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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스텔로 Mar 17. 2023

<더 씽>, SF 영화의 새로운 방향


SF 영화의 새로운 방향



전통적으로 SF 영화는 주체와 타자와의 관계 속에 촉발되는 갈등과 혼란을 그린다. 이런 이유로 SF 영화는 반공주의가 극심했던 1950년대에 황금기를 보냈다. 그러다 60년대에 다소 주춤하고 70년대 말에 이르러 다시 최고의 흥행 장르로 자리 잡는다. 1960년대 이후, 60만에 가까운 이주민이 미국으로 유입되었기 때문이다(정재형, 『영화 이해의 길잡이』, 개마고원, 2014). 미국 본토에 살고 있던 미국 시민들은 중남미, 아시아 등의 다양한 인종과 민족을 받아들여야 했고 그 중에는 불법 이민자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주민들의 유입은 당대 미국인들에게 타자에 대한 본능적 반감과 불안을 야기하였으며 이러한 집단적 공포는 당대 SF 영화 속 외계인의 침공으로 은유되었다.


SF 영화에서 외계 생명체를 다루는 영화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지구인과 대척점에 서 있는 흉측하고 난폭한 외계인을 척결해 없애는 영화. 그리고 지구인에게 동화된 외계인이 지구인의 문명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만 끝내 자기 별로 돌아가는 영화. 전자는 <에이리언>, 후자는 <E.T.>가 대표적이다. 이때 타자에 대한 반감과 두려움을 직접적으로 드러낸 경우가 <에이리언>이라면 <E.T.>는 타자가 자신의 사회와 문화에 동화되도록 도와주는, 다소 반성적인 태도가 담겨 있다. 다만, 외계인이 죽어야 하는 <에이리언>이나 외계인이 자기의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E.T.>나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어느 영화도 타자와 어울려 공존하지 못한다. <더 씽>은 이러한 SF 영화의 두 가지 경향에 매몰되지 않고 독자적인 길을 개척한다.


<더 씽>은 돈 시겔 감독의 <신체 강탈자의 침입>의 모티프를 가져와 괴물의 외형을 인간의 것과 동일하게 표현하였다. 하지만 <더 씽>이 특별한 것은 이 모티프를 통해 인간 본연의 정체성 문제를 보다 깊이 건드리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괴물은 시각 이미지의 모방을 통해 지구인에 완전히 동화된 상태에 있다. <E.T.>가 지구인과 일종의 모험을 겪으며 점점 지구인 문화에 동화되는 것과 달리 <더 씽>은 ‘동화된 상태’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영화에는 동화되는 ‘과정’이 완전히 생략되어 있다. 영화에서 동화는 단기간에 급작스럽게 이뤄지고 외계인들은 이미 지구인으로 동화되어 있는 상태, 또는 동화되기 직전의 상태로 활보한다. 그들은 이미 표면적으로 지구인이다. 한 마디로 존 카펜터는 여타의 SF 영화들처럼 이주민들이 미국 문화에 동화되는 과정에서 겪는 갈등과 혼란을 말하고 싶은 게 아니라 본토에 정착하여 이미 미국 문화의 외피를 두르고 있는 이주민들의 문제를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더 씽>은 어쩌면 영화의 개봉 시점인 1982년보다 이주민과 타문화에 대한 반발심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현재의 미국 상황에 더 유효할지 모른다.



외계인이 지구인의 모습으로 변장해야 하는 이유는 자신을 위협할지 모르는 지구인으로부터 안전하게 종족을 번식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주민들이 미국 백인들, 더 나아가 백인 앵글로색슨 기독교인이라는 주류에서 소외당하지 않으려는 이유는 미국에서 무리 없이 생존하기 위함이다. 이주민들은 미국인들과 협력하고, 더 나아가 그들에게서 부당한 차별을 받지 않기 위해 그들의 문화를 배우고, 그들의 디자인과 스타일을 흡수한다. 하지만 그들이 제아무리 미국인처럼 겉을 치장하더라도 내면의 정체성은 바뀌지 않는다. 아무리 외계인이 인간의 외형과 목소리를 똑같이 흉내 내더라도 그들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삶을 지탱하는 괴물일 뿐이다. 시각적인 것을 넘은 내면의 동화. 우리는 이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갖고 있다. 시각적 차이가 희미해진 현재 그리고 갈수록 희미해져 갈 미래에 인간은 타자와 나를 구별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 타인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사회적․문화적․인종적 정체성을 더 강렬히 알아내려 할 것이다. 그것은 상대적으로 주류에 속해 있는 인간이 자신의 희소성을 잃게 될까 두려워하는 근원적인 공포와 나와 다른 타자를 배척하고 구별 짓기 위한 본능적인 공격성에 기인한다. 매크리디가 혈청 검사를 통해 동료들의 정체성을 일일이 확인하는 장면은 타자와의 관계성을 장르적으로 탁월하게 알레고리화 한 대목이다.



주체는 타자와의 구별을 통해 자신을 규정한다. 그 구별이 시각적인 것에서 한계에 부딪히면 주체는 타자의 근원적인 정체성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을 규정하려든다. 이 부질없는 메커니즘의 끝에서 도출해낼 수 있는 원론적인 진실은 우리는 서로 다른 존재라는 것이다. 다를 수밖에 없는 상대를 두고 구태여 구별점을 찾으려는 노력은 참으로 허망하고 덧없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더 씽>의 결말은 의미심장하다. 매크리디와 차일즈는 불타고 있는 남극 기지 안에서 최후의 2인이 되어 같은 공간을 공유한다. 서로 정체가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상황. 매크리디는 “우리 그냥 여기서 좀 기다리자고, 어떻게 되나 보게”라고 말한다. 이 말을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한다면 서로의 정체성을 알려고 할 필요 없이 같은 공간에 동반자로 남자는 말이 된다. 우린 다른 존재이니 그러려니 하자는 것이다. 이때 누가 괴물이고 누가 인간인지 가려내려는 주체는 오직 관객뿐이다. 매크리디는 믿음도 불신도 없는 중립의 상태에 있다. 감독은 엔딩에 이르러 관객에게 거울을 비추며 묻는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혹 둘 중에 외계인이 누구인지 색출하려 하진 않았습니까?” <더 씽>의 결말은 관객들로 하여금 타자와의 구별을 통해 자신을 규정하려는 본능을 실감시키는 데에 의의가 있다. 이 순간, 모든 관객은 꼼짝없이 마지막 시퀀스 이전의 난폭한 색출자 매크리디가 되고 만다. 의심의 늪에 빠져 멀쩡한 동료를 죽였던 매크리디보다 높은 위치에서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고 있던 관객들은 어느새 그와 동등한 위치로 내려온다. 모르긴 몰라도 관객의 상당수는 엔딩 크레딧이 올라오기도 전에 차일즈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을 것이다. “분명 넌 괴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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