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녀의 장녀의 장녀의 헌사
수 십 년 간 애정받고 싶었던 대상은 끝내 허심탄회한 진심 한번 제대로 나누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켜켜이 한 서린 설움은 상당수의 기억과 함께 길을 잃었다. 배우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한 설움을 대신해 불태운 투지는 어느새 재만 덩그러니 남았다. 지금까지 무얼 위해 그리 억척스레 살아왔는지 황망하다. 지금 이 순간엔 뭘 하고 싶은지, 뭘 기억해내고 싶은지 모르겠다, 모르겠다, 모르겠다. 연신 중얼거릴 뿐이다.
되받지 못할 애정을 대신해 당신이 애정을 쏟을 존재를 빌고 또 빌었다. 어렵사리 귀하게 낳은 장남은 나이 들수록 남편과 닮았다. 아들이 하던 일도 그만두고 온종일 당신의 곁에 머물러주기를. 정신도 육체도 쇠약해질수록 편애는 집착으로 이어지고, 밤낮 없는 모친의 성화에 아들은 지쳐갔다. 끝내 닿지 못하는 원성의 대상은 애꿎은 딸과 며느리의 몫이다. 그 와중에 30년을 지척에서 동고동락한 며느리가 아닌 장녀의 수발은 영 불편하고 못마땅하다. 부재중인 아들내외의 인기척을 수시로 확인하다가 기어이 느껴지면, 그동안 곁을 지켜준 장녀의 마음씀은 안중에도 없이 불청객마냥 내쫓는다.
오래도록 왕래 없이 격조하지만 매일같이 외조모의 근황을 접하면 접할수록 실감한다. 각자 처한 시대상과 생애주기와 고유한 개성이 다르더라도, 비단 혈육이라는 배경을 차치하고서라도 나는 어쩐지 남 일 같지 않았다. 외조모의 과거와 현재에서 내가 보였고, 무심한 부모 사이에서 사랑받기를 포기한 나의 엄마도 그렇게 안쓰러웠다. 무덤덤히 말해도 이미 50년도 전에 남동생에게 빼앗긴 고기반찬을 어제 일처럼 기억하는 그녀의 쓸쓸함은 아마 당신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한 까닭이다.
단단할수록 부서지기 십상이다. 외조모의 마음은 너무 단단해지느라 자신도 모르게 동강이 났다. 기실 외조모 역시 당신이 단단해지는 자각조차 없었을 테다. 그래서 나의 엄마는 반대로, 물같은 유연함을 추구했는지도 모르겠다. 외조모는 외조모대로, 엄마는 엄마대로 이지러진 세월을 올곧게 버텨냈다. 강인한 그녀들이 존경스러우면서 지극히 사소한 일에도 곧잘 흔들리고 마는 스스로가 부끄럽다.
언젠가의 외조모의 말마따나 나는 '방아깨비만도 못한 외손녀'이기에 그렇지 않아도 날마다 흐려지는 그녀의 기억 속에 내 자리 한켠이 남아는 있을까 싶지만, 장녀의 장녀의 장녀인 나로서는 어머니의 어머니이기에 내적 유대감이 남다르다. 선대는 알지 못하(고, 기실 안중에도 없)는 후대 나름의 기림이겠다.
나는 두 어머니의 손이자 자로서, 또 내 아이들의 모친으로서, 크고 작은 고민거리로 겹겹이 가중된 압박감에 쉴 틈 없이 짓눌린다. 선대의 전철을 관망하면서 당장 내게 주어진 구만리 앞길이 아득하다. 엄마이자 가장의 길은 누구나가 알지만 아무나는 알 수 없는 거센 돌풍이었다.
교사가 천직인 내 엄마는 당신의 모친과 그랬듯, 나이 들수록 당신과 닮아가는 장녀에게 종종 조언한다: 태풍에 휩쓸리지 말고 태풍의 눈에서 관망하라고. 이길 수 없는 저항을 억지로 견디느니 이길 만큼 수용하고, 또 흘려보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