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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스텔로 Mar 13. 2023

<사울의 아들>은 윤리적인 영화인가


<사울의 아들>은 윤리적인 영화인가



실제 일어났던 비극의 역사를 스크린에 옮길 때면 언제나 윤리의 문제가 대두된다. 이 윤리의 문제는 대개 서사보다는 형식, 즉 참혹한 비극의 역사를 영상언어로 사려 깊게 재현할 수 있는가에 초점을 둔다. 이러한 논의는 실제 일어난 비극을 영화적 허용을 핑계 삼아 하나의 스펙타클 또는 오락적 요소로 전락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절대 명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는 대개 피사체를 담아내는 카메라가 항시 윤리의 카메라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간과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때로 카메라는 미적이고 감각적인 묘사를 위해 본질은 발라낸 채 화려하고 유려한 이미지를 느닷없이 강조함으로써 대상을 착취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라즐로 네메스 감독은 좌우가 댕강 잘린 4:3의 화면 비율과 흐릿한 초점, 주인공만을 따라가는 카메라 워크를 극단으로 밀어붙여 참혹한 실제의 이미지를 단순히 소비하고 전시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이러한 형식적 선택은 <사울의 아들>이 겉보기에 여타의 아우슈비츠 영화들보다 윤리적으로 더 우월한 것처럼 보이게 한다. 하지만 선한 동기가 항상 선한 결과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감독의 사려 깊고 신중한 태도를 폄하할 생각은 없지만 그의 선택으로 만들어진 결과가 정말 윤리적인가에 대해선 일견 고개를 젓게 된다. 나는 이 영화를 파격의 영화라 칭할 수는 있겠으나 윤리적인 영화라고 말하진 못하겠다.


보이지 않은 것은 정말 보이지 않는 걸까


흔히 윤리적 재현은 우리에게 참혹한 살육의 장면, 널려 있는 시체들을 위시한 비극적 이미지를 똑바로 담아내선 안 된다고 명령한다. 하지만 보이지 않은 것은 정말 보이지 않는 걸까. 언덕이나 구덩이 같은 지형 혹은 특정 물체나 인물, 아니면 안개나 연기 따위에 의해 아예 가려져 있거나 어두운 환경 탓에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우리는 결국 볼 수밖에 없다. 아니 보기를 강요당할 수밖에 없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프레임 안에 담지 않는 것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에서 보여주지 않는 것은 사실상 하나도 없다. 흐릿하게 표현될 뿐 우리는 생각보다 선명하게 대상을 포착한다. 외려 흐릿한 화면은 자신을 봐달라는 듯 더 매혹적이다. 아예 보이지 않거나 아예 또렷하게 보이는 것보다 보일 듯 말 듯 줄다리기를 하는 편이 사람 마음을 더 애타게 만드는 법이다. 그런 탓에 카메라의 가장 핵심적인 피사체인 ‘사울’보다 외려 그 바깥에서 은밀한 관음증적 욕망을 부추기는 흐릿한 화면에 더 눈길이 간다. 심지어 외화면에서 들리는 비명소리, 거친 숨소리 등의 사운드는 흐릿하게 처리되었지만 명백하게 존재하는 그 소리의 근원지를 보고야말겠다는 욕망을 더욱 증폭시킨다. 이런 관음증적 욕망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음을 자각하게 된 순간, 그리고 이를 토대로 머릿속에서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다는 것을 체감한 순간, 나는 이 영화가 윤리적인 영화가 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 판단을 더 확고하게 만들어 준 건 영화 후반부의 특정 장면이다. 사울은 자기 아들의 장례를 제대로 치러주기 위해 다른 수용소의 포로들이 처형장으로 향할 때, 그 대열에 있을지 모를 랍비를 애타게 찾아 나선다. 그 과정에서 사울은 포로들이 뜨거운 불길과 과격한 총성 사이에서 보잘 것 없이 죽어나가는 모습을 본다.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든 끔찍한 살육의 현장이다. 대개 인물들은 실루엣으로 처리되었지만 간헐적으로 보이는 또렷한 피부와 얼굴의 형태, 그리고 총에 맞아 맥없이 쓰러지는 명확한 형상들은 이 영화가 추구하고자 했던 그간의 윤리적 선택들을 뒤집는다. 특히 이 광경 사이에 삽입된 사울의 시점 쇼트는 랍비를 찾는 데 급급하여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였어야 함에도 긴 시간 당당히 멈춰 서 있다. 여태 자신의 목적-아들의 장례-을 위해 다른 포로들의 고통을 회피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던 사울의 행동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순간이다.


카메라는 무엇을 담당하는가


이 영화에서 기술적으로 한 가지 더 의문스러운 것은 카메라의 기능이다. 영화 속에서 철저히 일인칭 시점으로 움직이는 핸드 헬드의 카메라는 처참하게 죽어나가는 다른 인물들에게는 무관심한 듯 오로지 사울의 외관만을 줄곧 따라간다. 이때 카메라의 시점은 곧 사울의 시점이 되고 더 나아가서 관객의 시점이 된다. 카메라와 사울, 그리고 관객의 시선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결국 사울의 윤리적 선택은 감독이 관객에게 요구하는 윤리적 책무가 된다. 하지만 사울은 아들의 장례를 치른다는 개인적인 목표를 위해(종교적으로는 더 큰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만) 단 한 번의 기회밖에 없는 부역자들의 봉기를 방해한다. 물론 사울의 행동이 영화적으로 더 큰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일종의 거대한 은유라는 것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카메라는 그 은유에 매몰되어서 다른 이의 죽음과 고통, 그리고 슬픔에는 전혀 애도를 표하지 않는다. 왜 카메라는 줄곧 사울만 따라다녀야 하는가. 나는 이 물음에 답을 찾을 수 없다. 거대한 은유적 표현으로서 사울의 선택이 진정 관객들이 행해야 할 최선의 가치라고 얘기하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더욱 실망할 수밖에 없다. 사울의 행위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든 간에 아무쪼록 그의 행동에는 어떠한 현실적 감각도 담겨 있지 않다. 아니, 어쩌면 이렇게까지 말할 수 있다. 극단적인 종교적 믿음 때문에 다른 부역자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울의 메커니즘은 우생학적 믿음을 극단으로 밀어붙여 다른 인종들을 탄압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던 나치의 메커니즘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고.


한편으론 카메라와 사울 사이의 물리적 거리를 좁혀 화면에 담기는 비극적 이미지의 양을 최소화시키고 싶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하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독일 의무관이 사울의 아들을 질식사시키는 장면이나 위에 서술한 바 있는 집단 처형 장면을 똑바로 직시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결국 이 영화에서 카메라는 흔히 상업 페이크 다큐멘터리 영화가 편의적으로 취하는 방식과 똑같이 오직 현장의 생생함을 살리기 위한 수단으로 기능한다. 위 아래로 떨리는 화면을 통해 상황의 긴박함과 인물 내면의 긴장감을 표현하는 일반적인 핸드 헬드 카메라의 효과를 그대로 활용한 것이다.


강렬한 체험의 감각


윤리적 재현을 제외하고 <사울의 아들>에서 감독이 이룩하고자 했던 또 하나의 목적은 아우슈비츠의 잔혹한 노역 현장을 극장의 관객들에게 체험시키는 것이다. 이 체험은 관객에게 도덕적 각성과 인간성 회복을 요구하고 인간다운 것에 대한 사유를 길어 올린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이 체험의 감각은 처음 감독이 윤리적 재현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선택했던 형식들과 양립할 수 없다. 왜냐하면 체험은 기본적으로 보여주지 않고서는 불가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4:3의 화면 비율과 흐릿한 화면이 감독이 원했던 태초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했다면 체험의 감각은 만들어 질 수 없다. 그러나 <사울의 아들>은 어떤가. 마치 내가 아우슈비츠의 노역 현장에 있었던 것 같은 강렬한 체험을 선사하지 않는가. 좌우가 잘려 나갔지만 여전히 유효한 정보들과 흐릿하면서 동시에 선명한 화면은 관객의 상상력을 더 증폭시켜 외려 체험의 감각을 더 실감나는 수준으로 끌어올린다.


나는 <사울의 아들>이 이렇게 무리한 형식적 선택을 하지 않았어도 충분히 좋은 영화가 되었을 거라고 믿는다. 카메라의 현장감을 바탕으로 사실적인 세트와 섬세한 시각 효과 그리고 시기와 상황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의상과 분장 등의 미장센은 참혹한 아우슈비츠의 노역 현장을 사실적으로 재현할 수 있는 탁월한 원료들이다. 하지만 윤리적 재현이라는 거대한 바리케이드를 넘어가기 위해 선택한 형식적 장치들이 외려 영화를 지나친 형식과 남용된 기술로 치장되게 만들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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