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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스텔로 Mar 15. 2023

<본즈 앤 올>, 비극적 운명에 저항하기


비극적 운명에 저항하기



살면서 가장 어려운 일은 자신의 운명을 거부감없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욕망이라는 동기가 생성되기도 전에, 가치 판단이 불가한 순간에 불쑥 세상에 던져졌다. 성별, 가족, 재능, 재력, 외모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구성하는 수많은 요소는 우리의 선택 밖에서 무작위적으로 선별된 것들이다. 그것이 만족스럽든, 불만족스럽든, 거룩한 운명이든, 하찮은 운명이든 한번 정해진 것은 돌이킬 수 없다. 성별이 여자인 것이 못마땅하고, 폭력적이고 가난한 부모 밑에서 자란 것이 일생의 불행이며, 도무지 재능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평범함과 초라한 용모가 한이지만, 이 어쩔 수 없는 비가역성은 타인이 개입할 수 없는 개인의 문제에 국한된다. 우리는 타인의 운명에 대해, 그리고 타인은 나의 운명에 대해 결코 신경 쓰지 않는다. 그렇게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을 받아안고 어느새 그것의 의미와 가치를 온전히 인지하게 되는 순간, 충족되지 않은 것을 채우려는 욕망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모든 개인이 각자의 욕망을 추동하면서 내면은 얼룩지고, 관계는 균열이 나며, 사회는 복잡다단해진다. 얽히고설킨 욕망들이 충돌하는 가운데 운명에 굴복한 사람들은 종국에 사회에서 소외되고 만다.


그러나 진짜 비극은 물려받은 운명이 사회의 통념, 그리고 도덕과 윤리에 위배될 때다. 그 예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공감과 감정의 기능을 담당하는 전두엽의 기능이 선천적으로 퇴화한 사람들을 우리는 사이코패스라고 부른다.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고 두려움과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이코패스들은 그 특성 때문에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상대를 통제하고 실속만 얻으려 하며, 극단적인 경우에는 극악무도한 연쇄살인마가 되어 사회를 공포에 잠식시킨다. 여기에 자신의 죄를 인지하면서도 죄를 저지르고, 공감하지 않아도 공감하는 척 연기하는 소시오패스도 존재한다. 특기할 만한 점은 사이코패스보다 더 부정적인 것으로 알려진 소시오패스 성향의 사람들이 100명 중 4명꼴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만약 이런 성향의 사람들이 폭력에 노출된 채 자랐거나, 그러한 트라우마에 잠식되어 있다면, 이후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은 급격하게 커진다.


유전적인 요소와 환경적인 요소가 결합될 때, 그 위력은 개인의 통제권을 상회한다. 식인 성향을 운명으로 물려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본즈 앤 올>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정체성을 찾는 과정에 있는 소녀 ‘매런’과 그녀의 남자 친구 ‘리’는 식인이라는 끔찍한 본성을 운명으로 물려받은 뒤, 각각 어머니와 아버지의 식인 행위를 직접 목격한 자들이다. 두 사람은 끔찍한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어쩔 수 없이 사람을 죽이고 시체를 파먹는 잔혹한 행위를 해야만 한다.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는 인간 사회의 가장 강력한 법적 질서는 이들 앞에서 무용하고, 이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지 불분명하다. 설사 사람을 먹는 ‘이터’들에게 막심한 책임이 있다 하더라도 그들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것은 무리한 요구처럼 보인다.


인간을 먹어야 하는 기구한 운명을 가진 사람에게 가능한 최선의 윤리적 선택은 이미 죽은 사람을 먹는 것이다. 그러나 끼니를 해결할 때마다 죽은 사람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그 다음은 방관이다. 죽을 위기에 처한 사람이 그대로 죽기를 관망하는 것. 매런이 설리반을 처음 만났을 때 설리반이 하던 행동이다. 그러나 위의 두 가지 윤리적 카니발리즘은 아주 제한적이고 일시적이다. 그런 상황은 운 좋게 주어지는 것이지 마법처럼 매번 만들어낼 수 없다. 그러니까 결국 이터들은 사람을 죽일 수밖에 없다. 사람을 죽이고 시체를 먹어야 한다.


이 논리적 정당성에 제어를 거는 인물은 매런이다. 그녀는 아버지의 보살핌 덕분에 오랫동안 식인을 하지 않았다. 그런 경험으로 말미암아 그녀는 굳이 사람을 먹을 필요가 없다고 믿는다. 말하자면 그녀는 운명을 정면으로 거스르려 하는 영웅이다. 그 반대편에 리와 설리반이 있다. 두 사람은 매런과 달리 식인이라는 본성에 순응하며 각자의 원칙에 따라 최선의 윤리적 카니발리즘을 행한다. 리는 인격이 떨어지는 미숙한 자들을 먹고, 설리반은 죽어가는 사람을 기다렸다가 마침내 의식을 잃으면 그 시체를 먹는다. 두 인물은 용인될 수 없는 일에 최소한의 윤리를 실현한다는 점에서 닮았지만, 여기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설리반은 ‘설리반’이라는 본명을 놔두고 자신을 ‘설리’라고 부른다. 달리 말하면, 그는 물려받은 설리반이라는 운명 대신 추후에 친구들에 의해 새롭게 만들어진 ‘설리’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규정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노년의 설리반에게 운명은 이미 희미해질 대로 희미해져 사실상 지워진 것과 다름없다. “우리 안에 있는 게 뭐든 먹여야 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 설리반은 식인이라는 운명을 자신의 자유 의지로 착각하고 사는 기만자다. 그는 죽어가는 사람을 관망하는 방식으로 식인을 하며 최소한의 윤리를 실현하지만, 여기에는 그러고 싶지 않은 감정에서 기인하는 탄식이나 죄책감 같은 맥락이 없다. 한 마디로 그는 이 운명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다. 그는 자기만의 원칙을 세워 놓고 그 안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자다. 그러니 그의 입장에서 운명을 거스르려고 분투하는 매런의 자유 의지는 그간의 자기 삶을 부정하는 사악한 행위인 셈이다. 설리반이 매런을 죽이려고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연유 때문이다.


반대로 리는 자유 의지가 거세된 철저한 운명론자다. 그는 가혹한 운명의 진흙탕에서 허덕이다가 끝내 주저앉고 만 패배자다. “먹거나, 자살하거나, 너희 엄마처럼 갇혀 사는 거야.”라는 그의 대사는 타인을 먹는 것이 현재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변명을 무기력하게 드러낸다. 그래서 그의 내면에는 헤아릴 수 없는 죄책감과 분노, 슬픔, 안타까움, 공허함 등의 깊고도 다양한 감정들이 소용돌이처럼 뒤섞여 있다. 그런 점에서 리가 매런과 함께 설리반을 살해하는 장면은 다분히 상징적이다. 무력하게 운명에 순응하며 살던 리가 설리반이라는 운명의 기만자를 처단하는 것은 그가 매런처럼 운명에 굴복하지 않고 살겠다는 의지를 적극적으로 표명하는 행위다.


영화에서 유일하게 내적 변화를 겪는 인물인 리는 비극적이게도 변화의 시발점에서 죽고 만다. 이때 흥미로운 것은 리의 죽음의 과정이 위에도 언급한 바 있는 그의 대사 “먹거나, 자살하거나, 너희 엄마처럼 갇혀 사는 거야.”를 하나씩 이행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타인을 먹으며 살던 리는 매런과 사랑에 빠지면서 운명에 대한 시각을 바꿔 어느 소박한 집에 갇혀 살듯 지내다가, 설리반의 칼에 찔린 후에는 자신을 먹어달라는, 사실상 자살과 다름없는 부탁을 매런에게 요구한다. 칼에 찔리긴 했지만, 당장 생을 마감할 정도의 치명상을 입은 것은 아닌 리가 의사에게 가지 않고 매런에게 자신을 먹어 달라고 부탁한 것은, 어쩌면 식인을 하지 않는 생활, 즉 운명을 거스르는 일을 그만 중단하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본다면 그가 매런에게 자신을 먹어 달라고 부탁한 것은 그녀에게 다시금 이터로서의 운명을 받아들이라고 암묵적으로 조언한 것이다. 언제까지나 숨어 지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매런은 리의 간곡한 부탁을 들어준다. 그녀는 그의 살아 있는 몸을 먹어 치운다. 그렇다면 이제 매런은 다시 식인 본성을 발현하며 살게 되는 걸까. 그러나 물려받은 운명론적 자아와 새롭게 확립해가는 자유의지론적 자아를 구분하지 않으려는 처절한 윤리 의식을 지녔던 매런이 쉽게 변화할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영화는 이후의 매런의 삶을 조금도 보여주지 않기에 그 어떤 것도 예측할 수 없다. 시간이 흘러 그녀가 제2의 설리반이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여기서 확실한 건 그녀의 삶이 비극적이라는 것뿐이다. 태어난 순간 그녀의 삶은 비극으로 점철될 운명이었다. 그렇다면 그런 그녀에게 우리는 어디까지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그녀는 좌우지간 사람을 죽이고 시체를 먹은 반인륜적 존재 아닌가. 이 어려운 문제는 우리 삶과 연계하여 적용하면 더욱 까다로워진다. 사이코패스 혹은 소시오패스에게 우리는 어디까지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그들이 저지른 이기적 행동, 차가운 태도, 타인을 통제하는 행위, 극단적으로는 범죄에 이르기까지. 행동의 결과는 분명하게 존재하지만, 그에 대한 책임은 분산될 수밖에 없는 미궁 같은 구조 속에서, 매런과 리처럼 사랑만으로 이 복잡함을 돌파할 수 있을까. 사랑은 분명 초월적인 면이 있고 무엇보다 숭고하고 아름답지만 현실적이지는 않다. 적어도 사랑이 이에 대한 해결책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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