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적 관계라 하여도 그것이 진실을 담보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욕망의 우선순위는 주체가 처한 상황에 따라 우연적으로 나열된 것일 뿐 그 무엇도 거짓이지 않다. 하마구치는 여기에 도덕의 잣대를 들이밀기보다 인간의 욕망에 깃든 모순성을 적나라하게 들추어내는 데 집중한다. 그가 보여주는 인간의 이기심과 폭력성은 허구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진심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진심이 아닌 것이 없다면 역으로 그 무엇도 진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렇게 물을 수 있다. “내가 욕망하는 것은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인가.” 극중 인물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착각하고 있거나, 합리화하고 있는 듯 행동하고, 욕망의 대상을 너무도 쉽게 교체한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이 그들의 진실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러니 <열정>에서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기 욕망에 대한 명확한 인지보다 그것의 선제적 표출이 다양한 형태의 폭력을 만들어 낸다는 점이다. 인간은 진실인지 허구인지 알 수 없는 욕망의 늪에서 허우적대다 그것의 파국을 경험한 다음에야 뒤늦게 참회하는, 그러나 다시금 그 과정을 반복하는 어리석은 존재다. 만일 이러한 하찮은 면모에도 인간에게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용서의 가능성 때문일 것이다. 비록 용서가 모든 폭력을 포용할 수는 없어도 그 추한 행태를 얼마간 무화시킬 수는 있다. 하마구치는 욕망의 본질을 탐구하며 그에 대한 탄식과 희망의 절묘한 부딪힘을 아름답게 추출해낸다.
<열정>은 거장 하마구치 류스케가 대학원 과정에서 찍은 장편 데뷔작으로 지금의 작품들과 비교하면 다소 엉성하게 느껴진다. 특히, 가호와 도모야가 친구들이 전부 모인 생일 파티에서 결혼 소식을 전하는 초반부 장면은 하나의 완성된 미학이라기보다 그것을 찾아 헤매는 젊은 감독의 패기 넘치는 실험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미완의 미학이 기묘한 인상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도통 알 수 없는 속내와 단절된 관계를 보여주기 위해 한 화면에 한 명의 인물만을 담는 일련의 쇼트들은 시선의 불일치와 사운드의 부조화와 결합되면서 관객을 불안에 빠트린다. 이때 다른 소리는 소거된 채 유일하게 들려오는 대사의 주체가 외화면에 존재함으로써 내화면의 인물은 소리 없이 입만 벙끗 움직이는 듯 묘사된다. 그렇게 우리는 그들의 말과 소통에 가닿을 수 없는 상태에 머물며 인물의 수수께끼와 같은 심리를 파악하는 데 끝까지 실패하고 만다. 하마구치는 이렇게 묻는 것 같다. “인간의 언어가 진실을 담보하나요?” 언어가 원활한 소통의 매개체일 수는 있지만 그것이 항시 진실한 소통의 시발점일 수는 없다. 사랑한다고 수천 번 말해도 그것이 진실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때로 본인도 모른다. 그렇다고 믿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언어는 인간의 믿음의 지표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