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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늘 Jun 16. 2022

그의 그리니치 빌리지

그녀는 검정 원피스에 폼이 넉넉한 베이지 색 카디건을 걸쳤다. (사실 카디건이라고 해야 할진 잘 모르겠다.) 길게 늘어진 금색 목걸이에 지름이 큰 금색 링 귀걸이를 했다. 그녀의 눈과 입술은 어딘지 모르게 빛났다. Fashion의 F도 모르지만, 짐작하기론 오늘 그녀의 스타일은 '보헤미안'의 범주에 속했으리라.




크리스토퍼 역을 나서면 크리스토퍼 공원이 보인다. 그곳에 가니 그녀가 내 옷과는 색을 맞추고, 우리가 오늘 데이트하기로 결정한 그리니치 빌리지와는 분위기를 맞췄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눈에 담아본 동네는 무척 자유로워 보였다. 격자 구조의 도로망을 지니는 뉴욕의 다른 동네와 달리, 크리스토퍼 공원은 세모난 모양으로 격자의 규칙을 깨고 있었고, 내가 살고 있는 윗 동네와 비교하여 지나가는 사람들의 옷차림이 다양했다. 곳곳에 보이는 무지개 깃발(LGBTQ를 상징한다)은 왜인지 모르게 동네에 자유로움을 더하고 있었다.


그리니치 빌리지는 꽤 마음에 들었다. 사실 마음에 들 수밖에 없었다. 그게 그리니치 빌리지라서기보단, 데이트라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그녀, 동네를 거닐기에 적당한 햇빛, 폭신한 식감을 가진 점심의 프렌치토스트, 온갖 사람이 뒤섞인 워싱턴 스퀘어의 생동감, 커피 사러 가는 길에 우연히 마주친 댄스 페스티벌의 활기참, 이 모든 것들이 그리니치 빌리지와 합쳐져 이른바 "최적의 데이트"를 완성시킨 것이다. 게다가 춤을 좋아하는 그녀와의 데이트에서 "1년에 한 번 열리는" 댄스 페스티벌이 우리가 함께 처음 방문한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열린 것은 괜스레 그리니치 빌리지에 의미부여를 하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유쾌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뉴욕의 특징 중 하나를 꼽자면 길목 하나로 동네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는 것이다. 인적이 드문 길목을 지날 때쯤, 어떤 사람이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를 무시하고 지나가는데 그 사람은 손 흔들기에서 멈추지 않고 그녀의 뒤통수에 대고 불쾌한 말을 날리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부산한 거리를 걸어가는데 교회 앞 연석에 앉은 어떤 사람이 나를 보더니 두 손으로 자신의 눈을 찢었다.


갑자기 밀려오는 씁쓸함과 함께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처음 본 크리스토퍼 공원이 떠올랐다.




크리스토퍼 공원은 굉장히 작다. 얼마큼 작냐고 물으면 공원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한눈에 볼 수 있을 정도로 작다. 공원 안에는 조지 시걸이 만든 서 있는 두 명의 남자 동상과 앉아 있는 두 명의 여자 동상이 있는데, 각각 게이와 레즈비언이라고 한다. (그녀가 가져온 뉴욕 관련 서적을 읽지 않았다면 그냥 남자 둘 여자 둘 동상이 가뜩이나 좁은 공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크리스토퍼 공원 앞에는 '스톤월 인'이라는 건물이 있는데, 이 건물은 과거 LGBTQ 억압에 대응하여 스톤월 항쟁이 시작된 장소다.


이 곳의 역사와 오늘의 씁쓸함이 더해져, 세모난 모양의 자그마한 이 공원이 기존의 질서(격자)를 깨고, 건물이 빽빽이 서있는 뉴욕의 비좁은 틈을 비집고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듯 느껴졌다.


사실 오늘의 일로 크리스토퍼 공원의 공간을 떠올리는 것은 조금 부끄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지금이야 캣콜링이나 아시아인 혐오가 잘못된 것이라는 합의가 있지만, 50여 년 전 LGBTQ 인권 의식은 그런 합의도 없었을테니 말이다. (사실 상상도 잘 안된다.)


그리니치 빌리지 곳곳에 달려있는 무지개 깃발이 마치 역사의 한 조각처럼 느껴졌다.


참고: 6월의 뉴욕은 무지개 깃발로 가득찬다. 이는 스톤월 항쟁이 6월에 열려서 6월이 pride month로 지정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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