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코스텔로 Mar 29. 2023

<그린 나이트>, 현실이 영화로 이행되는 과정


현실이 영화로 이행되는 과정



활짝 열린 사각의 창틀 너머를 관망하던 카메라가 그 배면에 잠들어 있는 주인공의 얼굴을 담기까지, <그린 나이트>의 도입부는 <이창>(알프레드 히치콕, 1954)의 그것과 유사하게 구성되어 있다. 두 영화의 카메라는 모두 누군가의 시점처럼 운용되다가 그 시점의 주체를 다른 차원의 것으로 전환시킨다. <이창>에서 건너편 아파트 내부의 은밀한 공간을 훑으며 관객의 ‘훔쳐보기’ 욕망을 자극하던 카메라는 돌연 휠체어에서 잠을 자고 있는 주인공의 모습을 비추면서 해당 쇼트가 특정 인물의 시점과 아무 관련이 없음을 탄로한다. 이 쇼트는 다름 아닌 관객의 시점 쇼트였다. 그렇게 히치콕은 <이창>이 영화와 관계하는 관객의 관음증적 욕망을 다룬 메타 영화임을 드러낸다.


<그린 나이트>의 도입부에서 창틀 너머의 이름 모를 기사 부부와 가축들을 한동안 관조하는 쇼트는 마치 움직이는 그림을 감상하는 누군가의 시선처럼 형상화되어 있다. 불현듯 카메라가 뒤로 물러나는 순간까지만 해도 특정 인물의 뒷걸음질로 여겨졌던 쇼트는 후진의 움직임을 계속하면서 그 주체가 작중 인물이 아님을 밝힌다. 동시에 바깥의 세계를 투사하는 틀이 스크린 모양의 사각 창틀이라는 점을 넌지시 드러내며, 여자 친구의 물세례를 받고 번쩍 잠에서 깨는 주인공 가웨인의 모습을 하나의 흐름으로 잇는다. 그렇게 카메라는 하나의 움직이는 그림(영화)처럼 표현된 예술 세계와 차가운 물의 성질을 즉각 몸으로 받아들이는 현실 세계를 연계하며 두 세계의 물리적 단절과 내적 긴밀함을 동시에 암시한다. 현실에서 예술을 바라보다가 이내 그 세계를 흐릿하게 처리하며 온전한 현실로 돌아오는 카메라의 시점은 그런 점에서 감독 데이빗 로워리의 시점으로 읽힌다. 그리고 그 카메라가 투신하는 대상인 가웨인은 데이빗 로워리의 분신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린 나이트>에서 데이빗 로워리가 자신의 분신 가웨인을 경유하여 도달하려는 곳은 어디일까, 더 중요하게는 그곳에 가닿기까지의 지난한 여정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가웨인과 녹색 기사, 현실과 영화



크리스마스 연회가 열리는 예배당에서 왕은 부패한 기사 가웨인에게 무용담을 들려 달라 요청한다. 처음에는 그저 친분을 쌓기 위함인 듯 보였던 이 요청은 이내 원탁의 기사들을 두고 “무용담 하나 없이 어울려선 안 된다.”고 조언하는 왕비의 말을 통과하면서 “무용담 없이 왕위 계승은 꿈도 꾸지 말라.”는 일종의 압박이자 명령으로 변모한다. 이로써 가웨인은 왕이 되기 위해 무용담이 필요한 현실적 자리에 머문다. 그는 방탕한 성적 유희로 얼룩져 있는 남자이고, 권력을 노리는 탐욕가이면서 한편으론 엄마와 여자 친구를 사랑하는, 남루하면서도 지극히 평범한 현실적 존재이다. 그런 그의 앞에, 즉 가웨인이라는 현실 앞에 나무 형상의 초현실적 존재 ‘녹색 기사’가 등장한다. 가웨인의 현실성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녹색 기사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녹색 기사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크리스마스 연회가 열리는 예배당 시퀀스의 포문을 여는 주체가 카메라라는 점을 복기할 필요가 있다. 카메라는 아무도 없는 예배당 앞에 서서 수직의 각도로 눈발이 흩날리는 하늘을 잡은 채 예배당 입구로 들어선다. 입구에 다다른 카메라가 내부의 어둠 속으로 점차 들어갈 때, 계단식 구조로 설계되어 있는 문틀로 인해 그 움직임은 마치 깊은 심연 속으로 하강하는 듯 느껴진다. 그렇게 어둠은 기준점이 되어 이전의 쇼트와 이후의 쇼트를 분리하면서 다른 세계로의 진입을 선언한다. 이에 조응하듯 곧이어 문이 열리고, 카메라에 붙잡힌 가웨인은 예배당 상층부에 뚫린 원형의 창에서 사선 아래 방향으로 내려오고 있는 푸르고 투명한 빛을 바라본다. 빛은 원탁의 중심부를 성스럽게 비추는데, 이 형상은 마치 스크린에 투영되는 영사기 렌즈의 광원처럼 보인다. 그렇게 본다면 원탁의 중심부는 그 빛이 가닿아 무대화된 스크린이다. 그리고 이 무대 위에 출연하는 녹색 기사는 스크린에서 퍼포먼스를 행하는 영화적 존재, 혹은 영화 그 자체이다.


그렇다면 녹색 기사가 자신과 겨뤄 승리한 자에게 본인이 당한 만큼 다음 해 크리스마스에 똑같이 되갚아 준다는 황당무계한 목 베기 게임은 영화와 현실 간의 역학에 관한 메타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다. 왕위를 계승해야 하는 가웨인은 이 게임에 참가하여 녹색 기사의 목을 내려치고, 일 년 뒤 그가 기거하는 녹색 예배당으로 여정을 떠난다. 이로써 남루한 ‘현실’이 성스러운 ‘영화’로 다가가는, 그 긴 이행의 과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네 가지 시험



여정을 떠난 가웨인은 전쟁으로 참혹하게 전사한 병사들의 시신을 목도하고, 머지않아 정체불명의 소년병과 조우한다. 소년병은 가웨인에게 다가가 전쟁으로 두 친형을 잃은 자신의 암담한 처지를 설명한다. 그러나 가웨인은 그의 신세한탄에 전혀 귀 기울이지 않는다. 피폐해진 전장을 무감하게 지나치던 가웨인은 소년병이 녹색 예배당이 있는 북쪽 길을 안내하자 그제야 그에게 관심을 준다. 다만, 그것은 소년병에 대한 인간적인 관심이 아니라 녹색 기사를 만나야 하는 개인의 이기적인 욕망의 산물이다. 결국 가웨인은 길을 알려준 소년병에게 ‘작은 친절’을 베풀지 않은 죄로 그의 무리에 포박당하고 소지품을 전부 빼앗긴다. 그런데 이 장면은 어딘가 이상하다. 왜 소년병은 처음부터 강도 무리를 끌고 와 가웨인을 포박하지 않았을까. 만일 허허벌판이 아니라 우거진 숲에서 범행을 계획한 것이었다 해도 구태여 작은 친절을 바랄 필요가 있었을까. 또한 가웨인이 그것을 베풀지 않았다고 분노할 필요가 있었을까. 곰곰이 생각할수록 이 장면은 일종의 시험처럼 느껴진다.


이 대목의 서두를 여는 자막 ‘작은 친절’을 한 단어로 축약하자면 ‘연민’일 것이다. 가웨인은 전쟁에 희생된 자들과 그 포악함의 절대적 피해자라 할 수 있는 소년병을 보고도 전혀 연민의 감정을 느끼지 못한 채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데에만 혈안이었다. 그런 점에서 포박당한 가웨인을 카메라가 시계 방향과 반시계 방향을 오가며 360도 회전하는 쇼트는 백골이 된 미래의 형상과 복원된 현재를 교차함으로써 연민의 정을 하사하지 않은 가웨인에게, 그러니까 연민이 거세된 현실에게 가하는 카메라의 협박이자 경고는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녹색 기사와 재회하는 시퀀스를 제외하고, 이 여정을 구성하는 네 개의 시퀀스는 곧 네 개의 시험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시험들은 현실이 영화로 이행되는 과정에 필요한 덕목들에 대한 탐구이자 점검일 테다.


이후, 가웨인은 잠을 자기 위해 들어간 빈 집에서 정령처럼 보이는 의문의 여자 위니프레드를 만난다. 그녀는 가웨인에게 연못에 빠진 자신의 머리를 건져와 달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탁을 한다. 그녀 목에 멀쩡히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머리가 허상이라는 얘기인가. 만일 그렇다면 그녀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 가웨인은 물을 수밖에 없다. “아가씨, 당신은 사람인가요? 정령인가요?” 달리 표현하면, “보이는 것을 믿어야 하나요? 보이지 않는 것을 믿어야 하나요?” 위니프레드는 지금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을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를 출제하고 있는 것이다(로워리는 전작 <고스트 스토리>에서 초현실적 존재인 ‘고스트’의 가시화를 통해 관객들에게 보이지 않는 존재의 실존을 믿어 달라 하소연한 적 있다). 다행히 가웨인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기로 결정한다. 그는 위니프레드의 부탁대로 물속으로 들어가 그녀의 두개골을 건져 올린다. 시험에 통과한 가웨인은 그 보상으로 소년병에게 약탈당했던 녹색 기사의 도끼를 돌려받는다.



여정의 세 번째 시퀀스는 영화를 통틀어 가장 초현실적이고 몽환적이다. 가웨인은 이 기이한 시퀀스에서 여우의 하울링을 따라하는 인간 형상의 거인족을 보게 된다. 이는 그간 거쳐 왔던, 문제가 주어지고 그 난관을 헤쳐 나가는 식의 시험 유형과는 사뭇 다르다. 이때 눈길을 끄는 건 거인족을 따라 묵묵히 길을 걷고 있는 가웨인의 뒤에서 느닷없이 180도로 몸체를 돌려 상하를 반전시키는 카메라의 움직임이다. 더 흥미로운 건 카메라가 상하를 완전히 뒤바꾼 다음 점차 전진해 나갈 때, 조금씩 희미해지던 거인족의 형상이 마침내 완전히 사라진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화면이 180도 뒤집혀졌을 때 비로소 거인족이 지배하는 환상이 깨지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카메라가 180도 회전하기 전의 화면은 환상인 셈이다. 이와 연계하여 우리는 이 시퀀스의 도입부에서 가웨인이 환각의 버섯을 먹었다는 사실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환각의 버섯은 앞선 두 시퀀스에서 소년병과 위니프레드처럼 일종의 출제자 역할을 한다. 시험지를 받아든 가웨인은 환각을 통해 자신의 상상력을 검증 받는다. 그러니 엉뚱하게 튀어나온 거인족들은 가웨인의 상상력이 빚어낸 환영이다.


공교롭게도 이 환영들은 영화의 어떤 존재보다 컴퓨터 그래픽의 인상을 강하게 풍긴다. 이때 방점은 기술 자체가 아니라 그 기술이 화면에 기입되면서 생기는 생경함에 있다. <고스트 스토리>에서 로워리가 초월적 존재인 유령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재현하지 않은 건 실재하지 않는 것을 실재하는 것으로 구현했을 때 생기는 간극, 그리고 그로 인해 촉발되는 생경함이라는 감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로워리에게 중요한 건 디지털 기술 자체, 혹은 아날로그 자체가 아니라 그 둘 사이에서 벌어지는 화학작용이다. 정리하면 가웨인이 치르는 세 번째 시험은 상상력을 발휘하여 생경함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에 대한 역량 측정이다.


가웨인이 여정을 떠난 후 처음으로 마주한 대상은 기억 속의 여자 친구 에셀이다. 그는 에셀에게 받은 징표의 소리를 매개로 자신에게 청혼을 하는 그녀의 과거 모습과 대면한다. 그러나 가웨인은 수줍게 진심을 고백하는 그녀에게 어떠한 답도 건네지 못한다. 그런 그의 앞에 에셀과 똑같은 얼굴을 한 성주 부인이 나타나 매혹적인 자태를 뽐낸다. 이때 성주 부인과 에셀이 신분의 격차로 구별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성주 부인의 역할은 명료해 보인다. 네 번째 여정에서 가웨인은 사랑의 윤리에 관한 시험을 치른다. 이 어려운 싸움에서 가웨인은 에셀이 준 징표를 두고 사랑의 징표가 아니라고 말한 뒤 이를 성주 부인에게 헌납한다. 그리고 다음 날, 그녀와 성적 관계를 맺는다. 가웨인은 사랑의 윤리에 관한 한 완벽한 낙제다.


다만, 이 장면에서 더 중요한 건 성적 욕망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겹쳐진다는 점이다. 가웨인이 성주 부인에 의해 욕정이 해소되는 과정은 성주 부인으로부터 녹색 허리띠를 선물 받는 과정이기도 하다. 차고 있으면 누구에게도 공격받지 않고 영영 상처 입지 않는 녹색 허리띠는 죽음을 거스르려는 욕망이자 의지이다. 말하자면 현실은 욕망으로 팽창하지만 존재의 소멸을 두려워하는 나약한 세계이다. 이때 죽음은 성주에 의해 사냥된 짐승의 이미지로 재현된다. 이 이미지는 가웨인이 성을 떠나기 전날 밤 자신이 사냥감으로 표현된 그림을 보는 장면에서 강하게 대두된다. 그는 그와 유사한 그림을 전에도 본 적 있는데, 그때 사냥감으로 채택된 대상은 여우였다. 그렇다면 가웨인과 여우는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 걸까.


여우는 가웨인이 두려움에 잠식될 때, 예컨대 시신이 널브러져 있는 황막한 숲속을 지날 때나 연못에서 위니프레드의 두개골을 건져 올렸을 때, 그리고 동굴 안에서 배고픔에 허덕이고 있을 때, 녹색 예배당을 목전에 둔 강가 앞에서 등장한다. 말하자면 여우는 가웨인이 녹색 예배당에 당도하기 전까지의 모든 여정에 동참하며 네 번의 개별 시험과 별개의, 혹은 그 모두를 관통하는 시험을 내는 출제자다. 이 시험의 핵심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극복 가능성이다. 성 안에서 여우가 안 보였던 건 성주의 말대로 집은 ‘안전한’ 곳이기 때문이다. 가웨인이 성을 떠날 때, 성주가 그에게 여우를 선물하는 건 그간 잡아두고 있던 그의 두려움을 다시 돌려주는 것이다.


필멸의 과정



마침내 녹색 기사 앞에 당도한 가웨인은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죽음을 기다린다. 그러나 아직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완벽히 극복하지 못한 가웨인은 녹색 기사가 휘두르는 도끼를 계속 피하면서, 그곳에서 도망쳐 집으로 귀환한 뒤의 미래를 상상 속에 그려본다. <그린 나이트>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집으로의 여정’ 몽타주 시퀀스에서 중요한 것은 그간의 여정에서 끝내 체현하지 못한 덕목들, 예컨대 (전쟁 피해자에 대한) 연민, 사랑의 윤리,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극복 부문에서 고스란히 문제가 발생한다는 점이다. 그는 전쟁을 벌이며 국민들을 희생시키고, 여자 친구 에셀을 가혹하게 배반하며, 전쟁통에 끝까지 성 안에 머물면서 홀로 쓸쓸히 죽는다. 그런 점에서 이 몽타주 시퀀스는 필수 덕목들을 놓친 현실이 영화로 이행되었을 때의 끔찍한 결과를 상상 속에서 미리 상연해 보는 것이다. 잘못을 깨닫고 진실을 알게 된 현실만이 영화로 이행될 자격을 얻는다.


<그린 나이트>는 <고스트 스토리>와 다른 과정을 거쳐 동일한 결론을 도출하는 영화다. <고스트 스토리>에서 응시와 시간성이라는 감각 기능을 탑재하며 영화 그 자체로 환유되던 고스트는 현실의 물질적 기반 위에 살아가는 아내 곁을 맴돌다가 그녀가 문설주 틈에 새겨 넣은 메시지(현실의 진실)를 발견하곤 돌연 소멸된다. 현실의 진실을 알게 된 영화는 그 순간 영화가 아니며 현실의 다른 버전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녹색 기사가 끝내 가웨인을 참수하는 것은 영화의 진실을 알게 되는 순간 현실은 더 이상 현실이 아닌 영화의 다른 버전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현실 앞에서 무릎 꿇고, 현실은 영화 앞에서 무릎 꿇으며 자신의 소멸을 받아들인다. 어느 쪽이든 두 세계는 필멸의 과정을 거쳐 독자화된다.






<그린 나이트>, 현실이 영화로 이행되는 과정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이전 02화 <고모라>, 범죄자의 시신에도 존엄은 있는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