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한 인간 ‘머피’는 갱스터들에게 처참히 살해당한 뒤, 티타늄 외피로 덮인 고철 기계 ‘로보캅’으로 부활한다. 회생 가능한 몇 안 되는 부위였던 왼쪽 팔마저 절단당하고 오로지 안면부만 건재한 이 존재는 프로그래밍된 시스템의 명령과 일말의 자유의지 사이에서 충돌을 빚으며 인간과 기계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든다. 다만, 이 모호성은 과거의 머피와 현재의 로보캅 사이의 물리적 결합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둘의 근간을 이루는 심연적 요소의 융합에 기초한다. 중반부, 완전한 로봇처럼 보였던 로보캅은 인간 머피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자신을 살해한 적대자들에 대한 복수심, 그리고 가족에 대한 사랑을 감각하게 된다. 이때부터 로보캅은 그 이전의 고철 기계와는 다른, 일종의 돌연변이로서 새롭게 태어난다.
온전한 기계를 절반의 기계로, 절반의 인간으로 만들어 인간-기계-반인간/반기계라는 도식을 가능케 한 것은 무의식 속에 표류하고 있던 기억 때문이다. 인간과 기계의 구분은 기억의 유무로 나뉘고, 이 기억은 특정 감정을 만들어냄으로써 자유의지를 행사토록 한다. 로보캅이 떠올리는 기억은 두 가지다. 클라렌스 일당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했던 기억과 사랑하는 가족에 대한 기억. 흥미로운 것은 로보캅이 떠올리는 두 기억에 인간 머피가 삭제되어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로보캅의 회상 장면에서 살인과 사랑이라는 대립적인 행위를 목격하지만 그것을 몸으로 받아내는 머피의 존재는 발견할 수 없다. 두 장면은 영화 내내 로보캅에게 독점되었던 그의 시점 쇼트로만 찍혀 있어 머피의 온전한 형상을 담은 객관적 쇼트가 부재하다. 클라렌스 일당과 머피 가족의 액션이 이에 대한 로보캅의 처절한 리액션과 순차적으로 편집되어 있다는 점은 그 공간의 주인이 머피가 아니라 로보캅이라는 점을 여실히 드러낸다. 그렇게 머피는 그곳에 있었으나 그 존재를 부정당하는 유령적 존재로 남는다. 로보캅이 떠올리는 건 머피의 기억이 보증하는 구체적 사실이 아니라 그것이 남긴 감정의 잔상이다. 요컨대 복수심과 사랑은 인간이 되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로보캅이 클라렌스 일당에게 가하는 복수는 사적인 것이면서 동시에 공적인 영역에 속한다. 클라렌스는 머피를 포함하여 수많은 경관들을 살해한 잔인무도한 갱스터지만 순간의 객기와 충동으로 움직이는 단순한 인물이 아니다. 그는 경찰 권력을 위임받아 디트로이트의 치안을 담당하는 사기업 OCP의 2인자 딕 존스와 상부상조하는 사이다. 딕 존스는 로봇을 도시의 치안뿐 아니라 전쟁 무기로까지 활용할 계획을 가진 인물이다. 때문에 도시에서는 계속 범죄가 일어나야 하고, 이를 막기 위해 투입된 로봇들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 국가에서 물리적 폭력을 허용하는 유이한 조직인 경찰과 군대가 한 사기업에 의해 통제되고, 비루한 갱스터와 유착되는 음울한 디스토피아적 세계에서 로보캅의 총구는 그렇기에 특정 인물에 국한되지 않고 부패로 가득한 자본과 권력, 그리고 공공기관의 민영화라는 사회 문제로까지 겨냥된다.
그러나 슬프게도 로보캅에게는 끝내 해결하지 못한 과제가 남아 있다. 그는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디트로이트를 떠난 그의 가족과 만나지 못했다. 복수를 위해 길거리와 클럽, 제철소를 누비던 것과 달리 그는 가족을 찾기 위해서는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는다. 그에게 복수와 사랑 중에 더 우선시되는 것은 복수다. 제아무리 위대한 사랑이 있다한들 그것이 불타는 복수심을 막지는 못할 것 아닌가. 이제 모든 거사를 마무리한 로보캅에게 남은 것은 사랑에 대한 갈구뿐이다. 그간 동료 형사인 루이스가 그 자리를 메워주긴 했지만 그것만으로 결핍된 가족애가 충족될 리는 없다. 딕 존스에게 무참히 총격을 가한 뒤, 어두운 욕망의 표상처럼 그려지는 OCP의 회의실을 떠난 로보캅의 다음 할 일은 가족을 찾아 디트로이트를 떠나거나 새로운 가족을 만들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어쩌면 클라렌스의 총격을 맞고 쓰러진 루이스가 최초의 여자 로보캅이 되어 그의 가족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원조 로보캅이 죽어가는 그녀에게 건넨 말처럼 자본과 기술이 “뭐든 다 고쳐”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