금요일 저녁~일요일까지였기 때문이었다.
아들 왈, 주 5일 등교이니 금요일 저녁부터를 주말로 쳐야 한다는 것 아닌가? 실랑이 끝에 결국 아이의 요구대로 ‘금요일 저녁부터 주말’을 인정하기로 했다. 아이의 요구와 부모의 허용치가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든 순간이었다. 어쨌든 우리는 “콜!”을 외치며 합의서에 마침표를 찍었다.
금요일이 되었다. 아이는 그 어느 때보다 생기 넘치는 모습으로 주말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녀석을 보고 있자니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시작된 아들의 주말은 새벽까지 게임을 하고 있는 건 물론이고 2박 3일을 꼬박 게임으로 채우는 진풍경까지 보여주는 등 엄마 입장에서 혀를 내두르게 만들었다.
한 번씩 방문을 열어 볼 때면 잔소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약속한 게 있다 보니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결국 솟구치는 수많은 말들을 꿀꺽- 삼킨 뒤 “그러다 몸 상한다.” 한 마디로 끝내고는 다시 문을 닫고는 했다. 마음 같아서는 조금이라도 게임을 이해하며 대화를 해보고 싶었지만 게임에 있어선 완전히 까막눈이다 보니 불가능한 바람이었다.
위안 아닌 위안이라면 이런 심정을 나 혼자만 느끼는 것은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한 번씩 아들의 모니터를 볼 때면 마치 게임만을 위해 사는 것처럼 새벽시간임에도 수많은 아이들이 동시에 접속 중인 것이 보였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질리겠지.’ ‘어느 정도 레벨이 올라가면 저러다 말겠지.’ 생각하며 아이를 믿고 기다렸지만 아이는 끊이지 않고 새롭게 출시되는 게임들과 프로모션에 유혹되며 엄마의 인내심이 어디까지인지 시험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