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쏟아지는 비처럼 다르덴 형제의 영화는 시작부터 관객들을 당황케 한다. 그들의 영화는 언제나 일련의 준비 과정 없이 시작된다. 경사진 레일을 서서히 올라가 마침내 정점에 이르고 얼마간의 긴장 속에 급격히 하강하고 퇴장하는 롤러코스터의 작동 방식이 소위 ‘이야기’의 정형화된 틀이라면 다르덴 형제는 이러한 전통적 작법 스타일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난데없이 시작해서 별안간 끝을 낸다. 그들에게 인간의 삶이란 시작과 끝이 정해져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무한히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에 가깝다. 그래서 그들의 영화는 엔딩 이후에도 어딘가로 줄곧 흘러갈 것이라는 느낌을 준다. 다만, 그들이 담는 흐름이란 매끈하고 평행한 직선이 아니라 어디로 튈지 모를 아슬아슬한 전방위적 곡선이다. 다르덴 형제가 핸드 헬드 촬영 기법을 예나 지금이나 계속 고집하는 것은 삶이라는 곡선의 흐름을 놓치지 않기 위한 그들의 전투적인 자세다. 주목해야 할 것은 그들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전부 동일하게 무산계급에 속한다는 점이다. 사회와 주변인으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당한 주인공들의 모습은 거의 즉각적으로 해당 영화를 일종의 고발 영화처럼 보이게 만든다. 결과적으로 어떤 삶이 하단부 어딘가에 있게 된 데에는 사회 시스템의 문제와 간단치 않은 개인의 윤리적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을 것이다. 다르덴 형제는 논쟁적일 수 있고, 이념적일 수 있으며, 더욱이 폭력적일 수 있을 이 문제들에 대한 즉각적인 해답의 제시는 유보하고 무산계급의 삶을 그저 카메라에 담아내는 것으로서 영화가 할 수 있는 미약한 윤리적 책무를 다한다. 하지만 그들이 건네는 질문은 도저히 쉽고 명쾌하게 답하기 어려운 것이어서 그 어떠한 참혹한 전쟁 영화보다도 우리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답답함의 미학
수습 기간이 끝나자 영문도 모른 채 회사에서 해고당한 로제타는 외간 남자와 수시로 화간하는 알코올 중독자 엄마와 도시 외곽의 임시 트레일러에서 간신히 삶을 이어가고 있다. 부모와 사회로부터 전혀 보호받지 못하는 어린 로제타는 어떻게든 일자리를 구해 돈을 벌어야 하는 신세다. 하지만 분명한 의지와는 별개로 세상에서 소외된 그녀의 현실은 무척 답답할 뿐이다. 이 답답함. 하고자 하는 의지의 정도와 그에 따른 결과의 충족이 묘하게 상충되거나 애매하게 들어맞을 때 발생하는 답답함이란 감각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체험의 감각으로서 관객의 마음을 로제타에게 동화시키는 강력한 모티프로 활용된다. 이를 다르덴 형제는 ‘몸싸움’과 ‘무게감’이라는 육체성을 통해 형상화한다.
로제타는 94분의 러닝타임 동안 무려 다섯 번의 몸싸움을 벌인다. 그녀를 해고시킨 회사 관계자, 알코올 중독자 엄마, 숨기고 싶은 그녀의 트레일러를 찾아온 리케, 그녀 대신 아들에게 일을 시키겠다는 와플 가게 사장, 사장에게 불의를 고발한 것에 대해 강력히 항의하는 리케. 그녀는 언제나 최선을 다해 몸싸움을 벌인다. 하지만 단 한 번도 통쾌하게 상대를 제압하지 못한다. 비슷한 수준의 힘이 부딪히며 발생하는 답답함은 로제타의 막막한 상황과 절망스런 심정을 우회적으로 절감하게 만든다. 그녀의 몸싸움에는 진취성과 간절함이 진하게 묻어 있다. 그녀는 상대를 쉽게 제압하지 못하지만 쉽게 제압당하지도 않는다. 그녀의 끈질긴 버팀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정과 근성은 아직 그녀가 삶에 대한 의욕을 완전히 잃어버린 게 아니라는 작은 희망을 품게 한다. 한편으론 애매한 힘의 균형이 마음을 현혹시켜 의미 없는 희망을 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염려스럽기도 하지만 이를 막연히 부정적인 것이라고 딱 잘라 말하긴 어려울 것 같다. 이 작은 희망이 삶을 가능케 하고 조금이나마 미래를 밝힐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기 때문이다.
로제타는 ‘차상위계층의 빈곤 실업자’다. 모르긴 몰라도 그녀의 미래 역시 암울한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다르덴 형제는 로제타를 절대 비극의 위치에 놓지 않는다. 로제타는 일하러 가지 않겠다는 엄마와 실랑이를 벌이다 거무튀튀한 진흙탕에 빠진다. 그녀는 점차 진흙에 침전되고 두려움에 잠식된다. 하지만 엄마는 이미 화면 밖으로 멀리 달아난 뒤다. 제대로 수영도 할 줄 모르는 로제타에게 진흙은 죽음과 다를 것이 없다.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어쩔 줄 모르고 허우적대던 그녀는, 그러나 끝내 가라앉지 않고 물 밖으로 빠져나온다. ‘가라앉지만 온전히 가라앉지는 않는’, 이 묘한 무게감이야말로 로제타를 가장 정확하게 정의하는 문구다. 그런 점에서 동일하게 물에 빠졌으나 로제타의 도움 없이는 두 번 다시 생의 공기를 마시지 못했을 리케는 그녀보다 더 아래층에 위치한 밑바닥 중의 밑바닥 인생이다. 말하자면 둘의 갈등은 차상위계층과 최하위계층 간의 처절한 일자리 다툼인 셈이다. 이것의 코믹한 우화가 <기생충>이라면 <로제타>는 극도로 진중한 현실이다.
한편, 다르덴 형제는 묘한 무게감을 물체를 드는 행위를 통해서도 구현한다. 로제타는 작중에서 세 가지 무거운 물체-밀가루 포대, 엄마의 육신, 가스통-를 든다. 그녀는 무겁지만 전혀 못 들 것은 아닌, 애매한 중량의 세 가지 물체를 기어이 들고 또 든다. 그리고 그녀가 이것들을 몇 번이고 들고 내려놓기를 반복할 때, 우리는 다시 답답함을 느낀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반복의 답답함이 아니라 불충분한 완력에 대한 반응이다. 들 수 있고, 들고 싶지만, 얼마 못가 다시 내려놓을 수밖에 없는 상황은 너무 무겁지만, 어떻게든 짊어지고 갈 수 있을 것 같은, 절망과 희망을 왕래하는 애매한 삶의 무게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로제타에겐 여전히 생을 유지할 능력과 체력이 남아 있다. 항상 최선을 강요하는 일련의 비극적 상황들이 그녀를 끈질기게 괴롭힐 뿐이다. 인고의 삶. 로제타의 삶은 언제나 견뎌내는 삶이다.
윤리적인 딜레마
로제타는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었던 리케를 배신하고 사장에게 그가 와플을 직접 만들어 부당 이익을 취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사실을 알게 된 사장은 격분하여 리케를 내쫓고 그의 일을 로제타에게 내준다. 분명 리케는 부당 이익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해고당한 건 전혀 부당한 처사가 아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사장에게 곧이곧대로 얘기한 로제타의 행동은 정당하고 용기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이면으로 들어가면 얘기는 복잡해진다. 우리는 이 일이 벌어지기 전, 리케가 로제타의 낚시줄과 올가미를 건져주려다 물에 빠졌던 장면을 기억한다. 그때, 그의 모습은 엄마에 의해 진흙탕에 빠져 죽을 위기에 처했었던 로제타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하지만 로제타는 자신을 버리고 떠난 엄마처럼 리케의 간절한 구조 요청을 뒤로하고 점점 가라앉는 그의 모습을 한동안 바라만 본다. 그렇다. 우리는 그녀가 리케의 불의를 고발하게 된 ‘동기’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그녀는 정의의 맥락이 아니라 철저히 자기 이익을 위해 움직였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리케의 허름한 집 안을 본 적이 있다. 피해의 정도는 형편이라는 변수에 따라 가혹할 정도로 극명히 증대되는, 한마디로 가파른 양의 기울기를 가진 함수의 종속변수다. 로제타는 본인에게 인간적 대우를 해주었던 유일한 휴머니스트 리케에게 잊을 수 없는 폭력을 행사한다. 은인의 불의를 고발하여 자기 이익을 취하는 행위는 가난이라는 명목으로 용인될 수 있는가. 리케는 이 질문의 답을 얻기 위해 끝까지 로제타를 추격한다.
로제타는 리케의 일자리를 빼앗지만 머지않아 사장에게 일을 그만 두겠다고 연락한다. 그리곤 술에 취한 엄마를 트레일러 안으로 옮긴 후 가스통 밸브를 연다. 차가운 바람을 막기 위해 창문 틈에 넣어 두었던 휴지는 이제 죽음을 방조하는 종범이 된다. 그녀가 견뎌온 삶의 무게와 마음속에 담아 둔 죄책감은 이제 손쉽게 휘발될 것이다. 하지만 가스가 떨어진 탓에 그녀는 자살조차 성공하지 못한다. 그녀에겐 죽을 자유조차 없다. 새 가스통을 들고 다시 트레일러로 향하던 그녀는 오토바이로 위협을 가하는 리케와 재회한다. 한동안 이어지는 그의 위협 속에 무거운 가스통을 안간힘을 쓰며 옮기던 로제타는 결국 가스통을 놓치고 주저앉아 오열한다. 리케는 그녀를 일으켜 세운 뒤, 프레임에서 사라진다. 곧 카메라는 리케가 서 있던 자리로 옮겨가고, 그로 인해 관객은 홀연히 리케의 자리에 서게 된다. 이제 관객은 새로운 질문에 답해야 한다. “그녀를 용서할 수 있는가.” 만약 로제타가 어떠한 삶의 희망도 걸어볼 수 없는 극악의 불행아였다면 어땠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윤리적 책무를 다해야 할까. 미약한 희망과 일말의 가능성도 없는 비극 사이의 묘한 위치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로제타에게 우린 어떤 잣대를 들이밀어야 할까. 끝없이 답변을 유보한 다르덴 형제와 달리 현실의 누군가는 이 물음에 답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대답이야말로 현실 세계 속 로제타들의 미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사회적 인식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