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현실과 상상을 넘나드는 두 작품

도서 바람의 화원과 영화 세익스피어 인 러브

by 도서관 옆자리

어렸을 때 읽던 판타지 소설과 비교하면 요즘 판타지 소설은 현실과 밀접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과거 판타지 소설 중에는 용과 요정이 사는 이세계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인간족의 용사가 요정과 우정을 맺고 마족과 전쟁을 하거나, 지구인이 차원이동을 해서 이세계로 옮겨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현실세계에 판타지 요소가 섞이기 시작했습니다. 마법학교의 출입구가 우리가 매일 오가는 교통수단에 숨겨져 있고, 뱀파이어와 늑대인간이 우리와 같은 학교를 다니죠. 과거에는 일방통행이고 일회성이었던 차원이동이 고속도로 톨게이트 정도로 간편해져서 이세계와 현실을 왔다 갔다 하는 판타지도 많아졌습니다. VR게임 등의 설정을 통해서 이세계가 아닌 가상현실을 다루는 현실적인 SF와 판타지의 경계에 있는 소설도 나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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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달리 점차 현실세계와 맞닿는 판타지 소설들 / 표지제공 알라딘


이런 추세는 우리가 현실과 맞닿아 있는 이야기에 더 열광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아무리 말도 안 되는 판타지 소설이라고 해도 일장춘몽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과 이어져 있다고 생각할 때 더 생생하게 느껴지기 때문일 겁니다. 애초에 소설은 참 그럴듯한 허구의 예술입니다. 소설은 현실을 모방하되 그대로 모사하지 않습니다. 소설 속의 세상은 우리의 세상과 닮았지만 허구의 인물과 사건으로 재구성된 세상이죠. 이번 장은 현실과 밀접하게 연관된 허구를 다루는 작품들을 다룹니다. 바로 팩트(FACT)에 픽션(Fiction)을 더 했다 하여 팩션 소설로 불리는 작품 들이죠. 영화, ‘세익스피어 인 러브’와 도서 ‘바람의 화원’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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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화원, 책과 드라마 / 알라딘, SBS 드라마 정보


먼저 바람의 화원입니다. 이정명씨는 사극드라마가 사랑하는 작가입니다. 오늘 소개할 ‘바람의 화원’도 드라마로 나왔는데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 역시 이분의 소설이 원작입니다. 왜 이분의 책이 드라마가 될까 보니 이야기에 추리를 넣어서 재미나게 쓰십니다. 바람의 화원에는 아주 유명한 두 화가가 주인공으로 나옵니다. 바로 김홍도와 신윤복입니다. 이 둘은 왕명에 의해서 미심쩍은 구석이 많은 한 살인사건을 뒤쫓게 됩니다. 신선하지 않나요? 그림으로 유명한 김홍도와 신윤복이 추리를 한다니, 다음 내용이 궁금해서 책장을 넘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가독성이 좋아서 앉은자리에서 두세 시간 정도면 다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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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도 - 해탐노화도, 오주석 작가의 책들(추천합니다!)


그렇다고 이 책이 추리 소설은 아닙니다. 두 주인공이 추리를 하지만, 추리가 바람의 화원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습니다. 바람의 화원의 정수는 바로 옛 그림 해석에 있습니다. 바람의 화원의 주인공인 두 화원은 스승과 제자로 나옵니다. 신윤복이 김홍도에게 그림을 배우다 궁을 나가고, 김홍도의 말년에 둘은 다시 만나게 됩니다. 두 인물이 중심이 되는 만큼 소설 안에는 감홍도와 신윤복의 작품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각 그림에 대하여 왜 이 그림을 그렸고, 그림에 어떤 의미가 숨겨져 있는지를 설명해주죠. 예를 들어 김홍도가 그린 해탐노화도를 보겠습니다. 김홍도는 이 그림을 신윤복에게 그려주며 게와 갈대가 무슨 의미를 설명해주는데 마치 오주석 작가의 책을 읽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람의 화원은 미술관의 초대장입니다. ‘월하정인’과 ‘미인도’에선 깊숙이 숨겨져 있는 감정을 읽기도 하고 ‘대장간’과 ‘무녀신무’, ‘씨름’과 ‘쌍검대무’에선 두 화원의 그림을 비교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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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 - 씨름도, 신윤복 - 단오도


이 책이 흥미로운 두 번째 요인은 책이 품고 있는 상상력입니다. 다빈치 코드가 어째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을까요? 글이 재미있는 이유도 있지만 성배기사단이 지키는 성배가 실은 누가 들어도 깜짝 놀랄 만큼의 존재라고 이야기하기 때문 아닐까요? 그것이 상상에 의한 '픽션'이긴 하지만 흥미롭고 재미있습니다. 바람의 화원도 다빈치 코드처럼 놀라운 상상을 하는 책입니다. 바람의 화원은 신윤복에 대해서 놀라운 해석을 합니다. 신윤복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그림들이 많아 후대로 하여금 어떻게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궁금증을 자아냈을뿐더러, 생애에 대해서 알려진 것이 많지 않아 비밀스러운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서 이정명 작가님이 어떤 해석을 하셨을까요?


제가 궁금증을 최대한 자극하며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 이 해석을 이미 아는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 소설이 2007년, 드라마가 2008년에 나왔고, 같은 년도에 나온 영화 '미인도'도 같은 내용을 다루었죠. 그렇지만 아직 이 해석이 무엇인지 모르신다면 책을 읽고나면 꽤 충격적이게 느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럴듯하고 또 그것이 사실이라고 했을 때 이야기가 너무도 아름답게 슬퍼집니다. 진위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팩션 소설이란 어느 정도 사실에 기반했지만 그것을 가지고 작가가 다양한 상상력을 발휘한 이야기이니까요. 공식적으로는 아니지만 역사적으로 불확실한 사료들을 생각해보면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도 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놀랍습니다. 한 사람이 그린 그림을 가지고 그의 심정을 이렇게 생생히 표현했다뇨. 저는 팩션 소설을 통해 소설의 허구성과 진실성을 생각해봅시다. 소설은 실제 있었던 일을 사실 그대로 기록하지 않습니다.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허구로 창조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했을 것이다’라는 추측만으로 정보를 생산하는 카더라 통신을 보면서 ‘소설을 쓰고 있다’ 고 말합니다. 하지만 소설을 우습게 보면 안 됩니다. 허구로 만들어진 세상이지만 그 안에는 삶의 진실성이 담겨야 합니다. 만약 바람의 화원의 반전이 그저 이야기의 재미만을 위한 장치였다면 제가 이 자리에 소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반전 속에 시대의 한계를 깨기 위해 사투했던 한 천재의 슬픔이 담겨 있고, 그 반전이 우리로 하여금 공감과 깊은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팩션 소설 대표로 이 책을 골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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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익스피어의 여러 초상화

오늘 나오는 두 작품은 인물 선택이 기가 막힙니다. 앞서 바람의 화원은 신윤복이라는 역사적인 위인을 다루면서 대중의 흥미를 쉽게 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음에 올 사람도 만만치 않습니다. 누구냐고요? 바로 대문호 세익스피어입니다. 누구나 그의 이름과 작품을 알지만 세익스피어 또한 생에 대해서 여러 가지 루머가 많습니다.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다는 설도 있고, 여자였다는 설도, 왕족의 사생아였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 세익스피어로 재미난 상상을 한 영화, '세익스피어 인 러브'가 오늘의 추천 영화입니다. 조금 오래된 영화로 1999년도에 나왔습니다. 주인공인 세익스피어 역을 맡은 조셉 파인즈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지만 여주인공은 기네스 펠트로, 악역은 콜린 퍼스, 조연으로 제프리 러쉬와 밴 에플렉, 주디 덴치까지 나옵니다. 그러면 어떤 내용인지 한 번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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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에플렉, 콜린 퍼스, 주디 덴치, 콜린 퍼스, 제프리 러쉬 / 이하 사진은 모두 네이버 영화 제공

엘리자베스 시대, 두 개의 극장이 경쟁을 합니다. 런던 북쪽의 커튼 극장은 유명 배우를 배출하는 등 잘 나가는데 사업가 필립 헨슬로가 강 건너에 지은 로즈 극장은 자금난에 허덕이네요. 얼마나 허덕이는지 로즈 극장의 주인 헨슬로가 고림대금업자한테 고문당하는 게 영화의 첫 장면입니다. 헨슬로는 고문을 받으며 세익스피어에게 희곡을 쓰라고 부탁했으니 곧 돈이 생길 거라 말합니다.


그런데 세익스피어가 쓴다는 글 제목이 어딘가 이상합니다. ‘로미오와 해적의 딸 에델’. 우리가 아는 그 작품인 것 같으면서도 생소하네요. 게다가 세익스피어로 등장한 배우도 우리가 흔히 아는 앞머리가 환한 아저씨가 아니라 젊고 한량 같은 남자입니다. 작품을 위해 뮤즈가 필요하다는데, 술집에서 일하는 매춘부 아프로디테 등 수많은 여성들이 있습니다. 세익스피어가 카사노바형 인물? 우리에게 익숙했던 상상들을 다 깨버리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부터 관객의 궁금증을 사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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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미오와 줄리엣, 아니! 세익스피어와 바이올라


주인공이 나왔으니 이제 여주인공이 나와야죠. 시와 모험, 무엇보다 사랑과 함께 살고 싶은 명문가 아가씨 ‘바이올라 드 레셉스’ 유모에게 진실된 사랑을 외치는 모습이 매우 귀여운 인물입니다. 그런데 방금 전에 등장했던 이 아가씨가 얼마 후 세익스피어의 연극 오디션에 남장을 하고 나와 자신의 이름을 토머스 켄트라고 소개하네요. 주인공과 여주인공이 오디션 무대를 통해 만났습니다. 그런데 여주인공이 남장을 했으니 '커피 프린스'처럼 서로의 정체를 모르는 두 남녀의 러브 코메디를 보여줄까요?


아닙니다. 첫 만남부터 마치 철이 자석에 이끌리듯 세익스피어는 그녀를 향해 달려가는데요 바이올라는 그런 그를 보고 놀라서 무도회가 열리는 자기 집으로 도망갑니다. 그런데 이 장면. 뭔가 익숙하지 않나요? 그렇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첫 만남이 바로 무도회였죠.


11.jpg 운명적으로 사랑을 느끼는 세익스피어와 바이올라


그렇습니다. 이 영화는 로미오와 줄리엣이 써 내려가는 세익스피어의 이야기입니다. 그것도 ‘로미오와 줄리엣이 세익스피어의 경험담이었다면?’ 라는 상상으로 만들어진 이야기입니다. 설정만 들어도 재미있지 않나요? 둘은 사랑에 빠지지만 바이올라는 몰락한 귀족이라 돈 많은 웨식스 경과 원치 않는 혼인을 한 사이입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사랑해선 안 될 두 남녀가 사랑에 빠졌네요. 세익스피어는 바이올라의 관계에서 영감을 얻어 대본을 씁니다. 극장의 수입을 위해서 희극으로 기획했었던 해적왕의 딸은 세익스피어의 마음에 불을 지핀 사건들에 의해서 점차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랑 이야기로 변해갑니다. 제목은 세익스피어와 친구이자 연극에서 머큐시오 역을 맡은 네드가 붙이고 로미오와 줄리엣이 원수가문이라는 건 세익스피어가 아니라 그의 라이벌인 말로*가 술집에서 던지는 설정으로 인해 만들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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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을 맡은 콜린퍼스, 해적왕 대본을 달라 외치는 극장주 제프리 러쉬(a.k.a 캐리비안의 해적, 검은수염)


그럼 혹시 이 영화, 이야기가 로미오와 줄리엣과 다 동일하냐고요? 아닙니다. 그랬다면 시작은 참신했지만 갈수록 뻔한 영화가 되었을 겁니다. 영화 속에는 남장을 한 여자 배우가 등장합니다. 이는 로미오와 줄리엣에는 없는 설정입니다. 그리고 이 설정으로 인해 영화는 위기를 맞습니다. 엘리자베스 시절에는 여자는 공연 무대에 서서는 안 되었으니까요. 이 위기 뒤에 결말은 다분히 영화적입니다. 마치 순정만화의 학예회 편처럼 모든 위기들이 마법처럼 해결됩니다. 갈등을 야기했던 사람들이 우리 편이 되기도 하고, 악역은 권선징악의 철퇴를 맞습니다. 뻔한가요. 그렇지만 만족합니다. 이 이야기는 동화적으로 끝나야 뒤에 오는 슬픔이 좀 잊히거든요. 재미있습니다. 여러가지로 만족스러운 작품입니다. 단 하나 아쉬운 점은 19금이라는 점입니다. 정사씬이 너무 많아요. 편집본이 만들어져서 더 많은 청자들에게 이 작품이 전달되길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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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즈더맨, 이 영화도 세익스피어와 연관이?! / 네이버영화 제공

이 글을 마쳐야 하는 순간이 왔습니다. 영화의 마지막은 엘리자베스 여왕이 세익스피어에게 속삭이는 말을 통해 로미오와 줄리엣이 아닌 세익스피어의 다른 대작품을 연상시키며 끝납니다. 그 작품이 무엇인지 궁금하시다고요? 그렇다면 힌트를 위해서 이 글의 마지막은 영화 쉬즈더맨을 추천하면서 끝마치겠습니다. 세익스피어라는 대가의 고전은 현대식으로 재풀이해도 재미있다는 걸 알려준 영화면서, 재미있는 하이틴 영화를 찾는 분에게 무조건 추천하는 영화입니다.




* 참고로 영화 속에는 역사적 위인이 등장합니다. 크리스토퍼 말로는 세익스피어와 동시대에 살았던 대표적인 극작가입니다. 네이버에 검색을 해보면 사소한 다툼으로 선술집에서 칼로 찔려 죽은 인물로 나옵니다. 세익스피어가 오디션에서 떨어진 소년과 짧게 대화를 하는데 이 어린 소년은 연극은 피가 흘러야 진짜라며 잔인하게도 쥐를 고양이에게 던집니다. 이 소년에게는 결말부에 대사가 꽤 있는데요. 그 이유는 이 소년의 이름이 ‘존 웹스터’이기 때문입니다. 존 웹스터는 2대 비극으로 꼽히는 백마와 몰피 공작부인을 쓴 영국 극작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