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레드 바이올린과 책 피플 오브 더 북
중고나라나 당근마켓에서 물건을 구입해본 적이 있나요? 중고물품은 이전 주인들이 있었다는 점에서 특별합니다.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고 거쳐서 내 손에 들어온 상품을 보면 이전 사용자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전 카메라랑 자전거를 중고로 사봤는데요. 카메라 후드에 왜 이런 상처가 나 있는지, 자전거에 해바라기 스티커는 누가 붙인 걸까 궁금하더라고요. 이번에 소개할 책과 영화는 시대를 거치며 여러 사람들의 손과 손을 거쳐 온 바이올린과 책이 주인공입니다. 영화 <레드 바이올린> 과 소설 <피플 오브 더 북>를 소개합니다.
‘레드 바이올린’은 1998년도에 개봉한 이탈리아 영화입니다. 17C에 만들어진 바이올린이 300년 동안 어떤 주인들을 거치게 되는지 시간의 순서대로 전개되는데요. 레드바이올린의 탄생부터 보겠습니다. 바이올린을 만드는 장인 부조티가 자신의 역작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때 마침 그의 아내 안나가 임신한 시기여서 그는 완성 된 바이올린을 자식에게 주고자 합니다. 장면이 전환되어 안나가 하녀 체스카에게 태어날 아이에 대해서 점을 쳐달라고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나 체스카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점은 칠 수 없고 대신 안나의 타로점을 봐준다고 하네요. 타로카드, 운명과 예언, 영화 초장에 분위기 잡는 장치가 나왔어요. 그런데 이 예언이 산모에게 아주 불길하게 시작합니다. 영화는 이 예언을 처음에 다 보여주지 않고 영화 중간 중간에 공개합니다. 자체적으로 스포일러를 막는 거죠. 예언이 불길하게 시작했다고 말했죠. 얼마 뒤 산모는 출산을 하는 과정에서 죽고 말고 부조티는 슬픔에 빠진 상태로 바이올린을 완성합니다. 그것이 바로 영화의 주인공인 붉은 색을 띠는 ‘레드 바이올린’입니다.
그리고 이제 레드 바이올린이 어떠한 주인들의 손을 거치게 되는지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재미있습니다. 영화의 색체는 ‘아마데우스’를 닮았지만 기묘한 분위기는 ‘피아니스트의 전설’이 떠오르고 매력적이고 파격적인 바이올리니스트가 나온다는 점에선 ‘파가니니,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와 비슷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영화들과 다릅니다. 이 영화는 사람이 아닌 ‘악기’가 주인공이니까요. 음악영화로 분류를 해도 좋지만 그보다는 이야기 영화라고 하고 싶어요. 보통 영화에서 이야기라는 장르는 없으니 크게 보면 드라마겠네요.
레드바이올린은 300년 동안 산과 바다를 건너고 동서양을 넘나들고 남녀노소 모두의 손을 거칩니다. 각각의 이야기는 이 영화의 힘이자 재미입니다. 여기에선 굵직굵직한 사람들만 소개하겠습니다. 이탈리아 공방의 장인 니콜라 부조티에서 탄생한 이 바이올린은 오스트리아 알프스 어느 수도원의 아이들 손을 거치다 신동 소년 캐스퍼에게 가는데요, 이 소년의 손에서 집시의 손을 잠깐 거쳐 영국의 광기 어린 천재 포프에게 건너갑니다. 근데 이 포프가 정말 대단한 연주자입니다. 포프와 함께 레드 바이올린의 명성을 널리 떨치게 됩니다. 영국에 있던 레드 바이올린은 포프의 중국인 하인을 통해 중국으로 건너갑니다. 시앙페이라는 사람이 어머니에게서 바이올린을 물려받았지만 중국 내에서 서양악기를 불태우는 문화혁명기를 맞아 다른 사람에게 바이올린을 보내고, 그 뒤 바이올린은 캐나다 몬트리올의 듀발 경매장에 나오면서 감정가 모리츠와 음악가 러셀스키가 이 바이올린을 차지하기 위해 경합을 벌입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결말은 뉴욕에서 맺습니다. 마치 핏빛의 가까운 그 매혹적인 바이올린은 어떠한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들려줄까요?
레드 바이올린을 보다보면 바이올린에 귀신이 들렸다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우리는 영험한 물건을 보며 귀신이 들렸다, 혹은 엄청난 사연이 숨겨져 있다고 합니다. 조금 오글거리지만 명검 중에서도 주인을 기구한 운명에 빠뜨린다는 마검은 어떤가요.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티르빙’, 용비불패에 나오는 ‘뢰신청룡검’, 원피스에 나오는 ‘2대 귀철’, 판타지 소설 룬의 아이들에 나오는 ‘윈터러’ 등에 열광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 검이 강하기만 하기 때문이 아닐 겁니다. 검에 담긴 기구한 이야기가 사람을 끌어당기기 때문이겠죠.
이렇게 보면 이야기란 참 대단합니다. 그냥 팔면 그저 사과지만 태풍을 이겨냈다는 스토리텔링이 있으면 수험생들에게 의미 있는 상품이 되곤 합니다. 레드 바이올린은 이야기가 가진 힘을 극대화시킨 영화입니다. 각각의 사연들을 보다보면 씁쓸함이 담긴 상실감도, 매혹적인 이야기도 나옵니다, 마치 코스 요리처럼 여러 개의 영화를 조금씩 맛 본 기분이에요. 개봉한지 20년이 넘은 영화고 청불이기 때문에 인지도는 낮습니다. 하지만 재미있는 영화입니다. 도쿄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수상작이고, 부산국제 영화제 오픈 시네마 부문 초청작이기도 합니다.
이번에는 책을 소개해볼까요? 300년간 떠도는 바이올린에 이어서 이번에는 500년간 떠돈 책이 나옵니다. 제럴딘 브룩수의 장편소설, ‘피플오브더북’입니다. 책을 펼쳐봅시다. 책 맨 앞장에 헌사 있죠? 이 책에는 이렇게 적혀있습니다.
‘도서관 사서들에게 바칩니다.’
제 직업이 사서라서 그런지 첫 장을 읽기 전부터 책에 관심이 갔습니다. 피플 오브 더 북은 ‘사라예보 하가다’라는 책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합니다. 후기를 보면 작가가 이 책의 어떤 점에서 각 에피소드를 만들었는지 설명하는데, 여기에서 작가님의 열정이 느껴집니다. 기자 출신인 작가 제럴딘 브룩스는 보스니아 전쟁을 취재하는 동안 ‘하가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전쟁 중에도 책을 구하기 위해 도서관과 박물관에 들어가 책을 지키고자 노력한 사서들에게 감동을 했다고 하네요.
본격적으로 책 이야기를 하기 전에 이 책은 배경지식이 있으면 좀 더 수월하게 읽힙니다. 먼저 ‘사라예보 하가다’를 알아보겠습니다. 하가다는 유대인 가정에서 출애굽을 기념하는 유월절의 저녁식사 세데르 예식을 집전할 때 사용하는 책입니다. 유대인 가정에서는 매우 중요하며 각 가정마다 한 권씩은 있다고 합니다.
‘사라예보 하가다’는 사라예보에서 발견 된 하가다인데 14C 스페인에서 제작되었다고 밝혀졌습니다. 특이한 점은 채식 된 최초의 중세 히브리어 서적 가운데 하나라는 점입니다. 중세 유대인은 성서의 가르침에 따라 어떠한 형상도 그리거나 만들지 않았다는 미술사학자들의 정설을 뒤엎은 독특한 사례로 19세기 이 책이 학계에 소개되자 미술사 교과서 내용이 바뀔 정도였다고 한다.
저자는 사라예보 하가다의 여러 그림 가운데 사프란색 옷을 입고 세데르 식탁에 앉아 있는 검은 피부의 여인이 있다는 것을 눈여겨 봅니다. 저자는 이 여인을 보고 중세 스페인에에서 유대교와 기독교, 무슬림이 평화적으로 공존하던 ‘콘비벤시아’라는 시대를 떠올립니다. 콘비벤시아(Comninencia)는 스페인어로 관용이란 뜻으로 역사적으로는 유대교, 기독교, 무슬림 세 종교가 공존을 했던 시기를 의미합니다. 무어족이 지금의 스페인 지역을 지배하면서 세 종교가 교류하였는데 이는 1492년 이사벨 여왕에 의해 카톨릭 국가로 통일 되어서 유대인과 무어인들이 추방 될 때까지 4세기 가량 유지되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스페인의 톨레도, 코르드바, 그라나다 지역을 가면 기독교와 이슬람이 혼합 된 무데하르 양식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지금 생각하면 상상이 안 될 수도 있습니다. 기독교와 이슬람이 평화롭게 공존했다고? 하지만 책 속에 나오는 인물은 오히려 무슬림과 기독교인이 싸우는 이유를 묻습니다. 한 번 인물의 대사를 빌려오죠.
“도대체 무어인과 뭣 때문에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는 걸까? 무슬림과 유대인, 기독교인은 수백 년 동안 이 땅에서 조화롭게 함께 살아오지 않았던가? 속담에 뭐라고 했나? 기독교인은 군대를 일으키고, 무슬림은 건물을 세우고, 유대인은 돈을 모은다고 했다.”
기독교인, 무슬림, 유대인은 제각각 다른 모습이긴 하지만 분명히 공존하였나 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제가 피플오브더북에서 '사라예보 하가다'를 소개하는 문장을 두 개 더 소개할게요.
‘놀라운 것은 내가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점이다. 유대인이 신의 창조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은 우리의 코란에서 설명하는 내용과 거의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스페인에서 일하는 화가가 유대인 의뢰인을 위해 유럽 기독교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며 이란의 붓을 사용한 이유가 무엇일까?’
독특하지 않나요? 사라예보 하가다는 이처럼 그 자체로 비밀을 가지고 있는 책입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와 이슬람, 무슬림이 공존하였던 콘비벤시아 시기처럼 사라예보 하가다도 여러 종교가 섞여 있는 듯한 신비로운 모습을 보입니다. 도대체? 왜? 어째서? 사라예보 하가다는 500년 동안 어떤 일들을 거쳤을까요? 앞으로 작가는 이 물음에 대답를 붙여줄 겁니다. 보존전문가인 히스 해나가 신비로운 ‘하가다’의 보존을 위해 보스니아의 국립박물관으로 오면서 말이죠.
등장인물을 소개해드릴게요.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으로 베르니 하인리히에게 기술을 배운 서적보존 전문가 히스 해나. 그녀는 복원과 보전은 다르다고 강조하지만 서적보존의 철학에 대한 긴 토론만큼은 싶다고 하시네요. 오즈렌 카라만, 소설 속에는 큐레이터를 뜻하는 쿠스토스로 불립니다. 국립박물관 도서관장이자 보스니아 국립대학 문헌정보학과 교수입니다. 참고로 보스니아의 수도가 사라예보죠. 그녀에게 이 일을 소개해 준 아미타이 욤토브, 이스라엘인으로 특수부대 출신이라는 소문이 있는 히브리어 사본 전문가입니다.
이곳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모두 어떻게 하면 여러 종교의 모습이 혼합되어 있을까 ‘하가다’ 의 출처가 너무도 궁금합니다. 시작은 1894년 날짜가 찍힌 판매 영수증을 통해 코헨이라는 사람이 이 책을 판매했다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나 전쟁 중에 사라예보의 유대인 2/3가 학살당했고 코헨이라는 사람을 찾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무슬림 사서가 나치에게서 책을 구했다고는 하지만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고요.
이런 악조건 속에서 보존전문가인 해나는 이 책의 구석구석을 살펴보며 책의 역사를 되감기하게 만듭니다. 어떻게 보존전문가가 역사를 되감냐고요? 여기에서 이 책의 매력이 나옵니다. 하가다는 오래 전에 만들어진 책입니다. 지금이야 인쇄기를 통해 뚝딱 만들어지지만 과거에는 필경사, 제본업자, 금박제작자, 석재연마공 등 수많은 전문가들이 달라붙어야지 한 권의 책이 나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책의 곳곳을 살핀다는 건 책을 만든 수많은 장인들의 흔적을 조사한다는 뜻이고 그를 통해 책의 역사를 알 수 있습니다. 해나는 이 책에서 곤충의 날개, 와인자국, 죔쇠가 있던 자국, 소금, 하얀털을 발견합니다. 참고로 레드바이올린이 시간의 순으로 진행했다면 피플오브더북은 조금 더 복잡합니다. 해나의 시간대와 하가다의 시간대가 번갈아가면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편의상 해나가 발견한 흔적들을 시간 순으로 정리해보았습니다.
1480년, 하얀 털을 통해 이 책의 삽화를 어떤 기법으로 그렸는지 설명하며 어떤 사람이 그렸는지를 말해줍니다. 1492년, 소금물에는 이 책이 역사적으로 어떤 사건을 피해서 어느 지역을 거쳤는지를 알려주고, 1609년의 와인 자국과 1894년의 깃털과 장미 한 송이는 이 책을 소유한 사람들의 슬픈 사연을 들려줍니다. 마지막 1904년의 곤충의 날개는 이 책이 1차 대전이라는 전쟁 통에 유실되지 않을 수 있었던 비밀을 밝혀줍니다.
주인공인 해나가 하가다를 분석하는 모습을 보면 해나가 복원을 반대하고 보존을 강조하는 이유를 알게 됩니다. 어느 정도는 손상되고 닳은 모습이더라도 지난 세대가 건네준 모습 그대로 받아들여야 역사를 더듬을 수 있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 책에 묻은 얼룩을 분석 하면 책이 과거에 어디에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설령 지금의 기술로 알아내지 못해도 100년 뒤에는 가능할 수도 있고요. 하지만 예쁜 복원을 위해서 약품을 사용하고 얼룩을 지우면 거기에 대한 지식을 영영 잃게 되겠죠.
해나가 하가다를 있는 그대로 보존을 한 덕분에 우리는 책 속에 있던 작은 단서들에 담긴 거대한 이야기들을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곤충의 날개랑 1차 대전이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와인 자국에는 어떤 사연이 담겨 있을 거고요. 궁금한가요? 궁금하다면 지금 빨리 이 책을 찾길 바랍니다. 참고로 피플 오브 더 북은 현재 절판이 되어 서점보다는 도서관이나 중고서점에서 찾는 것이 더 빠를 것입니다.
방대한 이야기를 더 듣고 싶다면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이 떠오르네요. 그런데 이 책은 너무 유명해서 많이들 읽어보셨을 것 같아요. 그래서 조금 덜 알려진 책 중에서 ‘시식시종’과 ‘비밀의 요리책’을 추천합니다. 둘 모두 이야기의 힘을 제대로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