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에프액션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선하 Jun 04. 2021

주취 구멍

웃지 못할 코미디가 따로 없네.

    눈앞에서 고함소리와 함께 의자가 바닥에 사정없이 내리 꽂히는데, 놀랍지가 않아서 놀라웠다. 이토록 무감할 수 있다니. 그저 넋 놓고 멍청하니 앉아 미동도 않았다. 만약 저 의자가 나였으면 필시 어디 하나 부러졌겠구나. 기시감이 든다. 결국 3년 전 청소기는 못쓰게 됐는데 웬일인지 이번 의자는 일단 멀쩡해 보인다. 우리 이웃들은 참을성도 좋다. 야심한 시간에 이만한 소음공해에도 끄떡없다니. 아니면 뭐 억지로라도 비명을 질렀어야 했나.


    오죽하면 이런 생각마저 들었다. 차라리 더욱더 격렬하게 아무 말이나 지껄여볼걸, 그래서 딱 죽지 않을 만큼만 사달이 났길 내심 바랬는지도 모른다. 살을 내어 뼈를 취한다고 더욱더 깔끔하게 끝장 봤을 텐데. 그 정도로 지쳤다. 지쳐버렸다.


    안방 문과 석고벽에 이어 또 구멍이 뚫렸다. 전등 바로 옆에 스치듯 파였다. 이 집에 산 지 어언 13년이 다 돼가는데, 전에 없던 구멍들이 속속 생겨난 건 불과 6년 전부터다(타향살이적에도 방 문짝에 여러 상흔이 남았다). 얼마나 힘껏 들어 올렸으면 장판도 의자도 멀쩡한데 천장이 다 뚫리지. 기가 막힌다. 구멍에서 술냄새가 술술 풍기는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거진 하루가 지나니 지난한 사과 또 사과가 이어진다. 이게 대체 몇 번째, 몇 년째 도돌이표인가.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전두엽 기능(에 약간의) 이상(일 가능성)이라는 좋은 구실을 찾았다고 한다. 주섬주섬 약을 삼키고 10분도 안 되어 약효가 돌아 진정됐다니. 기가 막힌다. 저 무의미한 사과에서 술냄새가 술술 풍기는 듯했다.


    그 행패에도 동요는커녕, 차라리 아주 끝장을 보길 내심 바랬던 나야말로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닐까. 내가 왜 고작 사과 몇 마디로 모든 사정을 이해해야 하지. 내가 왜 집 안팎으로 감정 소모를 당해야 하지. 딱히 경솔함을 사과하고 싶지 않고, 마찬가지로 술냄새 풍기는 사과 역시 술술 받고 싶지 않다.


    뭐, 혹자가 보기엔 끼리끼리 유유상종 도긴개긴일 테지. 하나 맹세컨대 이해심도 여유도 더는 남아있지 않다. 앞으로 뭘 어떻게 해야 될지 딱히 모르겠다. 그저 이만 도돌이표를 멈추고 싶을 뿐이다. 지쳤다. 지쳐버렸다.


    그러게  자극을 하니,  그러려니 넘어가질 않니, 한숨 섞인 음성이 귓전을 때린다. 공연히 오른귀 안쪽이 얼얼하다. 천장에 벽면에 문짝 곳곳에 움푹 파인 술냄새 나는 구멍들을  때마다 공허했다.  마음 같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불 안은 덥고 밖은 춥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