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슬픔과 화해하기
24년 11월 27일 117년 만에 가장 많이 첫눈이 온 오늘이다. 이제 막 학기를 적응한 거 같은데 다음 주만 지나면 기말고사를 보고 종강을 한다. 겨울이 왔다는 것은 올해를 마무리하는 12월 매듭달이 얼마 안 남았다는 것이고, 12월이 지나면 또다시 새해라는 것이 찾아와 적응하느라 바쁠 것이다. 적응하는 과정에서 우선 큰 산을 넘어야 하는데, 2월 22일 내 생일이다. 겨울에 해가 짧듯이 내 생일도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 나는 사실 그렇게 내 생일을 좋아하지 않는다. 오랜만에 오는 연락들에 진심 어린 고마운 연락을 답장해야 하고 받은 선물에 대해 고마움을 표시해야 한다. 나는 선물을 주는 게 익숙하지 받는 게 너무 어렵다. 받은 후 내가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래도 나에게 보내는 마음이기에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해야 하는데 이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 차라리 받지 않고 그냥 일상을 보내고 싶다. 이런 내 마음을 다시금 고민하게 해주는 일이 있었다. 군 복무를 마치고 처음 찾아온 생일. 군 복무를 마치고 오랜만에 사회에서 보내는 생일이라서 그런지 정말 많은 선물과 축하연락이 왔다. 그중 내 첫 번째 책 [무색]에 들어가는 그림을 그려준 동아리 선배 누나가 전화가 왔다.
"민창이 생일축하해~! 머 필요한 거 없어?"
"누나~! 너무너무 고마워요~ 에이 내가 머가 필요해 괜찮아요~"
내 처음 책에 들어가는 그림을 그려주고, 출판사 로고까지 그려준 고마운 누나이기에 이미 충분히 누나에게 많은 걸 받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핸드폰 너머 누나의 온도가 달라졌다.
"야 김민창, 맨날 주기만 하고 받는 것도 익숙해져야지. 그거 선물 주는 사람한테 실례야."
"어..? 아니, 나는 진짜 괜찮아서"
"머가 괜찮은데. 됐어, 너 먹는 비타민 있어?
"아니, 없어요..."
"그럼 비타민 받고 챙겨 먹어."
"네..."
누나와 통화를 끊고, 당황스러웠지만 내 머릿속에 지나가는 질문이 있었다.
'내 생일인데도 나는 무엇에 부담을 느끼고 있는 거지?'
사실, 많은 사람들은 본인의 생일을 기대한다. 365일 중 딱 특별한 그 하루는 주인공이 될 수 있고, 모두의 관심을 독점할 수 있다. 나는 그게 어려운 거 같다. 모두의 관심에 내가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하는지 그걸 모르겠다. 나에게 관심을 주는 만큼 돌려줘야만 할 거 같고, 그 관심에 만족스러운 반응을 해야만 할 거 같다.
그런 생각을 하니 오히려 생일은 부담이고, 걱정을 하는 날이다. 내 머릿속 어딘가에 이런 문장이 있는 거 같다. '나는, 이런 값없는 사랑을 받아도 괜찮은 사람인가?'
26년의 인생을 살면서 나는 이야기를 참 좋아한다. 드라마, 영화, 책 등등 이야기가 있는 건 모든지 좋다. 좋아하거나, 내 인생 드라마, 영화라고 생각하는 건 대본집을 사서 읽기도 한다. 그중 모든 장르를 합쳐 내 인생 이야기는 [나의 아저씨]다. 류이치 사카모토가 나의 아저씨를 보고 "[나의 아저씨]는 어른을 위한 판타지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모두가 바라지만 현실에서는 본 적 없는 따뜻함을 이야기하는 드라마. 평생을 살면서 내 인생 스토리는 [나의 아저씨] 임이 변하지 않을 거 같다. 수많은 명장면 명대사 중에 가장 내 머릿속에 넓은 자리를 잡고 있는 장면은 지안이 할머니 장례식 장면이다. 하나밖에 없는 가족인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지안은 동훈에게 전화를 건다. 그리고 후계동 식구들이 장례식에 모인다. 초라한 장례식의 모습을 보고 상훈은 모아놨던 비상금을 사용하면서 조화와 음식들로 할머니의 영정사진 옆을 가득 채우고 본인의 집안 어르신이 돌아가셨다고 지인들에게 이야기하며 지안이 할머니 마지막 가시는 길을 북적하고 사람 냄새나게 만들었다. 할머니를 화장하고 납골당에 안치 후 납골당에 나오면서 지안은 후계동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꼭 갚을게요"
지안은 정말 갚고 싶었을 거다. 힘들고 슬픈 순간에 혼자 있지 않게 해 주고, 할머니의 마지막을 도와준 후계동 사람들에게 정말 고마웠을 테고, 고맙다는 말보다 더 고마운 말을 고민하다 갚겠다고 말했을 것이다.
지안의 이야기를 듣고 후계동 사람들은 이렇게 대답한다.
"뭘 갚아요. 인생 그렇게 깔끔하게 사는 거 아니에요."
어른으로서 나이 어린 사람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푸근한 말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인생을 살면서 마주하는 모든 걸 갚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갚지 않아도 괜찮은 순간도 인생에는 있다는 걸 후계동 사람들은 지안에게 이야기해주고 싶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나에게 보내는 모든 선의에 나는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니, 지금도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지만, 내가 갚을 수 없는 한계가 분명 올 테고 인생은 짜놓은 시나리오처럼 완벽하지도 감독의 ok싸인처럼 완벽할 수 없다. 인생은 불완전하기에 부족함을 받아들이고, 나에게 건네는 선의를 누리기도 해야 한다.
나를 혼내며 선물을 준 누나의 선의처럼.
이렇게 또다시 내 부족함을 마주한다. 내가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내 여린 모습을 발견한다.
깔끔하지 않은 게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니 부족함과 여린 모습을 주변사람에게 보이며 그들이 건네는 선의로 채워나가야 한다. 그게 정말 인생의 모습인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