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코스텔로 Mar 18. 2023

<베니스에서의 죽음>, 욕망과 불안의 종착지


욕망과 불안의 종착지



영화는 어둠에서 시작한다. 이내 화면은 조금씩 밝아지지만 여전히 어둠의 지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 희미한 빛 너머로 잔잔히 일렁이는 바다가 보인다. 계속되는 어둠 속에서 우리는 화면이 감추고 있는 저 아름다울 바다를 기어이 보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어느 증기선이 내뿜는 시커먼 매연이다. 그렇게 탐미에 대한 우리의 욕망은 짓밟힌다. 매연의 잔영을 남긴 채 유유히 화면에서 사라지는 증기선에는 쇠약한 한 남자 아센바흐가 앉아 있다. 그는 그곳에서 매연 없는 청량한 바다를 관망하지만 이내 불길하게도 잠의 유혹에 빠진다. 마치 죽음의 유혹에서 버텨내기라도 하듯 그는 악착같이 잠과 싸운다. 그가 증기선에서 곤돌라로 갈아타기 전까지 영화는 베니스의 아름다운 바다와 근사한 건축물을 매연의 위력과 이를 뿜어내는 가공할 소리들과 겹쳐놓는다. 미와 추가 공존하는 화면. 이제 우리는 이 화면의 무덤에 갇힌 채, 미와 추 사이의 충돌과 그로 인한 불안과 혼란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에 맞장구치듯 하얗게 분칠한 남자가 조롱하듯 아센바흐를 맞이한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그의 친절한 인사말은 그 이면에 즐길 수 없는 파멸의 시간이 매복하고 있는 듯 불길하다. 그 불쾌한 매혹이 우리를 다음 쇼트로 이끈다.


곤돌라로 갈아탄 아센바흐는 ‘산 마르코’에 가기 위해 사공에게 증기선 부두로 가달라 요청하지만 사공은 증기선은 여행 가방을 실어주지 않는다며 이를 매몰차게 거절한다. 자신의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아센바흐는 큰 소리로 화를 내며 증기선 부두로 갈 것을 재차 요구한다. 하지만 표면의 분노와 달리 그는 어린 아이처럼 가슴팍 언저리에 지팡이를 밀착시킨 뒤 이를 불안한 듯 만지작거린다. 시선은 갈피를 못 잡고 끊임없이 헤맨다. 그 순간 카메라는 그의 얼굴로 서서히 줌인해 들어간다. 카메라가 부각시키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방황하는 아센바흐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것, 비스콘티는 지금 ‘불안’을 찍고 있다.


아센바흐가 베니스의 리도 섬에 도착한 이후부터 영화는 본격적으로 불안에 천착한다. 곤돌라 장면에서의 불안은 순간의 것이었으나, 이후 펼쳐질 불안은 보다 근원적이고 지속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 불안을 태동시키고 있는가.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비스콘티는 이에 대해 한 가지 암시를 던진다.



호텔방으로 들어온 아센바흐는 짐 정리를 마치고 창을 열어 바깥 전망을 바라본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보고 있는 전망을 똑같은 조건에서 보지 못한다. 전망과 카메라 사이에는 답답하게도 창틀이 놓여 있다. 도대체 창틀 너머의 저 전망은 어떤 모습일까. 직전에 호텔 직원이 한 말 “이 방은 전망이 아주 좋습니다.”는 그 궁금증을 더 증폭시킨다. 우리가 아름다운 전망을 보고 싶은 욕망으로 꿈틀거리고 있을 때, 카메라는 조금만 기다려보라는 듯 전망을 바라보는 아센바흐의 뒷모습을 향해 천천히 줌인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 카메라는 그의 뒷모습이 아니라 그 너머 ‘베인즈 호텔’의 푯말을 잡은 것이었다. 이 줌인의 기계적 속성, 그리고 이때 특히 강조되고 있는 느리고 부드러운 속도감을 매개로 영화는 돌연 병약해진 아센바흐의 육체를 포착한다. 우리가 보고 싶었던 것은 아름다운 전망이었거늘 정작 화면을 가득 메우는 건 병세와 싸우고 있는 추한 중년의 육신이다. 비스콘티는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것-아름다움-에 대한 욕망과 그 간절한 시선을 유도해 낸 다음 그것의 실현 불가능성을 넌지시 암시하고 있다. 이로써 미는 욕망으로는 가질 수도 닿을 수도 없는 신비의 개념이 된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미에 대한 일차원적인 욕망을 버리고,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그 신비가 우리의 욕망과 어떻게 관계 맺는지, 그리하여 우리는 어떤 상태에 이르게 되는지 살펴야 할 것이다.


이후, 우리는 아센바흐가 그와 같은 호텔에 머무는 미소년 파지오를 보고 그 아름다움에 탄복하는 순간을 목도한다. 그리고 이 강렬한 스파크가 구심점이 되어 그 자장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원심력의 시도를 끝없이 무화하는 과정을 보게 된다. 파지오에게 더는 접근해선 안 된다는 이성적 판단과 도덕적 원칙은 끝없이 흔들리고, 아센바흐의 내면은 그에 대한 감각적 이끌림으로 충만해진다. 여기에는 두 가지 층위의 욕망과 이를 통해 배태된 두 가지 불안-예술가로서의 불안과 성적 불안-이 존재한다. 영화는 점차 죽음의 늪에 침전하는 아센바흐의 육체의 물성을 통해 이 두 가지 불안을 처절하게 형상화한다.


식사를 하면서 파지오를 계속 훔쳐보던 작곡가 아센바흐는 동료 알프레드와 나눴던 과거 대화를 떠올린다. “자네는 정말 아름다움이 노력의 산물이라고 믿나?” 알프레드가 묻는다. 그러자 아센바흐는 “그래, 그렇게 믿어.”라며 딱 잘라 답한다. 하지만 파지오의 아름다움을 목격한 아센바흐의 모습은 어떤가. 그의 예술관에는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그간의 믿음과 달리 그는 선천적 아름다움에 감화되어 감각의 위대함을 깨닫고 인간은 결코 감각을 지배할 수 없음을 인정하게 된다(파지오가 어른이 아니라 소년으로 제시된 것은 노력이 가미되지 않은 순수한 미적 존재를 상정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런 연유로 그는 후반부에 이르러 무대에서 청중들에게 잔혹한 야유를 받았던 과거를 떠올린다. 이제 그는 자기 예술관의 종말을 받아들여야 하는 위기의 순간에 봉착해 있다. 그는 절제와 이성을 중시하는 아폴론적 예술관에서 무절제와 도취적 경향의 디오니소스적 예술관으로의 이행을 용인해야 한다.



한편, 파지오에 대한 아센바흐의 욕망은 미적인 것에만 머물지 않고 성적 충동과도 연관되어 나타난다. 아센바흐는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를 연주하는 파지오를 보며, 과거 사창가에서 육체적 관계를 맺고자 했던 여인을 떠올린다(그러나 우리는 이 장면에서 아센바흐의 성적 충동과 욕망의 해소만 볼 뿐이다. 이후, 여자의 무미건조한 얼굴과 가지 말라는 듯 매달리는 손을 봤을 때, 두 사람의 육체적 관계는 실패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지금 파지오의 육체를 탐하고 있다. 그러나 영화는 사창가 여자와의 관계 실패를 통해 파지오와의 관계 불가능성을 암시한다. 어린 소년인 파지오와 중년인 아센바흐의 육체 사이에서 촉발되는 관계의 부적합성(그는 심지어 유부남이며 슬하에 딸도 있었다). 더욱이 동성애라는 코드. 아센바흐는 이 거대한 사회적 규범을 돌파해야 한다. 이때 그의 딜레마를 더욱 심화시키는 요소는 파지오로 대변되는 아름다움의 동태적 면모다. 파지오는 고혹한 눈빛으로 아센바흐를 쳐다보고, 심지어 극의 중반부에서는 모래사장에 세워진 사각 기둥 사이를 안무를 추듯 유려하게 움직이며 매혹적인 자태를 뽐낸다. 그러나 아센바흐의 접촉은 기어코 허락할 수 없다는 듯 화면 밖으로 달아나 애를 태운다. 이 거부할 수 없는 유혹 앞에서 어느 누가 괴롭지 않을 수 있을까.


이제 아센바흐의 욕망은 광기의 수준으로 격상된다. 그는 호텔 지배인을 통해 베니스에서 콜레라가 퍼지고 있어 관광객들 몰래 곳곳에서 소독 작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이에 그의 머릿속에서는 파지오와 그의 가족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도덕적 판단이 이뤄지고 있다(이때 카메라는 마치 그의 머릿속을 찍으려는 듯 유려하게 줌인을 구사한다). 하지만 그 도덕은 현실에서 실행되지 않는다. 콜레라가 퍼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알게 된다면, 마음을 뒤흔든 사랑의 대상 파지오도 이곳을 떠날 것이다. 아센바흐는 파지오가 콜레라에 걸려 죽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결국 사실을 전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대상의 죽음보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그 대상을 보고자 하는 욕망. 이를 두고 우리는 사랑의 광기를 떠올리게 된다. 지금 아센바흐는 사랑이 뿜어내는 광휘의 늪에서 어쩔 줄을 모른 채 이성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아센바흐의 광기는 병약해진 얼굴 상태를 가리기 위해 하얗게 분칠을 할 때 보다 명징하게 가시화된다. 그는 단장을 위해 분칠을 하지만 그 형상은 오히려 괴기하다. 되돌릴 수 없는 젊음과 건강을 인위적으로 되돌리려고 할 때 느껴지는 것은 다름 아닌 추함이다. 그는 파지오와 술래잡기 게임을 하듯 그의 뒤꽁무니를 쫓다가 결국 더러운 쓰레기통 옆에 주저앉아 흐느끼듯 웃는다. 그는 그 웃음을 통해 비로소 사랑과 예술의 실패를 인정하게 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아센바흐는 죽음에 이르기 전, 하얀 셋업을 입고 다시 모래사장에 나타난다. 그는 그곳에서 남자 친구와 싸우듯 격한 애정행각을 벌이는 파지오를 보고 흥분한다. 점차 바다 속으로 걸어가는 파지오는 화면을 수놓는 반짝이는 햇살과 찰랑이는 파도와 하나가 된 듯 자연 일부로서 황홀한 아름다움을 발산한다. 아센바흐의 머리에서는 작열하는 햇빛과 열풍으로 인해 까만 염색약이 땀과 섞여 흘러내리고 있다. 그들 사이에 놓인 카메라는 어느 쪽도 아닌 그들 사이의 경계선을 찍고 있는 듯 보인다. 그렇게 둘의 세계는 철저히 구획되어진다. 아름다움을 향한 욕망과 그것에 닿을 수 없는 현실의 충돌. 아센바흐는 그 경계선을 넘지 못하고 무력하게 주저앉는다. 욕망을 실현할 수 없는 현실의 한계에서 가능한 선택지는 둘 중 하나다. 죽거나 혹은 미치거나. 아센바흐는 전자를 택한다. 아니, 그렇게 선택되어진다(그는 죽지 않았다면 광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욕망과 불안의 종착지에 도착했다. 그는 육체와 정신(아센바흐는 예술을 정신적인 것이라 규정한다)의 죽음을 경험한다. 그러나 한편으론 “구제할 수 없는 타락에 빠지는 것은 예술가에게는 기쁨”이라는 알프레드의 말처럼 그는 이 지난한 죽음의 과정을 통해 처음으로 예술가로서의 기쁨을 맛본 것이기도 하다. 아센바흐가 바라본 마지막 시선이 죽음의 비극성보다 하늘과 바다와 모래의 그 우미한 환상적 풍경에 더 집중되어 있는 것 역시 그런 연유 때문일 것이다. 아센바흐는 죽음을 통해 새로운 예술가로 거듭난다. 비록 다시 음악을 연주할 수는 없지만.






<베니스에서의 죽음>, 욕망과 불안의 종착지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이전 08화 <벌새>, 은희의 성장이 위태롭게 느껴지는 이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