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런던, 고난의 시작
인천을 출발한 비행기는 무려 14시간을 비행 했다.
10시간이 넘어가자 사람들은 서서히 좀비의 모습을 닮아갔고,
12시간이 지나자 눈빛 그 어디에서도 여행을 앞둔 자들의 설렘과 생기는 비행기의 공기 안에 존재하지 않았다.
인류가 벌인 전쟁은 꼭 살상 무기가 아니어도 사람을 쓰러트리는 나비효과를 불러들였다.
4년만에 다시 도착한 런던의 히드로공항은 모든게 그대로였다.
정말 놀랍게도
첫 여행에서 거의 뜀걸음으로 공항을 빠져나왔음에도
숨찬 걸음으로 걸었던 2019년 1월의 공항 풍경이 재현되었고 기억으로 겹쳐졌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긴장하게 하던 입국 심사 질문이 없어지고 여권만 스캔하면
그냥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새 여권에 첫 스탬프가 쾅 하고 박혀져 여행의 기록이 되길 바랬던 아이는
생략된 대면 입국 심사의 긴장감에서 해방되었다는 반가움보다
먼저 새 나오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 저기서 꺾어서 맞은편에 보이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면 피카딜리라인 지하철로 연결되지.'
소름돋도록 그 기억은 사실과 정확히 일치했다.
2019년 여행에서 썼던 오이스터 카드에 20파운드를 충전하고 런던 여행에서 쓸 440파운드 빳빳한 현금과
신용카드 두 장을 따로 가죽 카드 케이스에 꽂아 검은 파우치에 담았다.
'런던에서는 이것만 들고다녀야겠다'
폭염이랬는데?
이상하다.
런던의 공기는 선선하다.
폭염으로 활주로가 녹아내리고, 휴교를 한다는 인터넷상의 뉴스로 상상하던 그 런던이 아니었다.
시끄러운 쇠 바퀴를 갈아대는 지하철의 쇳소리가 귀를 지나 오래 비행해 지친 내 귀와 뱃속을 긁어내린다.
이 반원모양의 붉은 띠 튜브는 그대로다.
2022년 7월 27일.
런던의 날씨는 선선했다. 오히려 서늘함에 더 가까웠다.
지하철에 앉은 사람들의 긴 팔 옷과
어떤이가 두른 외투가 나의 인지와 예상은 틀렸고, 신체 감각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알렸다.
해머스미스 역에 내린 나는 한껏 숨을 들이켰다.
해가 지기 시작하면서 더 서늘해진 공기를 안고 선
키 크고 잎 넓은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있는
해머스미스역은 어떻게 느껴도 가을이었기 때문이다.
여름을 살다 15시간, 아주 짧은 숨으로 단박에 건너온 가을의 공기는 신선했고
런던의 거리는 런던 런던 했다.
그래. 이게 런던이지. 여기가 런던이지.
가슴이 부풀어올랐고, 혹시 이 여행이 이루어지지 못할까
십개월을 졸여두고 숨겨 두었던 여행의 설레는 마음을 그제서야 마음껏 부려 놓았다.
이제 숙소까지는 환승해서 3정거장이 남았다
쉐퍼드부시마켓역으로 가는 노란색 이너라인 기차에는 사람이 없었다. 해머스미스역은 피카딜리라인과 이너라인이 만나는 역이었다.
몇몇의 사람들이 그 뒤에 올랐다.
지하철이 움직이고 곧 내려야 할 역에 도착했다.
쉐퍼드부시 마켓역이다.
잠깐 동행했던 분과 인사를 하고 서둘러 아이를 데리고 내렸다.
개찰구로 내려가는 계단은 몹시 가팔랐고 리프트는
으레 런던의 많은 역이 그렇듯 없었다.
캐리어 하나를 내려 놓고, 다시 뛰어 올라가 또 하나를 가지고 내려왔다.
'나가볼까?'
교통카드가 안 보이다.
검은 파우치가 안 보인다.
'어? 뭐지?'
가방에 있나? 하고 가방을 열었다.
아시아나항공 기내에서 산 양주병이 바닥에 쾅 하고 떨어진다. 종이 상자 안에서 그대로 깨져버린 양주가 내 발을 적시면서 흐르기 시작하고 아무리 뒤져도
돈과 신용카드, 막 충전해 온 교통카드를 담아 놓은 검은 파우치가 없다.
뭐야! 왜 이러는건데 시작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