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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스텔로 Mar 13. 2023

<봄날은 간다>, 죽음은 언제나 우리를 보고 있다


죽음은 언제나 우리를 보고 있다



한 번도 죽음을 직시해본 적 없는 사람 앞에 죽음이 코앞까지 걸어온다면, 그는 어떻게 반응할까. 크기가 커진 사랑이 반대편에 서 있는 죽음을 볼 수 없도록 시야를 가리고 있다면, 어느새 자기 앞에 당도한 죽음이란 존재를 그는 무엇으로 밀어낼 수 있을까. <봄날은 간다>는 절절한 사랑 이야기를 원료 삼아 사랑과 죽음의 관계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흔히 사랑과 죽음이 정반대편에 서서 그저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허진호 감독은 죽음의 감각을 사랑의 순간 곳곳에 틈입시킨다. 아마도 그는 사랑이라는 관념 안에 죽음의 감각이 혼재되어 있다고 믿는 것 같다.


죽음을 경험해 본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상우와 함께 녹음한 대숲 소리를 은수가 라디오로 흘려보낸다. 방금 전까지 몇 번째 소리가 더 좋은지 상우와 실랑이를 벌이던 은수는 그의 말에 따라 세 번째 소리를 튼다. 깨끗하고 맑으면서도 거침없는 대숲 소리가 둘의 마음을 대변하듯 사랑스럽게 퍼져나간다. 은수는 부스 바깥에 앉아 있는 상우에게 세 번째 소리를 틀었다며 손짓하고 웃는다.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상우도 히쭉히쭉 웃는다. 얼핏 보기에 사랑에 빠진 남녀의 마음을 은은히 드러내는 멜로 영화의 전형적인 장면처럼 보이는 이 장면은 곱씹을수록 위압적인 느낌을 준다. 카메라는 50초가 넘어가는 긴 시간 동안 상우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줄곧 은수만을 담는다. 흐릿하게 표현되는 상우는 은수를 보려고 고개를 돌릴 때 비로소 막에 비친 얼굴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프레임 안에서 철저히 소외당하고 더 높은 곳에서 그를 내려다보는 은수의 시선만이 강조된다. 앞으로의 긴 사랑의 시간 동안 그녀가 상우 위에 위치해 있다는 것을 시각적으로 설명한 셈이다. 그렇다면 은수는 무엇 때문에 상우의 위에 서 있는 걸까. 은수는 상우에게 한 번 결혼해 본 적이 있다고, 아니 한 번 이혼해 본 적 있다고 고백한다. 이 담담한 고백은 이후 “나 김치 못 담가”라는 처연한 고백으로 바뀐다. 사랑이면 다 되는 줄 알았던 상우는 사랑의 죽음(이혼)을 경험해 본 적 있는 은수로부터 죽음의 가능성을 차단당한다. 죽음에 무지한 상우는 이런 은수를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은수는 순수한 사랑을 믿는 상우에게 사랑이 죽게 되었을 때의 아픔을 전해 주고 싶지 않다. 그녀는 상우에게 사랑의 죽음을 미리 직시해보라는 듯, 한 달간 연락하지 말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그는 이를 극복하지 못한다.


언뜻 보기에 이 영화는 상우의 감정을 따라가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주인공인 상우를 뒤따르는 건 서사 전개에 있어 당연한 얘기일지 모른다. 하지만 위에 언급한 녹음 부스 장면을 비롯한 몇몇 주요 장면들에서 감독은 주인공(상우)의 감정을 배제시킨다. 은수가 다른 남자와 걷는 장면을 목격한 상우가 완전히 만취한 상태로 은수 집을 찾아가 우는 장면이 그렇다. 보통의 멜로 영화였다면 자신의 연인이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배신감에 완전히 길을 잃은 상우의 슬픈 감정을 더욱 깊게 들여다보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오히려 눈물 흘리며 매달리는 상우를 저 멀리 방으로 보내 침대에 엎드리게 만든다. 그의 얼굴은 전혀 보이지 않고 울음소리만 가득한데 반대로 은수의 얼굴은 고스란히 화면에 드러난다. 그녀는 죄인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힘없이 바닥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 꽤 오래 지속되는 쇼트는 외려 상우의 울음보다 은수의 속앓이에 더 주목해주길 바라는 듯 간절하다. 결국 <봄날은 간다>는 실연의 아픔을 극복해 나가는 한 남자의 성장담이 아니라 연인을 밀어낼 수밖에 없는 한 여자의 가슴 아픈 선택에 대한 이야기인 셈이다.


과연 우리는 온전히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운전석에 같이 앉아 차를 몰며 위험한 데이트를 하던 은수와 상우가 산 속 어느 강가에 내린다. 앞에는 두 고인의 공동묘지가 놓여 있다. 은수가 묻는다. “우리도 죽으면 저렇게 같이 묻힐까?” 상우의 팔을 꼭 잡으며 사랑스럽게 묻는 은수의 이 질문에는 어쩐지 섬뜩함이 묻어 있다. 죽고 난 후에도 서로 옆에 있자는 낭만 섞인 제안인 동시에 벌써 죽는 순간을 상정하고 있음을 여실히 드러내는 말이기 때문이다. 상우는 어떠한 대답도 하지 못한다. 아니, 상우는 대답을 할 수가 없다. 그는 아직 죽음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이 순간은 훗날 카페에서 재회한 상우에게 은수가 “기억나?”라고 묻는 장면에서 다시 복기된다. 은수는 무엇을 묻고 싶었을까. 사랑했던 순간의 조각들을 전부 기억하는지 묻는 것일까. 은수는 분명 긴 시간 떨어져있으면서 상우가 사랑은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는지 알아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질문은 일종의 취조이자 바람이다. 그리고 고백이다. 싸늘하게 변한 상우의 표정을 보고 은수는 외려 그와 다시 만나고 싶어 한다. 은수에게 사랑은 죽음을 덮고 있는 거대한 외피 같은 것이고 상우는 그런 죽음을 인지하게 되었다. 이제 그는 누군가를 사랑할 자격이 생긴 것이다. 은수는 그런 상우에게 다시 시작하려는 듯 “같이 있을까?” 묻는다. 하지만 상우는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의 죽음을 직시하게 되었기에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는 그녀의 사랑을 밀어낸다.


상우는 두 번의 죽음을 경험한다. 하나는 사랑의 죽음이고 또 하나는 생의 죽음이다. 상우는 할머니의 죽음을 지켜본다. 할머니는 수색역에서 끝없이 현재와 이별하는 기차를 바라보면서도 이미 죽고 없는 남편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인물로 후반부 상우의 모습과 닮아 있다. 물론 할머니는 치매 환자이기 때문에 남편이 죽었다는 사실을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잊어버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할머니는 치매라는 병과 상관없이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난 이후에도 그를 떠나지 못했다. 그리고 그와 사랑했던 어린 날의 추억과 그 추억 속 남편의 모습을 버리지 못했다. 처음에 상우는 그런 할머니를 이해하지 못한다.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운 할아버지를 왜 그렇게 기다리는 걸까. 하지만 은수와의 이별을 통해 상우는 할머니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의 처지와 너무 꼭 닮은 할머니에게 상우는 급기야 이제 정신 좀 차리라며 버럭 화를 낸다. 그 말이 효과가 있었던 걸까. 죽는 순간에 할머니는 실연의 아픔을 감내하고 있는 상우에게 “버스하고 여자는 떠나면 잡는 게 아니란다”라며 위로한다. 상우가 그간 봐왔던 할머니의 행동과는 완전히 대치되는 말이다. 이는 사랑과 생의 죽음 모두를 외면하는 것처럼 보였던 할머니가 사실은 누구보다도 죽음을 인정하고 있었다는 새로운 진실을 알려준다. 상우는 그런 할머니를 보고 은수와의 사랑은 이제 끝났다는(죽었다는) 것을 마침내 인정하게 된다. 그는 같이 있자고 말하는 은수에게 도로 화분을 돌려주며 벚꽃처럼 짧았지만 그만큼 아름다웠던 사랑에 마침표를 찍는다.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면 머릿속에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과연 우리는 사랑 또는 생의 죽음을 온전히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상우 할머니는 내면에 자리한 진실과는 달리 자신을 찾아온 남편의 불륜녀와 만나려 하지 않았고 사과 또한 거절하였다. 은수 역시 방송국에서 종이에 손이 베이자 상우에게 배운 민간요법을 실시하며 다시금 사랑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런 점에서 상우의 사랑도 표면적으로만 끝났을 뿐 본질적으로 끝났다고 단언할 수 없다. 상우는 이제 사소한 자연의 소리만 들어도 필히 은수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아니, 어쩌면 어느 한 건물 구석에 비치된 소화기만 봐도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릴지 모른다. 처음 은수와 같이 갔던 대나무 숲의 아름다운 자연 소리를 재현하는 듯한 결말부 보리밭의 황홀한 소리는 끝내 상우의 내면을 어지럽힌다. 결국 그 순간, 상우는 다시 사랑의 죽음을 외면하게 된다.


달라지는 풍경 속에서도 기차는 같은 자리를 계속 맴돈다. 불현듯 찾아오는 어떤 기억은 정차와 출발을 반복하는 기차처럼 끝없이 우리의 머릿속에 잠시 머물렀다 떠나기를 반복한다. 주르륵 내리는 비가 멀리 떨어져 있는 서로에게 그래도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음을 환기시키는 희망의 연결고리가 되기도 하고 이별의 가락을 아프게 연주하는 아르페지오네가 되기도 하듯이 우리 머릿속을 드나드는 기억이 어떤 감정을 갖고 있을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상우가 마당에 소복이 쌓인 눈에 첫 발자국을 새기며 신난 얼굴로 대문을 나서던 것처럼 봄날의 낭만은 언젠가 다시 찾아온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봄날 뒤편에 쓰라린 죽음의 여운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제 우리는 죽음을 보고 있다. 죽음을 보고 있기에 죽음에 다가갈 수도 있다. 왜인지 다음의 봄날은 더 환하고 아름다울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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