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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som Nov 30. 2018

모두가 떠난 사무실에 앉아서

타자기 소리의 쓸쓸함

오랜만에 야근이다. 아니, 오랜만에 금요일 야근이다. 목요일 저녁부터 입가가 씰룩거리는데 금요일 아침만 되면 변비가 해결된것 만큼 기분이 상쾌한데. 아 야근이라니. 뭐 그래도 괜찮다. 내일 토요일은 늦잠을 잘 수 있고, 회사식당에서 밥을 먹지 않아도 되니까. 주말 출근이 우울해도 회사식당을 피할 수 있는 기쁨이 부등호를 돌린다.


또 한명의 직원이 퇴사를 한다. 이 팀에 있은지 벌써 5년이 넘었다. 내가 일하는 출판, 취재, 홍보 이런 분야에 이직율이 높다지만 높아도 이렇게 높을 수 있는가. 오래 다니면 3년, 평균 1년 반정도를 채우지 못하고 사람들이 내곁을 떠났다. 내 위의 직급도 아래 직급도 고하를 막론하고 나를 떠났다. 아니, 우리팀을 떠났다. 이유가 무엇일까?


처음에는 상사탓을 했었다. 물론 가능성이 가장 높고, 통계를 봐도 그렇다. 하고 싶은게 있어서, 꿈을 찾아서, 누가 아파서, 가족의 문제가 생겨서 떠나는 것은 대부분 뻥인 경우가 많다. 지금까지의 우리팀 퇴사자들이 그랬고, 인터넷에 떠도는 퇴사이야기의 대부분 이유가 그러했다. 상사를 떠나는 것. 그 사람을 다시 보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나는 너가 더이상 보기 싫어.


회사를 다니면 다닐수록 건강하지 못했다. 눈치를 살피고, 기분을 살피고, 나를 억제하는 모든 순간들이 건강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오랜시간 자리에 앉아있어 살은 찌고, 스트레스로 군것질을 일삼아 복부는 점차 거대해졌다. 아니 지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 떠난다. 나를 소중하게 다루기 위해서 이별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별을 선택하는 사람과 선택 당하는 사람의 마음은 좀 다르다. 팀원들이 떠나갈 때 나는 생각했다. 아 왜 나는 나를 소중하게 다루지 못하는가. 왜 떠나지 못하는가. 경제적인 이유도, 쫄보의 심성도 나를 붙잡는 요인이었지만 무엇보다도 나는 '막막함'이 무서웠다. 난 할줄아는 것도 없고, 이보다 더 우울한 상황이 닥치면 어쩌나 하는 막막함. 노는것도 준비하고 떠나고, 이직도 준비하고 떠나고, 꿈도 준비하고 떠나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난 놀고 싶지도 않았고, 이직도 별로고, 꿈은 더더욱 없었다. 아 놀고는 싶다. 한달정도. 하지만 그것이 무한작정 놀고 싶은 뜻은 아니니 그것도 이유가 될 수 없었다.


떠난 사람들은 다 잘 살고 있었다. 누구는 프리랜서가 되었고, 누구는 둘째를 가지며 더 몸과 마음이 바빠졌고, 누구는 새로운 직업을 찾아 좋은 직장 상사를 만났다. 그들은 용기를 냈다. 떠나기로.



보헤미안 랩소디

전설이 된다던 프레디 머큐리도 떠났다. 직장을 떠난게 아니라 세상을 떠났다. 존재하지 않는 이별이 된것이다. 본인이 희망한건 아니었다. 병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지만 그는 누굴 탓하지도 않고 죽기 직전까지 컨디션이 좋은날은 노래를 했다. 불가항력적으로 갈라놓을 이별이라는게 있는데 그저 하루하루를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았다. 사오십년이 지난 그 노래가 레전드가 되었고, 그도 레전드가 되었다.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그의 사생활. 모두가 축복하는 연인관계가 반드시 행복의 결론이라 말할 수 없지만 그 시대의 시선은 축복보다도 비난이 거셌을 테다. 시간을 견디며 사람들과 관계를 가지고 그 안에서 위로와 평화를 찾은 그였지만 영화에서의 그의 공허함이 어느정도 느껴졌다. 모두가 없이 혼자만 남았을 그 순간의 공허함. 옆집에 있는 메리에게 신호를 보내는 스탠트, 깜빡깜빡... 아무 대답이 없다.


늘 혼자다, 지금도 혼자다

사무실에 앉아있다. 혼자 야근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퇴사를 해서 가장 오래된 사람은 나 혼자다. 현재도 혼자고 앞으로도 나는 혼자가 될 것이다. 아무도 떠나지 않고 내가 떠난다 하더라도 나는 다른 장소에서 혼자가 된다. 남자친구가 있어도 함께하지 않는 순간엔 혼자고 어떨때는 함께 웃는 순간에도 혼자가 된다. 누구도 나일 수는 없으니까.


레전드의 순간은 프레디머큐리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기쁘고 슬픈 날들속에 우리는 늘 기록을 경신한다. 오랜 직장상사의 괴롭힘을 견디는 것도 레전드에 속할 것이고, 일주일에 두세번씩 공연을 보러가는 후배도 누군가에게는 전설이다. 나는 안다. 스스로 대견해 할때 살아있음을 느낀다는걸.


프레디머큐리는 죽는 그 해에도 노래를 부르고 사후에 음반을 냈다. 대견하다. 살아있음을 느끼는 그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 그는 노래를 불렀다. 새 세상이 자기를 기다리던지 말던지 프레디머큐리는 세상과 마주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무실에 혼자 있는 오늘, 나는 세상과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 그가 노래를 했다면 나는 무엇을 하며 이 순간순간을 느껴야 하는가. 오늘은 아프지만 내일은 건강하고 싶다. 사무실을 벗어나 집에서 뜨끈한 맛있는 점심을 먹고 싶다. 그렇게 내일 살아가고, 순간을 맞이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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