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동일본 지진과 계속되는 경제 불황에 일본 전역이 고통스러워하자 미야자키 하야오는 “더 이상 판타지를 품을 수 없었다.”라고 고백한 뒤 “판타지를 만든다면 그건 거짓이 될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그가 사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판타지라는 거대한 틀 속에서 현실의 문제와 번민하는 인물의 심리를 사실적으로 담아온 과정을 지켜봤던 관객에겐 다소 충격적인 발언이었을 것이다. 그의 작품 세계에서 판타지가 빠진다는 것은 낭만과 모험을 운용하는 그의 감각적인 비주얼과 마법처럼 이어지는 비현실적 서사의 재미가 사라진다는 말과 같았다. 그의 필모그래피 가운데 특정 시기가 구체적으로 지정되었던 것은 처음이 아니었으나(<붉은 돼지>), 실존 인물의 연대기를 따라가는 영화는 <바람이 분다>가 최초였다. 어쩌면 <바람이 분다>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새로운 도약을 알리는 또 다른 시발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실존 인물 ‘호리코시 지로’의 삶을 영화화 한 것은 사실 필연적인 일이었다. 주지하다시피, 1985년 다카하타 이사오와 공동 설립한 ‘스튜디오 지브리’의 ‘지브리(Ghibli)’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 정찰군용기의 명칭 ‘기블리(Ghilbli)’의 일어 발음인 ‘기브리’를 미야자키가 잘못 발음한 데서 온 것이다. 또한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비행 군수공장을 운영하던 아버지와 큰아버지 밑에서 유복하게 자란 미야자키는 어렸을 적부터 비행기를 열렬히 사랑했던 덕후이자 군용기 그림을 즐겨 그리던 소년 애니메이터였다. 그에게 비행의 이미지는 전쟁의 광기를 막을 비장한 결기였고(<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유토피아의 시각적 형상물이었으며(<천공의 성 라퓨타>, <하울의 움직이는 성>), 내적 성숙에 따른 성장통이면서(<이웃집 토토로>, <마녀 배달부 키키>) 진실을 깨우치는 낭만적 사랑의 과정(<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었다(비행에 대한 그의 남다른 애착은 <루팡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 <모노노케 히메>, <벼랑 위의 포뇨>를 제외하곤 모든 영화에서 창공을 가르는 인물들의 동선을 통해 끊임없이 구체화되어 왔다). 그리고 그 자체로 언제나 꿈과 욕망의 대상이었다. 비행 이미지에 낭만보다 슬픔의 그림자가 더 깊게 드리웠던 적은 미야자키의 첫 성인물이었던 <붉은 돼지>가 유일하다.
그리고 비로소 2013년에 모습을 드러내 비행에의 욕망과 열정을 진지하게 풀이한 그의 두 번째 성인물을 뒤늦게 보려했을 때, 나는 그의 자기고백과 욕망 실현의 과정을 원 없이 들어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적어도 내게 그의 초상을 지켜보는 일이란 한없이 즐겁고 흥분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현실의 바람과 미야자키의 바람
“죽은 사람과 만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교수가 물었다. 미리 작성한 유서, 생전에 사용했던 유품, 그(녀)의 일기장 등등 한동안 각종 오답이 쏟아졌다. 점차 답변의 열기가 식어가던 중 한 학생이 외쳤다. “꿈이요.” 교수는 흐뭇하게 웃었고 교실 내 학생들은 일제히 짧은 감탄사를 내지르며 큰 깨달음을 얻은 듯 흥분했다. 머지않아 나도 뒤늦게 벅차올랐는데, 그것은 생각지 못한 정답에서 기인한 충격이나 놀람 때문이 아니라 꿈에서 만날 정도의 간절함이란 도대체 얼마큼인지 도통 가늠할 수 없었던 데에서 생긴 막연함 때문이었다.
최고의 비행기 설계사를 꿈꾸는 어린 지로는 꿈속에서 평소 존경하던 카프로니 백작을 만나 귀중한 조언을 듣게 된다. “비행기는 전쟁의 도구도 장사의 수단도 아니다. 비행기는 아름다운 꿈이고, 설계사는 꿈을 형태로 만드는 사람이다.” 백작의 말을 들은 지로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꿈에서 깨어난다(물론 카프로니 백작은 1957년까지 생존했으니 지로가 죽은 자와 꿈속에서 만난 건 아니다. 그럼에도 누군가를 꿈에 소환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영화에서 가장 낭만적인 이 장면은 적어도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일러준다. 지로는 간절하다. 그의 꿈은 보통 사람의 것과는 차원이 다르게 간절한 것이다. 그렇기에 적어도 그의 진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주목해야 할 것은 지로에게 조언을 건넨 카프로니 백작이 지브리의 어원이 된 이탈리아의 정찰군용기 ‘기블리’를 설계한 실제 인물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지로는 실제 인물의 특수성을 빌려 미야자키가 자신을 형상화한 인물이다. 다시 말해, 비행에 대한 미야자키의 꿈은 누구의 것보다 더 간절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참 난감하다. 작중 배경인 2차 세계대전은 흐릿하게 처리된 데다, 사랑의 서사는 뭉클하지만 맹목적이고 비현실적이다. 어느 영화에서나 핵심으로 작동하기 마련인 두 카테고리는 영화 밖의 미야자키와 영화 안의 미야자키(지로)가 무엇보다 숭고하게 여기는 꿈에 대한 열정 때문에 철저히 뒤로 물러나 있다. 그 숭고한 꿈이 양산하는 것은 무엇인가. (백작의 말과 다르게) 다름 아닌 ‘폭격기’, 달리 표현하면 타인의 ‘죽음’이다. 영화의 후반부, 긴 연구 끝에 지로가 기어이 고안해낸 것은 당시 몇 년간 세계를 주름잡았던 최고의 전투기 ‘제로센’이다. 훗날 전쟁 막바지에 가미카제로 불린 자살 특공대에 이용된 전투기로도 유명한 제로센은 명실상부 당시 일본 비행 기술의 집약체이자 군국주의와 제국주의의 더러운 표상이다. 영화가 전쟁을 묘사하지는 않지만 실존 인물과 실재했던 비극의 역사를 이야기의 도구로 채택한 순간부터 전쟁은 보이지 않아도 보이는 것으로,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에게 인식되어진다. 판타지화 되어있지 않은 역사는 현실의 실재적 감각을 길어 올리고, 관객은 그 자장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바람이 분다>에서 미야자키는 이에 너무 무감하다.
다른 이야기로도 얼마든지 바꿀 수 있을 것이다. 히틀러 정권 하에서 선동과 이념의 교육 수단으로 변질된 ‘영화’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끝내 영화감독이 되려고 하는 자의 이야기는 어떤가. 다름 아닌 실제 인물 ‘레니 리펜슈탈’을 떠올리면 이야기는 복잡해진다. 그녀는 나치 정권을 노골적으로 선전하는 영화들을 연이어 만들었다. 그중 <의지의 승리>(1935)는 미학적으로 다큐멘터리 역사에 남을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이후, 그녀는 최초의 올림픽 기록영화 <올림피아>(1938) 1부와 2부를 당시 최고의 기술 인력들과 제작하여 다시 한 번 찬사를 받는다. 하지만 그녀는 경탄스러운 기술적 완성도와 미학적 독창성에도 불구하고 나치의 선전용 다큐멘터리 감독이라는 악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녀는 거장인가, 나치의 하수인인가.
레니 리펜슈탈이 나치가 저지른 끔찍한 만행에 직접 개입하지 않았던 한낱 영화감독에 불과하다는 점은 지로가 제국주의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비행기 설계사에 불과하다는 점과 유사하다. 하지만 지로의 비행기는 영화라는 간접 매체와 달리 인간을 직접 상해하는 살상무기라는 점에서 더 무겁다. 과연 이 열정을 객관적인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을까. 개인의 소망과 업적은 세계의 구체적 현실과 유리되어 관계 맺을 수 있을까. 그리고 영화는 예술이라는 미명 하에 이를 허용하거나 무시할 수 있을까. 적어도 미학적 아름다움과 꿈의 고귀함이 그 아래를 떠받치고 있는 현실의 엄중함보다 더 가치 있다고 말할 순 없을 것이다. 예술은 결국 꿈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냉정히 직시하는 것 아니던가.
한편, 지로의 아내 나호코는 당시만 해도 치명적인 질병이었던 결핵에 걸린 채 홀로 남겨져 운명한다. 지로는 꿈이라는 미명 하에 제국주의 전쟁에 간접적으로 기여한 것도 모자라 오로지 꿈의 성취를 위해, 자기희생을 서슴지 않던 아내의 죽음을 외면하기까지 하는 이기적인 인물이다. 언젠가 미야자키 하야오의 장남은 일중독자 기질로 인해 가정에 소홀했던 아버지를 두고 어린 시절 그의 부재를 느꼈다고 고백한 바 있다. 미야자키의 열렬한 지지자 수잔 네이피어는 <바람이 분다>를 “평생을 초인적으로 일만 해온 미야자키 자신에 대한 속죄이자 그를 위해 희생해온 가족과 동료들에 대한 일종의 애틋한 사과(어쩌면 변명)”라며 두둔하지만 작중 지로를 제외하고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는 자는 시범 비행에서 제로센의 눈부신 속도에 감격한 미쓰비시 회사 관계자들과 공군 병사들뿐이다. 아내는 결핵을 앓다가 외로이 죽었고 떠나는 그 순간까지 이렇다 할 보호도 받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지로의 환상으로 표현된 영화의 엔딩에서, 환생한 아내가 그에게 던지는 대사 “살아가세요.”는 일중독으로 가정에 소홀했던 미야자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에게 듣고 싶은 ‘바람’의 말, 그러니까 일종의 판타지의 언어처럼 들린다. 서사와 비주얼의 판타지만 없을 뿐 미야자키 개인의 판타지는 여전히 작동 중인 셈이다. 어느덧 폭격과 화염의 바람은 살랑거리는 포근한 바람으로 바뀌고, 지로는 어떠한 후회나 반성도 없이 그냥 그렇게, 너무나 쉽게 구원받는다.
“살아가세요.”라는 나호코의 말은 사실 이전의 미야자키 작품 속에서 여러 번 등장한 적 있는 대사다. 가장 단적으로 <모노노케 히메>에서 큰 부상을 당한 산에게 아시타카가 “살아!”라고 힘주어 말한 장면이 떠오르지만 그밖에 <붉은 돼지>에도 일맥상통하는 장면이 있다. 1차 세계대전 중 전우를 모두 잃고 홀로 살아남은 트라우마로 돼지가 되어버린 마르코는 마치 비행운의 형상으로 대오를 갖춰 날아가는 동료들의 비행기 무덤을 떠올리며 자책하듯 말한다. “(하느님이) 영원히 홀로 날아다니라고 다시 보낸 거야.” 이 말에는 “영원히 혼자 살라.”는 자신의 다짐과 (하느님의 뜻이 그럴 것이라는) 일종의 믿음이 섞여 있다. <바람이 분다>의 “살아가세요.”와 달리 이 발언이 유독 감동적인 것은 그가 1차 세계대전의 비극과 이에 따른 죄의식과 환멸을 돼지의 얼굴로 명백히 육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르코는 폭력과 탄압의 현실 세계를 누구보다도 근심하고 경멸하는 자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려는 자이며, 살아가야 하는 자다. 유일하게 그만이 비극의 역사를 육체에 아로새긴 증인이자 고백자이다.
이 영화의 정반대에는 꿈의 달콤한 유혹 때문에 외면했던 삶이라는 소중한 모험에 대해 말하는 영화 <업>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현실 감각 없이 꿈의 낭만에 천착하는 자에게 어떤 조언이 소용이 있을까. 꿈은 낭만적인 동시에 가장 폭력적이다. 시야는 좁아지고 주변은 볼 수 없게 된다. 지로는 끝없이 반전의 메시지를 던지며 그저 아름다움을 위해 비행기를 설계하는 것이라 합리화하지만 인간의 영혼은 행동에 있는 법. 그는 제로센 전투기를 설계하면서 단 한 번의 죄의식도 느낀 적이 없으며 비행기 설계의 꿈보다 아픈 아내를 먼저 생각한 적도 없다. 그는 제국주의 전쟁에 가담한 꿈의 노예에 불과하다.
피라미드는 있어야 할까
환상 속에서 카프로니 백작은 지로에게 묻는다. “어떤 세계에 살겠는가? 피라미드가 있는 세계? 아니면 없는 세계?” 지로는 전자를 택한다. 이 선택을 두고 <바람이 분다>를 지지한다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다. 피라미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름 아닌 억압. 철학자 강신주는 어느 강의에서 이렇게 얘기한 적 있다. “거대한 건축양식이 있다는 것은 억압이 존재했다는 얘기이다. 인디언 사회는 노예가 없었기에 고대 유물이 없다.” 아찔한 높이와 거대한 너비의 건축물을 볼 때면 그 위용과 호기에 압도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권력의 표상이자 억압의 구조물이기에 쓸쓸하기도 하다. 과연 이 건축물을 축조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었을까. 지로는 억압에 동의한다. 그 결과가 아름답고 낭만적이라면 그에겐 억압이 있는 곳이 더 이상적인 세계인 것이다. 지로가 미야자키의 자기반영적 인물이 아니라 자화상에 가깝다는 것을 고려하면 그가 그동안 반전주의자와 진보주의자로 살아왔다는 사실이 놀랍게 느껴진다.
과연 피라미드는 있어야 할까. 다르게 표현하면, 꿈은 있어야 할까. 내가 그간 미야자키 하야오의 꿈을 응원했던 것은 그의 꿈이 반전주의와 휴머니즘, 그리고 생태주의 철학에 깊이 가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루팡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의 루팡,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나우시카, <천공의 성 라퓨타>의 파즈와 시타, <이웃집 토토로>의 사츠키와 메이, <마녀 배달부 키키>의 키키, <붉은 돼지>의 마르코, <모노노케 히메>의 아시타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치히로와 하쿠,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소피와 하울, <벼랑 위의 포뇨>의 소스케에 이르기까지 그의 등장인물들은 전부 하나 같이 자기희생을 통해 꿈을 실현하고, 그 결과 목숨의 구제, 자연의 정화, 연민과 사랑, 정체성과 자립심의 확립, 유토피아 구축 등의 이상적 결과를 낳았다. 물론 꿈의 구현이 항상 긍정적으로 귀결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그 반대라면 인물의 성격적 결함이나 도덕적 몰락의 과정이 서사에 배어 있거나, 그 기틀을 형성하는 영화적 형식이 이를 비판적으로 주시하거나, 적어도 객관적 자리에서 이를 진지하게 고찰하고 있음을 시사해야 한다.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 꿈의 형상은 폭력적이고 맹목적이며 한편으론 허무하다. 그렇기에 나의 세계에는 피라미드가 필요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