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란 응당 자신이 당한 그대로의 방식으로, 최소한 그와 가장 근접한 방식으로 되돌려주는 게 엄연한 수칙이다. <복수의 립스틱>은 이 복수의 절차를 철저히 준수하면서 그것의 가장 극단적 광경을 선보인다. 타나는 두 명의 남자에게 강간을 당하고, 그 형용할 수 없는 분노를 해소하기 위해 도시의 불량배들에게 45구경 권총을 들이민다. 이 권총으로 말할 것 같으면 타나에게 강간을 범한 두 번째 괴한이 들고 있던 길쭉한 것으로, 쾌감의 절정이 지나자 바닥에 힘없이 떨어지고 마는, 남성기의 명백한 표상이다. 그녀는 이 더러운 성기를 다른 남자들에게 들이밀며, 한번 행해지면 결코 돌이킬 수 없는 ‘격발’의 경험, 그러니까 ‘사정’이라는 추잡한 경험을 선사한다. 이것은 도저히 씻을 수 없는 죽음의 순간이다. 동성에게 강간당하는 것만큼 남자가 두려워하는 게 또 있을 리 만무하니까.
타나가 이 격발의 쾌감을 선물하지 못하는 유일한 남자는 아내의 불륜, 그것도 다른 여성과의 외도를 목격하고 절망한 가여운 유부남이다. 여성의 부도덕한 욕망에 버려진 남자에게 타나는 총을 쏘지 못한다. 오히려 이번에는 남자가 자기 머리에 직접 총을 쏘며 죽는다. 결연한 표정으로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는 이 남자는 단순히 절망감에 굴복하여 자살하는 게 아니다. 몸소 남성기의 사정을 경험하며 동성 간 섹스라는 동일한 방식으로 아내에게 복수를 하는 것이다. 모름지기 복수란 자신의 죽음을 담보하지 않고는 행할 수 없는 처절한 것 아니던가.
흥미롭게도 아벨 페라라는 이 비장한 결기 속에 폭력과 분노, 복수의 서사를 구축하면서도, 많은 이들이 그와 결부시키곤 하는 치유, 용서, 구원과 같은 대립항들을 일제히 소거한다. 그의 세계는 이미 어떤 지독한 폭력에 물들어 있고, 이에 희생당한 자가 다시금 그 폭력을 재현하며, 종국에 피의 학살이 행해지는 파국의 공간이다. 여기엔 복수의 대표적 부산물이라 할 수 있는 카타르시스마저 부재하다. 아벨 페라라는 초중반부 몇 번의 복수 행위에서 여타 복수 영화가 그토록 성취하고자 염원하는, 그래서 결말까지 최대한 지연시키곤 하는 응징의 카타르시스를 일찌감치 제공한 다음, 도저히 쾌감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혐오의 감정을 적극적으로 표출한다. 타나의 총구는 이제 강간범에 머물지 않고, 진한 애정행각을 벌이거나 그런 욕망에 사로잡힌 남성, 심지어 결말부 무도회 장면에 이르러서는 그럴 의심의 여지조차 보이지 않는 일반 남성에게로까지 향한다.
이때부터 우리를 짓누르는 건 타나의 복수가 정신병적인 수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데에서 생기는 도덕적 불안이다. 납득할 수 있는 도덕의 범주를 벗어나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는 유약한 자에게는 이제 최후의 심판이 내려져야 한다. 그리고 그 방식은 그녀가 저지른 범죄의 방식, 달리 말하면 그것을 가능케 한, 그녀에게 가해졌던 태초의 범죄 방식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 할로윈 파티가 열리는 무도회장에서 그녀는 평소 마음에 들지 않았던 회사 사장을 처단한 다음, 그곳에 참여한 남자들에게 막무가내로 총격을 가하다 다른 여성에게 살해당한다. 이때 가해자 여성은 자기 음부 앞에 뾰족하고 긴, 말하자면 남성기로밖에 보이지 않는 칼날을 세워 타나의 뒤를 기습적으로 찌른다. 허락되지 않은 성기의 재침입. 요컨대 타나는 실체적 성기로 영혼을 잃고, 상징적 성기로 육체를 잃는다. 그녀는 성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잃는다.
* 영화 속 인상적으로 흐르는 조 델리아의 사운드 트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