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울한 철학자에게만 기운 돋는 단어 100선》끝 10

끝 (91~100번) 창작과 비고란

by 비고란



91. 미련

돌아가지도, 떠나지도 못하는 발목에
걸린 존재들의 그림자들이
닦아내면 더 선명해진다.



92. 석탄

다 타지 못한 마음의 검댕이
끝내 잡지 못한 손을

더 검게 한다.


93. 잔향

위로 퍼지지 못한 향들이
가슴부터 은은하게 잔재된다
그때 안 났던 말의 냄새들


94. 여운

걸어 잠근 마음인데도 자꾸 문을 연다.
누가 거기 있냐고,
아무도 없을걸 알면서도 습관처럼

95. 스미다

들어온 줄도 모르고
살이 되었을 줄이야
그게 당신이었을 줄이야

96. 사라짐

사라졌다고 말하기엔
너무 단정해.
그건, 죽음보다 예의 없으니까.

97. 잊힘

네가 날 잊었단 말을 하기 전에
어설프게라도 미리
나를 기억하기로 했다.

98. 남겨짐

멀어지는 게 이별인 줄 알았는데
내가 멀어지는 게 남겨지는 것임을
그게 진짜 이별이었음을.

99. 흔적

없애려다,
흉터처럼 남았다.
그건 지운 게 아니라 새긴 거다.


100. 에필로그 – [창작과 비고란]

비고란은,
본문 아래 작고 납작한 공간.
누군가 덧붙인 말, 빠뜨린 정보,
애써 무시한 불평과
어쩌다 묻힌 아이디어들의 집합소.

그 좁고 쪼그라든 칸 안에
얼마나 많은 ‘진짜’가 들어가 있는지.

출근길 지하철처럼
사람들이 빽빽하게 쑤셔 넣은
땀내 나고, 피곤한,
그러나 살아 있는 꾸깃한 문장들.

어차피
빼곡하던 비고란은 비워졌고,
그렇게도 빼곡하던 램프의 재떨이도 비워졌고,
담배빵을 탄흔 삼아
장초를 탄피 삼아.

삼세번이 아닌
일곱 번은 비벼야 튀어나오는,
재떨이의 지니와
쓴 세상 게으른 문장들을

지켜봐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수, 금, 토, 일 연재
이전 04화《침울한 철학자에게만 기운 돋는 단어 100선》9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