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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선하 Sep 04. 2021

무게

마음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다면 참 좋겠다.

    <오롯이 일 밖에 모르는 사람이다.> 언젠가 동료가 들려준 PC의 주인에 관한 요약은 실로 지당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표가 난다고, 때로는 누군가가 비운 자리에 남은 흔적으로부터 새삼 감응하게 된다.


    아무리 업무용이라도 영 내키지 않았건만 지시 받았으니 별 수 없었다. 주인이 부재중인 PC의 전원을 켰더니, 바탕화면엔 어림 잡아도 수십 개의 아이콘 더미가 빼곡했다. 서칭하는 동안 입이 떡 벌어졌다. 뭐가 이렇게 많아? 이렇게나 방대한 업무량을 다 떠안는다고? 타인의 복잡한 내면을 몰래 훔쳐보는 듯한 기분이 들어 괜히 미안하고 민망했다. 후딱 용건을 마치고자 클릭을 재촉했다.


    평소 PC의 주인은 수시로 몰려드는 사람과 서류 더미에 늘 버거워 보이면서도 활기가 넘쳤다. 꿈을 꾸듯 가볍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때때로 상반되는 단호한 말투, 보이지 않는 무거운 짐을 한 가득 이고서도 반짝반짝 빛나는 두 눈. 마주하는 매번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토록 내달리는 열정은 대체 어디서 기인할까. 배포가 적은 나로선 도무지 가늠할 수 없다.


    무형의 가치가 설정값의 명령으로 형태를 갖춘 아이콘은 하나하나, 모이고 모여 더미를 이루고 양을 자아 무게가 실린다. 그동안엔 눈에 보이지 않아 막연했던 그가 지닌 무게는, 상당수가 대외비 문서로 꽉 채워진 아이콘 무더기를 꾸역꾸역 품은 이 바탕화면으로 어쩌면 가시화된 셈이다. 적어도 내게는 말이다.


    그에 비하면 내가 지닌 무게란, 또 존재감이란 그렇게 알량할 수 없다. 비록 공헌과는 속성이 다를지언정 일면 기여를 위했던 나의 성심이란 의미는커녕 도움 따위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등 쓸모도 실속도 없는 공허한 에너지 소모였음을 깨닫고서 그렇게 부끄러울 수 없다. 아무리 집요하게 파고든들 요청받은 파일은 끝내 찾을 수 없었고, 찾을 수 없는 건 비단 파일뿐만이 아니었다. 부지런히 이동하는 중에도 군상에 둘러싸인 뒷모습을, 멀찌감치에서 그저 바라만 보는 내 위치를 새삼 자각하는 것이다. 아, 난 언제고 대체가 가능하구나. 밀려드는 허무 속에 한없이 푹 잠겼다.


    막중한 무게를 담담하고 당당하게 감당하는 그를 보며 감응하는 나를 알면, 그는 따라서 감응할까. 어쩌면 소름 끼쳐할지도 모르겠다. 아니, 실인즉 무관심할 테지. 그 편이 가장 농후하다. 내가 허구한 날 밤새워 만들었던, 당장 이 바탕화면 한구석에 처박혀 눈에 잘 띄지도 않는 뻔하고 흔한 서류들처럼.


    의기소침해진 애송이는 외부 출장 중인 PC의 주인에게 업무용 메신저로 사무적인 보고를 전했다. 보고 끝에 잊지 않고 고생하셨습니다, 라는 나름의 존경과 응원을 담은 인사를 덧붙였다. 그래 봤자 비대면의 활자만으론 진심이 전해질 순 없을 테지. 알고서 전송했다, 딱딱한 기계의 언어를 빌어 상투적인 인사치레를 흉내 내고파서. 여느 때처럼 1이 사라진 후에도 답신은 없었다. 답신이 없을 줄 알고서 전송했다. 어차피 가닿을 진심도 아닐 테니까. 그까짓 인사쯤 누구라도 할 테니까.


    대화창에서 나가기 버튼을 누르자 그간의 대화 목록(이래 봐야 십중팔구가 일방적인 보고지만) 사라졌다. 이렇듯 타인의 마음 또한 마음대로 드나들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어쩌면 삶이라는 거대한 무게에 짓눌린대도 분연하게 걸어 나갈  있을 만큼 단단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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