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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som Sep 30. 2018

향기롭다는 것의 정의

39세의 추억팔이

도서반납 연체자. 나는 책을 사야하는 사람인가보다. 언제나 하루에서 이틀, 많게는 석달까지도 공공도서관의 책을 연체하곤 한다. 사실 두세달 더 끌어 앉는다고 해서 대단한 지식이 느는 것도 아닌데 오래 품어야 마치 내것이 되는냥 욕심만 부리다 남에게 피해를 준다. 역시 내돈내고 사서 언젠가 책 손길 닿는대로 읽는 것이 내 체질에 맞나보다.


아리랑정보도서관에서 연체한 책을 반납하고 빙빙 돌아돌아 집까지 걸어왔다. 1.5km정도 될까? 소화도 시킬겸 겸사겸사였는데 그 시간이 참으로 귀했다. 내일 할일도 핸드폰에 저장하고, 며칠전 했던 화나는 일들도 되새김질은 했지만 조금 화를 누르는 계기도 만들어보려 노력했다. 내려놓자, 스쳐지나보내자 같은 말들로 나 자신을 위로하고 무리한 걸음걸이를 시작했다.


골목에 진입하자 한 이십대 남자아이가 무슨일이 급한지 바쁜걸음을 재촉하며 나를 가로질렀다. 워낙 느린 걸음인지라 이상할 것이 하나 없었는데 그가 스쳐지나가자 마자 머리가 띵 했다. '아 이 향기...'

폴로스포츠라는 파란병에 담겨진 미국의 고향냄새일것 같은 향수. 한때 이십대 시절 HOT의 열광팬일 시절 장우혁이 뿌려댄다고 소문이 나 나도 한때 산적이 있었다. 남자향수였지만 교복에 뿌리고 다녔다. 칙칙한 남색 교복에 어쩌면 어울릴지 모르는 그 향이었다. 그 향기를 맡는동안 고등학교 시절이 떠올랐다. 독서실에 가득 메운 HOT브로마이드, 팬클럽에 가입해 받았던 각종 인쇄물들, 그들이 입고다녀 유행시켰던 옷 등을 사고 집에서 TV를 연신 돌려대며 춤을 따라했다. 지금 아픈 허리가 그때의 연습 때문이었나 싶기도 하고...


고등학교는 나한테 참 순수한 시절이었다. 누구의 고교시절은 안그렇겠냐만은 학교의 특성 때문인지 아이들은 어느반의 누가 담배만 피워도 수근대고 피하기 일쑤였고, 20분에 한대씩 오는 국철을 타면서 이스트팩 가방속을 정리하던 친구와 나누던 담소는 매우 소소하고 가벼웠으며 즐거웠다. 공부도 열심히 안했지만 지금생각해보면 학원과 독서실을 하루도 빠짐없이 다닌걸 보면 그당시 우등생 코스프레를 했던것 같다. 공중전화에서 삐삐 음성녹음을 들으면서 입가를 씰룩거리던 때였다.


지나가버린 향기 가운데서 이렇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것들이 있는데 사람의 체취가 특히나 그렇다. 눅진눅진하다고 해야하나. 그런 할머니 냄새는 구수하고 고소했는데 지금 다시 그 향기를 맡으면 그게 그 향이었는지 궁금하다. 그럴리 없겠지만. 첫 직장에서 최대리의 이상요상한 잡다한 향수냄새, 교보문고에서 십여년 이상을 유지해 오고 있는 공간의 냄새(특히나 화장실에 가면 유난히 많이 난다. 싸구려 냄새 같은데 중독성 있는) 같은 내 기억속 잊을 수 없는 냄새들이 참 많다. 분명 그들에겐 향기였으나 내게는 향기와 냄새를 구분하기 어려운 여러 순간들을 기억하게 하는 향이다. 원망과 분노가 서려있으나 기억하고 있기에 좋았던 향기 같은 것이다.


교보문고처럼 현재진행형인 것들은 내게 참 소중하다. 아, 사라지면 어쩌지. 이러다 광화문점이 폐쇄하면 어쩌나. 리모델링만 해도 가슴이 철렁한 내 소중한 장소와 추억들이 사라질까봐 전전긍긍한다. 첫사랑과 함께 다녔던 식당들 대부분이 이미 사라지고 없기에 마치 내 연애도 없어진것만 같이 느껴진다. 어렴풋하게 다시 보지 않으면 흐릿해진 기억을 따라 저편으로 조금씩 걸어가다 보면 조금은 서글프다.


폴로스포츠. 나는 이 향 때문에 버티고 있는지도 모른다. 매일 맡을 순 없지만 문득 스쳐지나가는 사람들로 인해 나를 되돌아보는 시간들. 그래서 오늘의 불구덩이 속에서 조금 덜 뜨겁다고 느끼는지 모르겠다. 이런 향을 진하게 느끼는 날이면 앓기도 하는데, 그런 순간은 참으로 기분이 좋다. 어제 밤, 그래서 내가 잠을 푹 잤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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