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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선하 Jun 08. 2021

상자는 열리고 문은 잠긴다

결국 텅 빈-

    썩은 장기를 눈과 손으로 낱낱이 파헤친 기분이다. 이 나이에 새삼 놀라울 게 있을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타격이 컸다. 상자를 열지 않았더라면 나는 영영 멋모르고 살다가 필연적으로 마주할 뒤늦은 회한에 몸서리를 쳤을 테다.

  

    손이 떨리고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쿵쾅거린다. 때론 텍스트는 잔인하다. 어느 순간, 어느 곳에선 휘발되지 않고 각인된 그대로 영원히 박제되니까. 그럼에도 굳이 하나하나씩 찾아내어 두고두고 복기한다.  이상 그럴싸한 외양에 속지 않기로 다짐하기 위함이다.


    10년이란 세월이 무상하다. 그저 허상이며 허울이다. 덮어놓고 모른 척했던 외면의 대가가 이토록 허탈하다. 강산이 바뀌는 동안 속이 빈, 아니 속이 썩어 문드러진 껍데기에 시간과 감정과 에너지를 낭비했으니까.


    구태여 잘잘못을 가리고자 함은 아니다. 다만 끝없이 반복되는 어긋남에 지쳤고, 더 이상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고 싶지 않다. 무지한 애송이었음을 되새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속 쓰리니까. 도저히 견딜 수 없다. 이기적이라고 지탄받더라도 별 수 없다. 제때 피하지 못하는 것만큼 미련한 것도 없다. 알게 된 이상 돌이킬 수 없다. 퍼뜩 자리에서 일어나 분연하게 움직이지 않을 수 없다.


    소용돌이처럼 걷잡을 수 없이 겉돈다. 문 밖에 혼란을 내버려 둔 채 빗장을 걸어 잠근다. 삐걱하며 낡은 금속이 소름 끼친 단말마를 내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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