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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스텔로 Mar 14. 2023

<벌새>, 은희의 성장이 위태롭게 느껴지는 이유


은희의 성장이 위태롭게 느껴지는 이유


국내외 유수 영화제에서의 입상 소식과 평단의 극찬을 보도하는 숱한 기사들을 접하며 하루빨리 이 기적 같은 작품을 보고 싶었다. 그런데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영화는 여러 의문을 남긴 채 끝이 났다. 모든 것이 납득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끝내 해결할 수 없는 것을 해결해 냈다는, 낙관적 감상주의 같은 태도가 일견 고개를 젓게 만들었다. 개인적인 아픔과 시대의 상흔을 교차시키는 방식은 ‘개인적인 아픔’이라는 마법 같은 방어막 때문에 어떠한 특수함도 다 용인될 수 있다는 식으로 그럴 듯하게 포장되어 있었다.


훌륭한 이야기는 언제나 자기 탐구 과정에서 돌출된 진실에 주목하는 반면, 그렇지 못한 서사는 작가 자신이 되고 싶어 하는 인물을 그리는 데 그친다. 긍정적 자기 이미지를 위해 사건을 왜곡하거나 버릇처럼 사람들을 본래의 모습보다 더 나은 인물로 그리는 것이다(찰스 백스터, 『서브 텍스트 읽기』, 김영지 옮김, xbooks). 그런 점에서 <벌새>는 진실의 탐구보다는 주인공 은희가 더 나은 인물로 성장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혀 개연성과 핍진성을 확보하지 못한다. ‘그래야만 한다’, ‘아마 그럴 것이다’라는 식으로 거칠게 연출된 장면들은 자가당착에 빠진 작가가 자신을 예쁘게 포장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하게 만든다. 이는 평단과 관객들의 만장일치에 달하는 호평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영화에 의문을 갖게 된 가장 큰 이유이다. 이 글을 통해 내가 가진 의아함을 솔직하게 고백해보려 한다.



1.

영화를 보면서 완전히 몰입이 깨졌던 순간이 세 번 있었다. 이때의 배우들은 진실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비춰지기 바라는 것을 연기했다(물론 배우의 잘못은 아니다). 우선, 은희 아빠가 밤늦게 놀고 온 수희를 혼내다가 은희 엄마와 실랑이를 벌이는 대목이 그렇다. 격앙된 두 사람은 서로 말싸움을 하다 끝내 물리적 충돌까지 일으킨다. 가부장제의 권력 구조와 폭력성을 표상하는 인물로 그려지던 은희 아빠는 급기야 은희 엄마를 밀치고 만다. 이에 화가 난 은희 엄마는 옆에 놓인 램프로 그의 팔뚝을 가격한다. 램프의 유리는 수많은 조각으로 나뉘어 깨지고 그의 팔뚝에서는 여러 갈래로 피가 흘러나온다. 순식간에 벌어진 이 광경을 지켜보며 내가 정말 두려웠던 것은 팔뚝에 피가 흐르는 것을 본 은희 아빠가 행할 다음 행동이었다. 그의 입장에서 은희 엄마는 가부장제의 최고 권력자에게 도전장을 내민 셈이다. 이제 현실 세계의 가부장들의 모습처럼 더 큰 화가 닥쳐오겠구나, 하고 두려움에 떨고 있던 찰나 은희 아빠는 당황한 기색만을 내비치고 돌연 점잖아진다. 그는 그 전까지 가정폭력을 행하는 안하무인의 포식자였음에도 램프에 가격당하는 순간 벙어리가 되고 만다. 영화 <아직 끝나지 않았다>에서 점진적으로 수위가 높아지던 가정 폭력의 진실과는 사뭇 다른 지점이다. 심지어 다음날, 은희 아빠는 그간 보여줬던 가부장의 자존심은 내팽개치고 은희 엄마와 함께 TV를 보며 시시덕거린다. 이들 사이에 필연적으로 흘렀을 냉각기는 생략된 채 말이다.


두 번째 순간은 귀 밑에 혹이 난 은희가 수술 부작용을 겪을 수 있다는 얘기를 들은 은희 아빠가 느닷없이 울음을 터뜨리는 부분이다. 수술의 부작용은 적은 확률로 안면 마비가 오거나 부종이 생길 수 있고 높은 확률로 상처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가부장제에 성실히 복무한 인물이어도 자기 딸 얼굴에 상처가 생길 수 있다는 진단은 무척 고통스러운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시종일관 언어폭력을 일삼던 권위자가 느닷없이 우는 이유는 무엇인가. 심지어 그는 이후, 은희가 문방구에서 도둑질을 하다 걸렸을 때 그녀를 그냥 경찰서에 넘기라고 말할 정도로 딸에게 무신경한 사람 아니었나. 감독은 은희 아빠를 순간의 감정에 휩쓸려 사는 모자란 인물로 한정시키고 싶었던 걸까.


이에 더해 은희의 오빠인 대훈이 별안간 우는 장면도 등장한다. 누나가 성수대교 붕괴 참사의 피해자가 아닐까 두려웠던 대훈은 누나가 생존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식사 중 울음을 터뜨린다. 은희에게 밥 먹듯 폭력을 일삼고 심지어 아빠 앞에서 동생을 때리는 지경에 이른 성격 파탄자 대훈이 갑자기 어린 아이처럼 울 때, 나는 이것을 조작된 코미디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가부장제의 성실한 복무자로 군림하며 살아온 은희 아빠와 대훈이 순식간에 무너지고 변화한 이유는 무엇인가. 각각의 변화들은 폭력을 일삼던 인물의 행실이라고 하기엔 너무 뜨악하지 않나. 혹시 90년대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가부장제의 실체와 민낯이 폭력과 선한 울음을 왕복하는 순수하면서도 변덕스러운 감정의 동요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하지만 가부장제를 자신의 권력처럼 이용하는 자들의 메커니즘은 그리 간단하지 않고 항상 감정적이지도 않다. 시대의 징후를 보다 섬세하고 사실적으로 보여주겠다는 듯 시작한 오프닝과 작품 전반의 연출 태도와는 사뭇 다른 연극적인 수사는 아무리 곱씹어 생각해도 진실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라 이야기 전개를 위해 인위적으로 짜 맞춘 퍼즐에 지나지 않는다.



2.

또 한 명의 비현실적인 서사의 주인공은 김영지 한문 선생이다. 그녀는 은희와 지숙이 문방구 도둑질 사건으로 사이가 틀어진 후 다시 만나게 됐을 때, 그들에게 갑자기 민중가요 <잘린 손가락>을 불러주는 이상한 인물이면서 동시에 작중 은희에게 억압을 가하지 않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다. 영지 선생을 제외하고 은희 주위에는 모자라고 억압적인 사람들로 가득하다. 성적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학교 담임선생, 공부 못하는 은희를 선 넘는 표현으로 놀리는 친구들,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아빠와 오빠, 날라리가 되어 버린 언니, “나는 잘하는 게 하나도 없어”라며 자식 앞에서 낮은 자존감을 고스란히 고백하는 엄마, 바람을 피우며 자기 마음대로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남자친구까지. 때문에 못된 사람들의 소굴 속에 사는 은희에게 나이와 성별과 상관없이 상대의 인격을 존중하고 어떠한 억압도 가하지 않는 영지는 여타의 종교를 뛰어넘는 메시아적 존재다. 그런 탓에 은희와 지숙은 영지가 불러주는 <잘린 손가락>을 듣고 급작스럽게 관계를 회복한다. 이후, 영지는 은희와 같이 하교하는 길에 철거민들의 입장을 대변해주며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너무 많지?”, “그래도 불쌍하다고 생각하지마, 함부로 동정할 수 없어, 알 수 없잖아”라고 말하며 사실상 영화의 주제를 대사로 다 얘기한다. 그리고 다음 장면, 영지는 은희에게 힘들고 우울할 땐 손가락을 보라고 말한다. “아무 것도 못할 것 같은데 손가락은 움직일 수 있어”라는 그녀의 대사는 이전에 그녀가 불렀던 <잘린 손가락>과 직전 장면의 철거민들에 대한 대화를 상기시킨다. 이는 손가락을 매개로 노동자들과 철거민들, 그리고 영지와 은희 모두를 하나의 집합으로 묶으려는 시도다. 떡을 만들다 부르튼 자기 손가락을 응시한 적 있는 은희는 이 대목 바로 다음 장면에서 무언가 깨달은 듯 걷는다. 하지만 문득 의문이 든다. 과연 은희가 <잘린 손가락>의 노동자들과 철거민들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을까. 은희와 손가락 잘린 노동자들, 그리고 철거민들과의 연결은 지나치게 도식적인 연결이지 않은가.


아직 중학교 2학년인 은희가 상처를 치유하고 관계를 회복할 희망을 얻는 것처럼 묘사되는 이 장면은 사실상 낙천적 감상주의에 지나치게 기대는 장면이다. 은희가 겪는 고통이 노동자들과 철거민들이 겪는 고통과 과연 같은 유형의 것일까. 이는 고통이라는 거대한 감정을 세분화하지 못한 얕은 사유가 만들어 낸 지나친 비약에 다름 아니다. 은희가 겪는 고통이 인간관계의 단절로 인한 것이라면 노동자의 고통은 세상과의 단절, 더불어 생계에 대한 위협에 기인한다. 개인적인 차원의 고통과 사회적 차원의 고통, 그리고 생존에 대한 문제를 고통이라는 카테고리로 묶어 거칠게 연결하는 방식은 전혀 동의할 수 없는 편의적인 해석이다. 노동자들과 은희의 고통은 ‘고통’이라는 추상적이고 거친 단어 속에서만 제한적으로 공유될 수 있다.


3.

삶은 기본적으로 자신이 살아내는 것이다. 때로 타인의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작은 도움에 불과하다. 남이 나의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 없기에 삶은 독립적이다. 때문에 영지의 존재는 은희의 성장이 거짓된 성장 혹은 잘못된 성장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소다. 영지 선생은 마치 환생한 예수처럼 은희에게 깨달음과 용기를 준 뒤, 잘못된 사회의 표상이라 할 수 있는 성수대교 붕괴 사건으로 생을 마감한다. 그러나 은희는 연속된 고민의 흔적만 남길 뿐 그 치열한 갈등 속에서 끝내 행동을 취하지 않는 피해자에 머문다. 그녀가 취하는 행동은 고작 유리에게 뽀뽀를 하고, 누군가 열어줘야 들어갈 수 있었던 문을 직접 열쇠로 열고 들어가는 것 정도다. 그런데 이 작은 변화조차도 초월적인 존재처럼 형상화 된 영지가 은희의 두 손을 꽉 잡고 절벽에서 평지로 끌어다준 것이지 않나.


성장은 자신의 선택과 행동에 책임을 질 용기가 생겼을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그런 점에서 은희는 아직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다. 영지에게 언젠가 인생이 바뀔 수 있는지 묻는 그녀의 편지는 그저 신세한탄과 기적에 대한 얄팍한 소망에 지나지 않는다. 진실로 행하고 싶다면 행동할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허공의 말만 가득하다. 내레이션을 통해 낭독되는 죽은 영지의 편지 내용은 배우의 차분한 어조와 맞물려 영화의 감상주의적인 태도를 한 차원 끌어올림으로써 급기야 은희가 새로운 인물로 성장하고야 말 것이라고 주술을 외우는 것 같다. 하지만 은희는 영화의 엔딩에 이르러도 ‘응시’만 할 뿐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고 고립되어 있다. 타인에 의해 깨달음을 얻었더라도 그것을 주체적인 행동으로 옮겼을 때 비로소 성장은 시작된다. 그런 점에서 은희는 어디까지나 수동적인 인물, 즉 자극이 오면 반응하는 수준의 아이다. 초반부와 후반부의 은희가 달라진 점은 반응의 강도뿐이다. 그녀는 이제 보다 세게 반응하는 사람으로 변했을 뿐이다. 다소 주체적인 관계처럼 보였던 유리와의 사랑도 “너가 그랬잖아, 나 좋아한다고. 그래서 나도 잘해보려고.......”라는 은희의 대사를 통해 이 역시 수동적인 반응의 결과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준다.



4.

<벌새>의 가장 큰 문제는 은희가 깨달았다고 ‘믿는’ 것이 비약적인 깨달음이라는 점에 있다. 새로 한문 학원에 들어온 영지는 은희와 지숙을 앞에 두고 ‘상식만천하 지심능기인’이라는 고사성어를 칠판에 적는다. 얼굴을 아는 사람은 천하에 가득하지만 마음을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되겠는가. 영지는 두 아이에게 얼굴이 아니라 마음을 아는 사람은 몇 명 정도 되냐고 물음으로써 타인의 마음을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얼핏 보기에 이는 그럴 듯한 가르침처럼 보인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내가 타인의 마음을 안다고 믿는 것, 즉 착각과 자기기만에 빠지는 것에 있지 않은가. 은희는 영지의 가르침과 그녀의 죽음을 통해 노동자들과 철거민들, 심지어 외삼촌을 잃은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 것처럼 묘사된다. 영지의 죽음과 외삼촌의 죽음은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그들의 죽음으로 각각 고통 받고 있는 은희와 그녀의 엄마 사이의 연결은 기실 누군가를 잃었다는 데에서 기인하는 상실감을 제외하곤 어떤 유사점도 찾을 수 없다. 심지어 은희 엄마는 은희가 영지를 자신의 구원자처럼 따랐던 것과 달리 외삼촌에게 특별한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고 그의 죽음 이후 장례식 장면을 제외하면 특별히 그를 그리워한 적도 없으며 혈육이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둘 사이에 특별한 사연도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는 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정작 (은희와 영지의 관계를 제외하면) 인물들 간의 내막은 공백으로 처리한 뒤, 특수한 상황에 놓이게 된 상태와 현상에만 집중한다. 그리고 그것을 공통분모 삼아 각기 다른 성질의 내막들을 거칠게 이어버린다. 어찌되었건 은희와 그녀의 엄마 모두 2인칭의 죽음(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는 『죽음에 대하여』에서 2인칭 죽음은 가까운 사람의 죽음으로 이를 통해 나 자신의 죽음과 가까워진다고 설명한다)을 겪었으니 같은 처지가 아니겠냐, 라는 식으로 말이다. 이러한 방식이 가장 거만하게 재현된 것이 성수대교 붕괴라는 시대적 구체성과 은희 개인의 역사를 잇는 대목이다.



19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가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은 은희는 언니가 탄 버스가 떨어졌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서둘러 아빠에게 전화를 건다. 언니에게 전화해보라는 간절한 그녀의 호소는 얼마 지나지 않아 유리창 너머로 위치를 바꾼 카메라에 의해 침묵으로 바뀐다. 영화의 핵심 키워드인 ‘단절’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이 쇼트는 그 자체로는 대단히 탁월하다. 다만, 이 단절의 키워드가 해소되는 방식, 다시 말해 영지가 성수대교 붕괴로 사망한 것을 알게 된 은희가 이를 받아들이고 다시 삶을 시작하는 방식은 의아하다. 왜 은희는 기어이 성수대교로 향하는 걸까. 그리고 수희와 그녀의 남자친구는 왜 자동차를 몰래 훔쳐 타면서까지 은희를 데리고 성수대교로 가야 했을까. 마침내 도착한 강가에서 보게 된 끊어진 성수대교는 영지의 죽음과 결부되어 은희에게 인생이란 불가해한 단절의 연속이라는 성찰에 이르게 만든다. 한 마디로 은희가 성수대교 붕괴 참사의 현장을 뒤늦게 목격하는 장면은 그녀의 성장을 위해 복무하는 지독히 계산적이고 기만적인 장면이라는 말이다. 이 장면에서 그녀가 하는 것이라곤 감상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그저 끊어진 다리를 보면서 영지를 추모하고 우는 것이 전부다. 강가에 꼿꼿이 서서 끊어진 다리를 보고만 있는 은희는 과연 무엇을 깨달을 수 있을까.


급기야 감독은 은희의 깨달음이 무엇인지 편집을 통해 암시하려 한다. 끊어진 다리의 이미지 뒤에 배치된 흐르는 강물의 이미지는 ‘삶이란 숱한 단절 속에서도 그것을 봉합하며 계속 흘러가는 것’이라는 주제 의식을 시각적으로 명징하게 담는다. 이것이 은희가 이해하고 느낀 삶에 대한 통찰이라는 듯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감독의 제언에 불과하다. 이 편집이 삶에 대한 은희의 이해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감독은 비약을 적절한 생략으로 착각하는 것 같다.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불만족스러웠던 것은 아니다. 단절된 것들과 다시 접착되는 것들, 그리고 봉합되는 것들을 탁월하게 담아내는 장면들도 있었다. 다만, 호평일색인 이 작품에 대해 절대적 호의에 이르지 못한 한 명의 관객으로서 내가 의아했던 점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형식의 글을 쓰고 싶었다. 적어도 은희의 처연한 날갯짓은 온전한 성장통이 아니라 공허한 속병에 다름 아니라고. 그리고 이를 완전한 성장으로 오인하는 순간, 우리는 지나친 감상주의자가 되어 타인의 상처를 오롯이 이해하고 있다는 오류를 범하게 될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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