쑥스러운 고백이지만 어릴 적부터 종종 글쓰기를 좋아했다. 그 시작은 몇몇 선생님들의 칭찬에서부터였고, 좀 더 나이를 먹은 후에는 종이와 필기구만 있으면 갑갑한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대리만족에서였다. 무한한 공상과 예민한 감수성이 차고 넘쳐나던 시절에 시든 소설이든 불문하고 떠오를 때마다 끄적였다. 그러나 운문과 산문 몇 편, 절대 공개할 수 없지만 소중한 추억이 담겨 미련을 떨칠 수 없는 미완성 소설 한 편을 제외하고는 그 시절의 습작은 아쉽게도 전부 분실했다.
그러다 얼마 전에 우연히, 새카맣게 잊고 지냈던 스무 살 무렵의 감성이 담긴 습작 몇 편을 발견했는데... 플라스틱이 썩지 않고 토양을 오염시키듯, 죽지 않고 살아남은 흑역사가 내 정신을 길이길이 좀먹을 것을 우려해 자체 폐기했다.
나는 글을 읽든 말을 듣든 이해력이 매우 느린 편이다. 엄마의 표현을 빌자면 음정은 얼추 알아들으면서 그보다 쉬운 사람 말귀는 못 알아듣는다. 혹자는 경청하는 나를 보며 착하다고 하는데 실로 그 사정은, 착하기는 개뿔 살아남고자 한 자라도 더 빨리 알아들으려는 부단한 노력인 것이다. 요컨대 미쳐 날뛰는 성질을 애써 죽이고 약점인 무지함을 감추는데 급급할 뿐이다.
책 한 권을 읽어도 남들보다 오래 걸리는 통에 독서량은 형편없고 창작의 영역은 오롯한 작가의 몫이라 여겨 점차 글쓰기와 담을 쌓았다. 인생 통틀어 크나큰 오점이다. 사춘기 적에 대인관계가 와르르 무너지면서 누군가와 소통할 일이 거의 없자 말하기도 어눌해졌다. 그런데다 이른 결혼과 출산으로 그 빈도는 더더욱 줄었다.그 여파로 삼십 년 가까이 단짝 친구 하나 없이 헛살았다.
멍청하니 허송세월 하는 동안 수많은 가능성을 잃어가고 그런 만큼 무늬만 어른이 돼버렸다. 견문마저 좁혀지니 어느 날엔가 덜컥 겁이 났다. 그렇잖아도 머나먼 배우라는 꿈인데 시간이 갈수록 그 격차가 더욱 벌어지고 있다. 연기란 것도 제한적인 공간 내에서 연출의 입김이 닿을지언정 결국은 배우 스스로가 주어진 텍스트를 재창조하는 작업인 까닭에 '갇힌 상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미 밑바닥이지만 그 이상으로 한없이 도태될 것만 같아 응급처치가 시급했다. 이에 가장 근접하면서도 경제적인 해법은 결국 글에 있음을 돌고 돌아 새삼스레 깨달았다.
예전만큼 쥐어짜 낼 상상력조차 없는 대신 회상을 붙들어 일상을 적었다. 도무지 글감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서평을 쓰기 위해서 책을 찾아 읽었다. 글을 쓰면서 강조하는 바와 수미를 염두에 두다 보니 말하기도 비로소 어설프게나마 사람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스물네 살부터 스물여덟 살까지의 신변잡기를 모은 <2사이8>이다.
분명 나를 거쳐간 많은 사람들이 평하기로 내 말수가 적다는데. 늘어지는 문장을 오래도록 퇴고하기를 반복하다 보니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이야, 무지하게 말이 많구나. 더구나 모아놓고 보니 3분의 2 가량이 음주 작문이었다. 어쩐지 술냄새가 폴폴 나더라니 주정뱅이가 여 있었구먼.
자체 폐기된 습작들과 같은 운명에 처해질 뻔했지만 마음을 바꿔 용감무쌍하게 브런치에 도전장을 내밀었고 뜻밖에 흔쾌한 승인에 황송할 따름이다. 졸지에 무늬만 작가가 되버렸다. 여전히 진정한 으른으로의 길은 머나멀고, 어쭙잖은 필력으로 진정한 작가가 되리라는 객기는 추호도 없지만. 때로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글을 읽고 써 내려가는 재미에 푹 빠졌다. 다양한 견해와 경험을 볼 수 있고, 떠올릴 수 있고, 느낄 수 있어서. 종종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서.
여전히 작가의 영역은 따로 있다고 여기지만 아주 가끔은 못내 아쉬움이 고개 드는 것이다. 좀 더 열린 마음으로 글쓰기에 전념하면서 또한 열심히 다독했다면 지금의 나는 보다 지혜로워지지 않았을까, 최소한 사람에 가깝게 말하고 행동하지 않았을까. 서툴게나마 글로 담아냈던 독창성을 보다 키울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싸지르다시피 한 글이라 창피하지만. 아쉬움은 일단 접어두고 소통하는 배우라는 꿈에 다가가기 위해 글을 쓰고 읽으며 비정기적으로 발행할 예정이다. 미개한 내가 글감을 떠올리는데 가장 좋은 수단으로 역시 술이 최고지만, 건강상으로나 어린 영유아동 사남매를 둔 엄마로서 도의상으로나 잦은 음주를 할 수 없으니...
감사하게도 '좋은 글은 평온한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어느 작가님의 귀중한 조언을 받았다. 음주를 거치지 않은 맨 정신으로라도 감히 가치부여할만한 글을 내 평생 쓸 수나 있을진 의문스럽지만 글쓰기에 흥미를 갖게 된 이상 부질없는 욕심일지라도 소망을 가져본다. 단 한 번 뿐이라도 언젠가는 좋은 글을 써낼 수 있기를. 그리고 혹여 대단히 민망한 내 글을 꿋꿋이 읽어주시는 대단한 인내를 가진, 청춘이어서 아픈 사람들에게 미약하게나마 위안이 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