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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선하 Jan 07. 2021

이 바닥이 원래 존버잖아요?

눈이 포근하게 쌓이듯 내 마음을 채워줄 수 있는 건 그뿐인 걸.

    날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출근하면서부터 일하는 내내 내 목을 죄는 듯한 여느 때와 같은 일상이었다. 주변에서는 그 누구도 내게 대놓고 모멸감을 주진 않았지만 오늘따라 유독 낭떠러지까지 등 떠밀리는 느낌이 들자 턱턱 막힌 숨통을 조금이라도 틔고 싶었다. 하루쯤, 그래 하루쯤은 나도 살겠다고 발버둥 치면 안 될까? 마음을 다잡자니 우선 아이들과 적당한 격리가 필요했다.


    퇴근하고 나서 같이 저녁을 먹인 후 신랑에게 아이들을 부탁하고 혼자 방구석에 틀어 박혀 정말 오랜만에 반가운 사람과 통화를 했다. 13년 전에 계란 한 판이라고 놀려댔던, 아저씨라고 부르는 배우님(아직도 미혼인 총각한테 지금 생각하면 좀 너무한 호칭이다.)은 어느덧 마흔을 훌쩍 넘은 나이가 되었다. 제가 곧 13년 전 아저씨 나이가 된다고 하니까 거봐라, 세월 금방이지 않냐며 대답하던 여전한 음색, 말투. 9년 전만 해도 막 스무 살이 된 배우 지망생이었던 나에게 무언가를 알려주려고 무던히 애쓰던 모습이었다면 지금은 같이 나이 드는 처지라고 과할 만큼 유쾌하게 유머를 나누며 서로의 아픔에 대해서는 무심하게 흘리거나 애써 감췄다. 통화하는 삼십 분 동안 거의 반절은 시시한 (소위 연륜이라 일컫는) 아재 개그 만발에 경로우대 차원으로 까르르 웃어넘겼건만, 어딘가 말을 아끼고 허심탄회하지 못한 그것만으로도 나로서는 충분한 위안이 됐다.


    아저씨는 내 10대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변천사를 지켜봐 준, 친정식구를 제외한 단 두 사람 중 바로 그 한 사람이었다. 십중팔구 아픈 와중에도 한 번은 있을 평온함이 삶을 지탱해주듯이, 지금보다 더 자존감이 바닥을 치던 시절의 나에게 말없이 연고를 발라주던 유일한 사람이었던 아저씨는 또 같은 배우라는 꿈을 가지게 된 이후엔 이런저런 조언을 아끼지 않으면서도 진심 어린 격려를 잊지 않는 그 따뜻한 마음씨가 지금도 여전한 까닭에, 비록 수년간 만나진 못하더라도 아주 가끔씩 안부를 묻곤 한다. 각자의 삶 속에서 변화하느라 예전과 같은 모습을 찾을 수 없더라도 나에게는 여전한 배우님이기에.


   아저씨를 처음 만날 당시만 해도 나는 배우라는 꿈에 대해서는 생각도 못했건만, 시간이 흘러 배우 지망생이 된 이후로 입시 선생 다음으로 가장 의지했고 조언을 구했던 분이었다. 그랬던 아저씨와 이제는 허물없이 농담 따먹기를 하다니. 어느덧 13년이라는 세월의 흐름 앞에서 배우님 말마따나 같이 늙어가는 처지란 말이 들어맞긴 했다.


    서로의 근황을 묻다가 나름 배우로서 활발하고 착실한 필모가 예정된 그에게 부러움 어린 감탄을 연발했던 내가, "아저씨, 나는 이제 배우하고는 거리가 멀어졌는데도 아직도 이 꿈을 포기 못하겠어요. 대체 왜 이러는 걸까요?" 하고 묻자 그는 말했다. "원래 그래. 나도 이 나이 먹도록 이러고 있는 걸." 그 말을 듣고서 나는 미처 뇌를 거치기도 전에 툭 던지듯이 말해버렸다. "하긴, 이 바닥이 원래 존버잖아요?" 그 한 마디에 우리는 한참을 웃었다. 그렇구나. 결국 배우도, 삶도 존버뿐이 답인가 보다.


    결국 품 안으로 파고드는 귀여운 두 형제의 방해로 허겁지겁 통화를 끝내야 했다. 아가들을 모두 재울 쯤에 통화 내용을 곰곰이 떠올리던 중 퍼뜩하고 머릿속에서 스치듯 지나간, 예전에 아저씨가 한번 가보라고 추천해준 절이 생각나 메신저로 소재지를 물었다. 아저씨의 아재 개그(원래 불혹을 넘기면 자동으로 패치되는 건가?) 남발로 또 한바탕 웃은 뒤 결심이 섰다.


    이번 주말에 신랑과 상의해서 얻은, 오래간만에 온전히 혼자만의 시간이 주어진 주말이 오면 먼저 할아버지 묘소를 들른 뒤 양수리에 있다는 그 절을 다녀와보기로 했다. 3세 이전의 아기들은 아직 엄마가 필요하느니 (꼰대스럽게) 웃는 얼굴 아니 이모티콘으로 뼈를 때리시기에 한창 흥겨울 시간에 내가 괜히 민폐가 됐나 싶어 황급히 메신저를 마무리했다. 몇 시간 전만 해도 몹시 괴로웠건만 나야말로 흥에 취인지 전에 없던 의욕이 마구 샘솟았다.


    인생이란 게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한 여정이라면, 그래 하루쯤은 이런 날도 필요한 것 같다. 아저씨의 말마따나 하루쯤은 온전히 나를 아껴주는 그런 시간을 말이다. 밤 사이 소리 소문 없이 소복소복 쌓인 눈처럼 공허했던 마음에 무언가가 이불처럼 포근하게 덮어주는 그런 밤이다. 가을의 낙엽을 밟았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뽀드득 소리를 내며 발자국이 그대로 남겨진 자리를 보자니, 손등이 거칠어지는 한파는 여전히 싫지만 홀로 나들이할 주말에도 치우는 사람들이 너무 힘들지 않을 정도로만 적당히 눈이 쌓인다면 좋겠다는 바람을 내심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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