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서는 문턱에서 5초간 멈추며
나는 글이 사람의 마음을 건드리는 방식에 대해 오래 생각해 왔다.
그런데 사람들은 글을 쓴다기보다, 글을 소비하거나 유린하곤 한다.
읽지도 않고 댓글을 달고, 읽었다고 착각하며 조롱한다.
독자들은 밈이란 단어자체가 밈인데도, 밈이라는 글 안의 코로나 속에서 글들은 자기 복제의 바이러스에 백신 없이 수용당해 있다.
쭉 잘 나아가던 문장의 맥락을 끊고, 감정의 엉덩이를 갑자기 두들긴다.
그래놓고 말한다.
"재밌었어요."
"잘 봤어요."
그 말속에 말이 없고, "'나라고 이게 나라고"하며 울부짖는 글들엔, 나도 없고 너도 없고, 나라도 없다. 뭐가 나인지 참 나인지 부연설명도 없을뿐더러 착한 해설도, 어설픈 논리도 없이 밈화된 '참 나' 찾기 증후군.
내 글은 누군가에게 안부가 되지 못했다.
그저 가볍게 넘겨지는 정보였고,
의도를 곡해당한 주장으로 뒤틀리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옥상의 바람결에, 선풍기의 자연풍에 흩어 사라졌다.
잠시 저 건너 파출소 앞까지 글을 내동댕이 쳤다.
그러나 글은 내 멱살을 잡고 있다. 상복을 차려입은 검은 넥타이를 틀어잡고 멱살을 말이다.
일상에서의 감정은 흘러넘치면 말이 되고,
말은 끓어 넘치면 글이 된다.
그 과정에서 나는 늘 '말을 쓰는 사람'이 아닌, '글을 느끼는 사람'으로 남고 싶었다.
정말 그러고 싶었다.
아이를 안고 고즈넉한 성당에서 고해성사를 받는 산모처럼,
십일조 봉투를 부둥켜안은 체 교회에 성큼성큼 쇄도하는 청소부 아저씨처럼,
공양미 삼백석을 어깨에 두른 체 대웅전 앞에서 망설이는 심청이처럼,
그렇게 나는 내 비장한 글들을 바지춤 동전주머니에 꼬깃하게 구겨 넣은 체 문을 두드리며 소리친다.
"호외요 호외! 내 글이 나와버렸어요. 호외!"
이제 나는 말한다.
글을 유린하는 모든 이들에게 안전한 사각지대는 없다.
나는 문장으로 당신의 감정을 건드릴 것이다.
나는 감정의 바깥이 아닌, 안쪽을 찌를 것이다.
피가 나든, 웃음이 터지든, 무언가 ‘흔들리게’ 할 것이다.
나는 시도 쓰고, 욕도 쓴다. 때때론 시로 욕하기도 한다.
나는 감정의 껍질을 벗긴 문장을 사랑한다.
그래서 ‘비고란’이라는 이름을 택했다.
그건 부기(附記)도 아니고, 비고(備考)도 아니다.
그건 “네가 넘겨버린 문장 안에 있었던 남겨져 버린 나”다.
"내 글을 읽은 너의 기분은 좀 어때?
나아졌어, 아니면 글자만 더듬다 말았어..?"
진심으로 묻는다.
그 사각지대, 아직 안전하다고 느끼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