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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스텔로 Mar 27. 2023

2022년 영화 추천 BEST 10


2022년 영화 추천 BEST 10


게시글은 2022년 연말에 게시한 '2022년 올해의 영화 BEST 10'을 재편집한 입니다.



10. 실종 (Missing) / 가타야마 신조



봉준호 감독의 최고작 <마더>에서 조감독을 맡았던 가타야마 신조는 본인의 자비로 데뷔작 <벼랑 끝의 남매>를 만든 뒤, 마침내 <실종>에 이르러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어 냈다. 올해의 발견이라 해도 좋을 가타야마 신조는 스릴러 장르라는 거대한 골격을 세워두고 보기 좋게 컨벤션을 배반한다는 점에서 봉준호스럽고,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며 속내를 알기 어려운 인물을 내세운다는 점에서 구로사와 기요시스럽다. 또한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Blow Up> 마지막 장면, 광대들이 판토마임으로 테니스를 치는 광경을 주인공이 우두커니 바라보는 모습을 영리하게 비틀어, 괴물로 변해 버린 아버지를 경찰에 신고한 딸이 작별을 앞두고 그와 보이지 않는 탁구공으로 랠리를 이어가는 명장면을 길어 올렸다. <Blow Up>의 마지막 장면을 통해 안토니오니가 '혼자만 아는 진실이 가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면 가타야마 신조는 안토니오니의 이성적 질문을 짙은 감정의 형태로 치환한다. 보이지 않는 탁구공은 아버지와 딸만이 주고받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그들만의 약속을 암시하며 애틋한 정서를 획득한다. 딸의 윤리적 사랑은 종국에 우리 마음을 고요히 어지른다.


<실종>은 감동적인 영화지만 작품 전반은 대체로 음울하다. '인간은 살 만한 가치가 없다.'라고 여겼던 위대한 소설가 다자이 오사무의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은 작중 연쇄살인마 야마우치 테루미는 자살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대신 죽이면서 돈을 번다. 어린 딸 카에데를 둔 홀아비 사토시는 궁핍한 삶에 지쳐 그 끔찍한 살인마와 함께 돈을 벌다가 어느새 그를 살해하고 그의 몫까지 챙기는 괴물이 되어 버린다. 살인마와 살인마. 자신의 생을 끝내려고 안달난 사람들. 그리고 죽은 어머니를 잊지 못한 채 집 나간 아버지를 찾다가 거의 신경쇠약 상태가 된 카에데. 한마디로 여기에 정상적인 사람은 없다. 가타야마 신조는 정신분열에 다다른 비정상인들을 한데 불러모아 지독히도 염세적인 세계를 구축한다. 말할 것도 없이 그 세계는 그들이 머물고 있는 현재 일본 사회에 대한 은유다. 삶에 지쳐 있고, (살인과 자살이라는) 폭력을 행사하며, 정신적으로 분열되어 있는 인물들의 모습은 불안정한 경제 상황과 높은 자살률, 양극화된 이념으로 얼룩진 일본의 현 상황과 절묘하게 조응한다(영화가 공개되고 약 1년 뒤, 아베 신조가 암살되는 희대의 사건은 현 일본의 분열적 국면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아닐까). 영화의 마지막에서 카에데가 살인마의 길을 택한 아버지를 경찰에 신고하며, 그것이 아버지에게 할 수 있는 딸의 윤리적 사랑임을 고백하는 대목은, 그래서 더 비통하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일본의 청년 세대가 아버지 세대의 죄목을 좌시하지 않고, 존중과 사랑을 담아 심판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실종>은 미스터리 스릴러라는 장르의 외피를 두른 채 깊고도 어두운 은유적 풍경을 탁월하게 재현한다.



9. 아마겟돈 타임 (Armageddon Time) / 제임스 그레이



"더 나아진 세상을 보고 싶다면 정직하게 돌아보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향수라고 부를 만한 걸 없애고 싶었다. 맑은 눈으로 돌아보고자 했다. 진짜라고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이 세상을 진정으로 반영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자기 이야기를 쓰는 것이 괴로운 이유는 자신의 치부와 도덕적 결함을 직시하고, 자신에게 가해졌던 온갖 폭력들을 다시 떠올려야 하기 때문이다. 부정하고 싶은 선택들, 그리고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들로 인해 사적 기억은 대개 미화되고 보정된다. 아마 자신의 이야기를 실제로 써본 사람이라면 이 미화와 보정의 유혹을 견뎌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공감할 것이다. 작가는 그 순간 일류 변호사가 되어 온갖 불의한 선택에 그럴 듯한 변명을 늘어놓고, 끔찍한 폭력의 순간들을 거듭 외면한다. 대신 과거를 낭만과 노스탤지어의 공간으로 탈바꿈시킨다. 이 미화의 과정은 심지어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거의 무의식적으로 벌어질 때가 많아 냉철한 자기 인식과 비판적인 퇴고가 반복되지 않는 한 잘라내기 매우 어렵다. 그러나 제임스 그레이는 집착이라 할 만큼 고증에 신경 쓰며 자신의 어렸을 적 이야기를 거의 그대로 써나가면서도 결코 과거를 낭만적으로 미화하거나 보정하지 않는다. 그에게 과거의 기억은 현재의 삶을 보다 냉정히 바라보기 위한 진실의 도구이고, 영화는 그 진실의 크기를 가늠하고 성찰하기 위한 수단이다. 제임스 그레이는 솔직한 예술가다.


 <아마겟돈 타임>은 레이건 시대의 도래를 알린 198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아메리칸 드림의 종말과 인종 차별이라는 어두운 역사를 조명한다. 이제 초등학교 6학년이 된 폴 앞에는 점점 심화되는 차별과 급속히 계급화되는 암담한 사회가 있다. 폴은 자신의 정신적 지주이자 도덕과 이상의 표본이던 외할아버지를 잃은 후 억압과 폭력이 뒤섞인 집구석을 떠나기로 작정한다. 폴은 유일한 친구 죠니에게 학교 컴퓨터를 훔쳐 전당포에 판 다음, 그 자금으로 플로리다로 떠나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계획은 보란듯이 실패하고 둘은 경찰에 체포당한다. 폴은 아버지가 담당 경찰관의 배관을 수리하고 돈을 받지 않았던 일로 인해 운 좋게 처벌을 면하지만, 곧 시설에 보내지는 외할머니 밑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자란 흑인 소년 죠니는 이내 소년원에 수감될 일만 남았다. 폴은 끔찍한 차별과 이민의 역사를 겪은 유대인의 후손이며 평범한 중산층에 불과하지만, 점차 자신과 하층민 사이의 격차가 벌어지고 있고, 그로 인해 본인도 모르는 사이 보이지 않는 특권을 갖게 되었음을 깨닫는다. 상류층에게만 해당할 것 같았던 특권이라는 단어가 실제로는 철저하게 계급화되어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제임스 그레이는 적확하게 지적한다.


<아마겟돈 타임>은 관객으로 하여금 불의에 맞설 용기와 인간으로서 행해야 할 최소한의 도덕에 대해 사유하게 만든다. 국립학교에서 사립학교로 전학을 가게 된 폴은 흑인을 차별하는 그곳에서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죠니와 거리를 둔다. 폴에게 이상한 기류를 감지한 죠니는 낙담하지만, 폴을 배신하지 않는다. 이윽고 둘은 서로의 고통스러운 가정사를 공유하며 일시적으로 화해한다. 하지만 학교 컴퓨터를 훔쳐 전당포에 팔려던 계획이 실패하고 경찰에 붙잡혔을 때, 폴은 흑인이라는 이유로 더 가혹하게 신문받는 죠니를 홀로 두고 경찰서를 빠져나온다. 담당 경찰관과의 과거 인연으로 폴이 풀려날 수 있게 도운 아버지는 어느 때보다도 심각한 표정으로 얘기한다. "오래전에 배운 게 있는데 행운이 찾아왔을 땐 감사해야 한다는 거야." 이 말의 영향 때문인지 폴은 죽은 외할아버지의 유령과 만나 "노력했어요."라고 소심하게 항변한다. 그러나 "계속 노력하렴. 절대 그놈들한테 져선 안 돼."라고 조언하는 외할아버지의 말에 따라 폴은 흑인을 차별하는 사립 학교의 추수감사절 파티장을 거침없이 빠져나온다. 이 사소한 저항은 비록 미약하지만 불의에 지지 않기 위한 어린 소년의 고결한 각성으로서 형용하기 힘든 감동을 안긴다.


영화를 보며 적어도 저 어린 소년만큼의 용기와 도덕의식은 지니고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폴의 외할아버지가 조언한 것처럼 계속 노력하다 보면 어느 순간 그놈들한테 절대 지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지 않을까.



8. 우연과 상상 (Wheel of Fortune and Fantasy) / 하마구치 류스케



작년에 이어 하마구치 신드롬은 계속되는 것 같다. 그 영향 덕분에 특별전의 형식으로 그가 대학원 과정에서 찍은 장편 데뷔작 <열정>이 상영되기도 했다(참고로 <열정>은 정식 개봉작이 아니기에 이번 게시글에 기술하지 않았지만, 특별 언급 리스트 상단에 올리고픈 수작이다). 데뷔작 <열정>부터 <우연과 상상>에 이르기까지 하마구치 류스케는 인간 내면의 욕망과 그것에 대한 무지로 인해 고통받는 일상적 사람들을 그려왔다. 그에게 인간이란 진실인지 허구인지 알 수 없는 욕망의 늪에서 허우적대다 그것의 파국을 경험한 다음에야 뒤늦게 참회하는, 그러나 다시금 그 과정을 반복하는 어리석은 존재다. 그러나 다행히 인간에겐 용서의 가능성이 남아있다. 이때 용서는 타인뿐 아니라 자신에게 행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내면의 욕망을 인지하고, 자신 또는 타인을 용서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하마구치는 자기 내면의 진실, 다르게 말하면 가슴속에 억누르고 있던 진심을 발견하는 것을 그 시발점으로 여긴다. 때문에 하마구치의 카메라는 인물이 자신의 진심을 솔직하게 발화할 때까지 충분히 기다리는 경청의 카메라로서 구동된다. 하마구치는 삶의 문제를 외부로 돌리지 않는다. 표면적인 곤경은 외부에서 발생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항상 인간 내부에 잠들어 있다. 그러니 해답도 인간의 내부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하마구치는 현존하는 감독 가운데 가장 대사를 잘 쓰는 사람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언어를 믿지 않는다. 언어는 진실을 담보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한다고 천 번을 말해도 그 사람이 정말 상대를 사랑하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렇기에 그의 영화에서 중요한 건 <해피 아워>에서도 강조되듯 '커뮤니케이션'이 아니라 '커넥션'이다. 언어로 이뤄지는 상호 소통은 오해가 발생하고, 과장되며, 때로 전혀 이해되지 않는 식으로 미끄러진다. 그러나 서로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은 언어로는 불가능한 마법 같은 힘을 만든다. 그것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정서적 연대를 의미한다. 마치 실체 없이도 몸으로 느끼는 데 전혀 무리가 없는 공기처럼 커넥션은 논리와 이성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 분명히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마법이다. 하마구치는 그 마법을 찍는 감독이다. 때문에 화려한 카메라 워크나 실험적인 편집 등의 테크닉은 그에게 별 의미가 없다. 그는 배우들의 연기를 통해 그 마법이 실현되길 바라며 인고의 자세로 영화를 찍는다. 표면적으로 그의 영화는 얼핏 평이하게 보이지만, 일단 서사가 진전되고 나면 관객은 하마구치의 마법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된다.


<우연과 상상>은 이러한 하마구치의 인장이 짙게 묻어 있는 영화다. 하마구치는 일상적이면서도 밀도 높은 대사들을 통해 인물의 잠들어 있는 감정과 욕망을 소환하여 내면의 진실과 커넥션의 감각을 상기시킨다. 이때 흥미로운 것은 이 모든 서사의 밑바탕에 우연이라는 요소가 첨가되어 있다는 점이다. 총 세 개의 단편으로 구성된 <우연과 상상>은 우연이라는 무질서의 질서를 빌려와 영화라는 상상으로 인물의 메마른 내면을 적시는 신비로운 영화다.


첫 번째 에피소드의 주인공 메이코는 절친 츠구미가 자신의 전 남자친구 카즈아키와 최고의 하루를 보냈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된다. 딱 한 번의 만남이었지만 츠구미는 어떤 걸 했어도 좋았을 거라며 그날은 마법 같은 순간이었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그들은 하루만에 커넥션을 이룬 것이다. 메이코는 그 말을 듣고 카즈아키를 찾아간다. 그녀는 그녀만의 방식으로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한다. 처음에는 상대를 비난하고 조롱하기 바빴던 그녀는 종국에 사랑을 고백하며 커넥션의 단초를 마련한다. 이는 카즈아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서로에 대한 불만을 솔직히 털어놓은 뒤, 아직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그 순간 사랑이라는 보이지 않는 연결고리가 둘 사이를 잇는다. 때문에 그들은 재회하지 않더라도 사실상 연인의 지위를 다시 획득한 것과 다를 바 없다.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나오는 섹스 파트너 사사키의 요구로 세가와 교수를 미인계로 유혹해 곤경에 빠뜨리려 한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세가와에게 상담을 받는 처지에 놓이며 공격권을 잃는다. 그녀는 세가와와의 내밀한 상담을 통해 가벼운 유혹에 빠져 사는 자신의 삶에 대한 근원적 불안을 직시하고, 타인의 시선에 예속받는 삶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을 발견한다. 그렇게 그녀는 예기치 않은 상담을 통해 세가와와 커넥션을 이룬다. 비록 그녀의 실수로 그와 나눈 음담패설 녹음 파일이 세간에 알려져 둘은 물리적으로 영영 분리되지만, 그녀는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도 그를 마음에 품고 있다. 나오와 세가와는 평생 볼일이 없더라도 내면 속에서 끝없이 말과 감정을 주고받는, 영혼의 관계로 남을 것이다.


세 번째 에피소드는 가장 독특한 형태로 진행된다. 역 에스컬레이터에서 우연히 만난 나츠코와 아야는 서로 전혀 모르는 사이임에도 친구로 착각하여 한동안  절친한 사이처럼 대화하고 행동한다. 곧 오해는 풀리고 실망한 나츠코는 아야의 집을 떠나려 하는데, 마침 집에 도착한 택배 기사가 그녀를 막아세운 탓에 그녀는 계속 그곳에 남게 된다. 우연에 우연이 더해져 둘은 가까워질 기회를 얻는다. 아야를 자신의 첫사랑 미카로 착각했던 나츠코에게 아야는 역할 놀이를 제안한다. 자신이 미카가 되어 주겠다는 것이다. 처음엔 반감을 표하던 나츠코는 서서히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녀는 아야가 아닌 어딘가에 살고 있을 미카에게 과거에 하지 못했던 말을 건네고,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을 표출한다. 다른 실체를 가져다 놓고 커넥션의 감각으로 진심을 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하마구치의 세계에서 진실은 눈에 보이는 곳에 있지 않다. 내면과 정신, 그리고 영혼 속에 깃들어 은밀히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할 뿐이다.


영화로 '진심'과 '커넥션'을 찍는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하마구치는 그 불가능할 것 같은 작업을 기어이 해낸다. 말할 것도 없이 지금 일본 영화의 최전선에는 하마구치가 있다.



7. 애프터 양 (After Yang) / 코고나다



명상적인 방식으로 감동의 잔물결을 일으키는 것은 비범한 일이다. 코고나다는 수면 위에 떨어진 잉크가 동심원을 그리며 점차 확산되는 것처럼 조용히 관객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파동을 일으킨다. 뿐만 아니라 서정적이면서도 생경하게 묘사한 미래의 변화된 풍경은 여타 SF 영화에서 느낄 수 없었던 새로운 감각을 지각하게 한다. 특히, 제이크가 양의 기억 장치에 접속해 기억의 단편 세계를 여행하는 대목은 마치 은하수를 탐험하듯 지나칠 정도로 아름다워 따로 떼어 보관하고 싶을 정도다. 더불어 군데군데 들어간 감성적인 인서트들, 예컨대 물속을 떠도는 찻잎, 포근한 햇살에 물든 녹음,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지고 있는 태양 등의 이미지는 영화의 정서적 맥락과 탁월하게 조응하며 우리를 매혹시킨다.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비인간인 양의 기억과 인간의 기억이 약간의 시차를 두고 반복된다는 점이다. 이 시차로 인해 버퍼링에 걸린 듯 같은 대사가 두 번 제시되는데, 의미 없는 기억은 재빨리 소멸되는 것이 인간의 생리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러한 설계는 그들이 같은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물론이고 그 기억이 서로에게 무척 귀중한 순간이었음을 탄로한다. 내게 소중한 기억이 상대에게도 소중한 것이라는 확답을 받았을 때 그 먹먹한 감동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 것이다. 더군다나 그 대상이 인간이 아니라 안드로이드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생각지도 못했던 대상이 나의 소중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 그 기억을 열렬히 사랑했다는 것. 그것만큼 감동적인 일이 또 있을까.


반면, 제이크는 사랑과는 거리가 먼, 양보다 더 안드로이드 같은 인물이다. 미래의 운송 수단으로 보이는 자동차 안에서 그는 그의 딸 미카와 단 한 번도 같은 프레임에 담기지 못한다. 그들은 서로 마주 보도록 되어 있는 좌석에 앉고도 각자의 프레임에 갇혀 있다. 심지어 작동을 멈춘 양을 옆자리에 두었을 때조차 그는 창문이라는 또 다른 프레임에 갇힌 것처럼 보인다. 그의 아내는 차에 타지 않고 오직 전화통화로만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말하자면 제이크는 사실상 인간과 소통할 수 없는 고립된 기계이다. 시종 표정 변화가 없고, 느릿느릿 움직이며, 안드로이드가 그러하듯 잠을 자지 못하는 그의 특성은 이 기계설에 타당한 근거가 된다(다른 가족 구성원들과 다르게 제이크의 자는 장면은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심지어 안드로이드 '양'조차 영화 초반부 미카와 함께 소파에 잠들어 있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자는 척을 하는 것이겠지만).


유일하게 자동차 안에서 타인과 단절되지 않는 사람은 양의 여자 친구 '에이다'다. 이 대목에서 에이다는 양이 보고 싶다는 미카에게 양이 그녀를 정말 사랑했으며, 매일 그녀에 관해 이야기했다고 알려준다. 관계의 감옥처럼 운용되던 쇼트는 서로의 사랑이 확인될 때 비로소 그들을 끌어안는다. 그러니까 결국, <애프터 양>은 사랑에 관한 영화다. 사랑이라는 위대한 가치만이 단절을 화합과 소통으로 이끈다. 양에게 남편과 아버지로서의 책무를 전부 전가시켰던 제이크 역시 양의 러브 스토리를 보고서 사랑의 가치를 깨닫는다. 그는 인간의 탈을 쓴 안드로이드가 아니라 상대를 사랑할 줄 아는 당당한 인간으로 발돋움한다. 그는 소원했던 아내와 화해하고, 새벽마다 양과 함께 물을 마시러 나오는 딸 옆에 양 대신 자리한다. 이제 제이크는 아내의 요청대로 그만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애프터 양>은 우리로 하여금 자문하게 만든다. "내가 '양'이라는 비인간보다 더 인간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나를 인간으로, 나를 나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사랑의 가치를 알고 있는가?" 좋은 영화는 사유의 장을 마련하고 종국에 관객을 성장시킨다.



6. 메모리아 (Memoria) /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내게 거대한 도전처럼 여겨져 왔다. 완전히 새로운 세계에 접속하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그가 섬세하게 재현한 미세한 움직임, 보일 듯 말 듯한 미물 하나까지 전부 포착해야 하는 고된 작업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런 강박으로 인해 불안은 점점 커져갔고, 최고의 몸 상태가 아니면 그의 영화를 감히 봐서는 안 된다는 이상증세에 시달렸다. <메모리아>는 그러한 불안을 품고 관람한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첫 작품이었다.


<메모리아>는 여타 영화들과는 완전히 다른 시네마적 체험을 안겨준다. 초현실적이고, 기이한, 말로 설명하기 힘든 분위기가 영화 전체를 감싼다. 이 마법 같은 현상에는 틸다 스윈튼이라는 위대한 배우의 몫이 크다. 콜롬비아 현지에 놓인 장신의 백인 틸다 스윈튼은 거기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곳을 천천히 걸어다니는 것만으로도 이 세계 사람이 아닌 듯, 무언가 비현실적인 존재처럼 여겨진다. 이러한 비현실성은 서사가 전개될수록 점차 강화되다가 종국에 SF적 쾌감마저 선사한다. 느닷없는 쿵! 소리에 새벽에 잠이 깬 제시카는 그 소리의 기원을 찾아 떠난다. 흥미롭게도 그 소리는 그녀 자신만 들을 수 있는 내면의 소리다. 말하자면 제시카는 그 세계에 어울리지 않는 이물질 같은 존재인 것이다. 더불어 그녀의 기억은 동생과 주변 사람들의 기억과 계속 충돌한다. 제시카가 A라고 말하면, 다른 이들은 Z라고 말하는 식이다. 그렇다면 제시카는 이 세계에 속한 사람이 아닌 것인가. 모호한 제시카의 정체성은 강력한 미스터리를 확보하며, 집요할 정도로 느리고 정적인 화면 속에서도 특별한 긴장감을 형성한다.


영화는 제시카가 소리의 기원을 찾기 위해 만난 두 명의 에르난을 기준으로 희미하게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뉜다. 첫 번째 에르난은 사운드 엔지니어로 그녀가 들었던, 지구 중심부에서 날 것 같은 둔탁하고 웅장한 쿵 소리를 거의 유사한 형태로 만들어 낸다. 그런데 첫 번째 에르난은 그러고서 불현듯 유령처럼 사라진다. 더 이상한 것은 마치 원래부터 그곳에 있지 않았던 것처럼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단순한 우연일 수도 있지만, 이는 무언가 세계가 바뀐 것 같은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이후, 숲속을 걷던 제시카는 두 번째 에르난을 만난다. 첫 번째 에르난이 사운드를 모방하고, 결합하고, 창조하는 자라면, 두 번째 에르난은 소리를 저장하고, 기록하는, 그의 말에 따르면 기억의 저장장치이다. 공통점은 소리를 매개로 제시카의 정체성을 찾아주려 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서사나 이미지는 부차적인 문제다. 한 인간의 실존을 소리로 감각하게 하는, 이 말도 안 될 것 같은 일을 두 번째 에르난은 해낸다. 그는 제시카가 들었던 소리는 물론이고 세계의 모든 소리를 전부 감각하고 기억할 수 있는, 작중 가장 초월적인 존재다. 이내 제시카는 자신이 그의 기억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쿵 소리 역시 그의 기억 속 소리라는 것을 깨닫는다. 두 번째 에르난은 그녀의 팔에 손을 살포시 올리고는 자신의 퇴적된 기억들을 그녀에게 전이시킨다. 그렇게 제시카는 기억의 지층을 더듬어 올라가며 알 수 없는 슬픔과 감격을 느낀다.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은 이 기이한 순간을 오직 여러 개의 레이어로 구성된 소리로만 채운다. 기억이 소리라는 형태로 전이되고 감각되는 마법 같은 장면은 놀라운 영화적 체험으로 남는다.


마침내 제시카는 쿵 소리의 기원을 알게 된다. 그것은 미지의 우주 비행선이 출발하며 일으킨 소닉붐 소리였다. 그렇다면 제시카에게만 들리는 내면의 소리이면서, 두 번째 에르난의 기억에 존재하는 소닉붐 소리는 그들이 평행 우주를 넘나드는 낯선 존재들이라는 점을 암시하는 걸까. 위에 기술한 내용대로 제시카는 그곳에 어울리지 않는 초현실적 존재처럼 비치는 데다, 타인과 상충되는 기억으로 가득한 존재다. 그러나 영화는 이에 대한 명확한 답을 제시하기보다 소리로 재생되는 기억의 감각에 더 집중한다. 모호하고 난해하지만, 압도적인 사운드스케이프와 정글의 이미지는 여러 가능성을 응축하며 화면을 완전히 장악한다. 한마디로 화면에 굉장한 것들이 계속 지나간다. 올해 개봉작 중 가장 강렬한 영화적 체험이었다.



5. 해탄적일천 (That Day, On The Beach) / 에드워드 양



에드워드 양은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대만의 혼란스러운 역사와 그 자장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집단의식과 그로 인한 불안을 섬세하게 재현한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 있다. "<해탄적일천>은 현대인의 고독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요. 대만의 역사를 바라보는 내 내면의 혼란을 그리는 영화입니다." 여기서 에드워드 양이 느꼈던 내면의 혼란은 무엇일까. 그는 어째서 <해탄적일천>을 찍게 된 것일까.


에드워드 양은 25살에 미국으로 건너가 플로리다 대학교에서 전기공학 석사를 받은 후 USC 대학에서 영화를 공부하다 1981년이 되어서야 대만으로 돌아온 사람이다. 때문에 그는 불안과 격동의 시기였던 대만의 1970년대를 경험하지 못하였다. 마오쩌둥에게 패배한 장제스가 국민당 정부의 지지 세력과 본토인들을 대거 이끌고 망명을 떠나 대만을 통치한 이래, 하나의 독립국으로 인정받기 위한 노력은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완전히 붕괴되기 시작했다. 유엔은 중화민국이 아닌 중화인민공화국을 합법적인 중국의 대표로 인정하였고, 1978년 경제 개방 이후 중국이 미국과 수교를 맺으면서 대만을 독립된 국가로 인정하는 나라는 점차 감소하였다. 많은 전문가들은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이어진 문화대혁명이 아니었다면 둘 사이에 필연적으로 전쟁이 벌어졌을 거라고 말한다. 요컨대 에드워드 양에게 1970년대는 대만인으로서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시대인 것이다.


영화는 1960-70년대를 살아온 린자리가 오빠 린자썬의 전 여자 친구이자, 유명 피아니스트가 되어 13년 만에 대만으로 귀국한 탄웨이칭에게 본인의 과거사를 들려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때, 탄웨이칭은 그 이력만 보더라도 사실상 에드워드 양의 대리자다. 그래서 그녀는 린자리가 들려주는 과거 이야기를 줄곧 듣고만 있는 것이다. 반대로 린자리는 탄웨이칭에게 1970년대 대만의 역사와 그로 인해 생성된 심리적 불안을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린자리는 13년 만에 귀국하여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탄웨이칭을 구태여 찾아가 개인사를 줄줄이 늘어놓는 것이다.


한동안 탄웨이칭과 함께 겪은 유년기의 모습을 떠올리던 린자리는 느닷없이 3년 전, 바다에서 의문사한 남편 청더웨이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둘 사이에 공유된 경험은 밖으로 밀려나면서 이제 탄웨이칭은 철저하게 청자의 자리에 머물게 된다. 요점은 창더웨이가 왜 죽었는지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죽은 바다 근처에서는 그의 것으로 보이는 물품들이 몇 점 발견될 뿐 죽음의 이유를 밝힐 단서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에드워드 양은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 플래쉬백의 플래쉬백. 답을 찾기 위해 남편의 사망 소식을 들었던 때의 해변으로 돌아갔던 린자리가 그곳에서조차 답을 찾지 못해 달콤한 데이트를 즐겼던 지난날의 동일한 해변으로 다시 한번 돌아가는 것이다.


이때, 두 사람의 데이트가 영화에서 가장 낭만적이고 아름답게 묘사된다는 점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플래쉬백의 플래쉬백에서만 그렇기 때문이다. 지금 청더웨이는 죽었거나,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상태다. 이는 청더웨이가 고도성장을 달리던 1980년대 대만을 표상하는 인물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청더웨이의 내연녀 샤오후이와 그의 절친 아차이의 말에 따르면 청더웨이는 바다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회사의 돈을 횡령해 일본으로 간 것으로 설명되는데, 1980년대 초반 대만은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경제 성장의 기반을 마련했었다). 이는 대만의 과거(린자린)와 미래(청더웨이)가 하나로 접합되지 못하고 완전히 분리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위에 기술한 대만의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중국 본토인(린자린)과 토종 대만인(청더웨이)사이의 극복할 수 없는 불화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에드워드 양은 이 두 가지 층위에서 1970년대 대만을 특징짓는다.


에드워드 양은 본인의 역사적 관점을 인물과 서사에 완전히 용해시킨 다음, 그것들을 통해 다시 역사적 성찰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위대하다. <해탄적일천>은 에드워드 양의 그러한 미학을 적나라하게 반영하는 걸작이다.



4.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West Side Story) / 스티븐 스필버그



화면을 장악하는 유려하고 긴박한 운동성이야말로 영화가 뮤지컬 장르에 내린 형식적 축복일 것이다. 스필버그는 이 축복 아래에서 자신의 어떤 영화보다도 매혹적으로 산출한 역동적인 몸짓들을 이상화된 미국 신화의 어두운 배면과 결부시킨다. 건실한 육체에서 발산되는 활력은 그 자체로 아름답지만, 언제나 차별과 몸싸움, 그리고 살인이라는 잔혹한 행위로 대체될 수 있다. 영화의 아름다운 몸짓들은 종국에 백인과 히스패닉, 토착민과 이주민, 유산자와 무산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치열한 다툼으로 귀결되면서 비극성을 배가한다. 스필버그는 뮤지컬 특유의 낭만적인 엔딩 대신 두 영역으로 갈라진 미국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쪽을 택한다.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리메이크한 건 뮤지컬의 화려함을 현 미국 사회의 어둠을 비추는 아이러니한 장치로 활용하기 위함이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미와 추가 혼합된 이중적 몸짓들이, 이를 점유한 공간의 폐쇄성을 지우고 그 바깥의 영역으로까지 외연을 확장시키는 동시에 차별과 이해라는 주제의 적용 범주를 점차 넓혀간다는 점이다. 예컨대, 푸에르토리코 여성들이 좁디좁은 집에서 빨래를 널다 말고 거리로 나와 미국에 대한 혐오를 감추지 못하는 푸에르토리코 남성들과 선창과 후창을 주고받으며, 드넓은 사거리 차도 변에서 군무를 추는 장면은 압도적인 해방감을 선사하면서 미국을 둘러싼 서로 다른 이해관계의 화해를 요구한다.


이러한 시각적 황홀함은 야누스 카민스키의 놀라운 촬영에 빚을 지고 있다. 이 영화에서 카메라는 전지전능한 신처럼 거의 모든 영역을 활보하며 뮤지컬 '영화'가 무엇인지 실감토록 만든다. 도입부에서 철거 구역의 잔해를 내려다보던 카메라는 어느새 하늘을 날아가 링컨 공연 예술 센터 건설 현장을 비추다가 직부감으로 빠르게 하강하여 지하에서 문을 열고 나오는 어린 소년을 담는다. 앵글과 위치를 자유자재로 바꾸며 건설 현장을 연속된 하나의 호흡으로 제시하는 이 장면은 영화만이 할 수 있는 어떤 거룩한 숨결 같은 것을 느끼게 한다. 이는 <라라랜드>가 미처 성취하지 못한 것을 성취한 것이다. <라라랜드>가 근사한 뮤지컬을 영화화한 것이라면,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근사한 영화를 뮤지컬화한 것이다. 두 영화 모두 뛰어나지만, 내게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성취가 더 크게 느껴진다.



3. 헤어질 결심 (Decision to Leave) / 박찬욱




처음에는 <헤어질 결심>을 멜로 드라마로만 받아들였다. 죽음을 통해 영원을 얻는 미결의 사랑. 그 아이러니가 참으로 신비롭고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곱씹어 생각할수록 이것은 박찬욱 감독의 또 다른 복수극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총 세 명―본인의 엄마, 남편, 철썩의 엄마―을 살해한 서래는 그녀의 독백처럼 "독한" 년이면서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있는 여성이다. 그녀는 수수께끼 같은 표면 아래 슬픔이 계속 침전되어 쌓여가는 중이다. 이때 복기해야 할 것은 해준이 질곡동 사건의 범인 홍산오를 잡기 위해 그의 측근 이지구를 신문할 때, 그러니까 “잡혀서 감옥 가느니 경찰 몇 죽이고 자살할걸요?”라고 이지구가 토로할 때 난데없이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서래의 모습이 삽입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연결은 그녀와 홍산오를 연결시키면서 그녀의 내면에 자살 충동이 내재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자기 파괴적 욕망과 함께 총 세 명을 죽인 살인자라는 사실은 그녀가 난폭한 동시에 용감한 인물이라는 점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런 점에서 그녀가 호미산에서 해준에게 한 다음의 대사는 어떤 공포영화 대사보다 썸뜩하다. "벽에 내 사진 붙여놓고, 잠도 못 자고, 오로지 내 생각만 해요."


돌이켜 보면, 마지막 시퀀스에서 서래와 연락이 끊긴 해준이 다짜고짜 그녀가 위험한 행동을 할 것이라 예단하는 건 이상한 일이다. 해준은 그때부터 서래의 자살을 예감이라도 한 것일까. 그렇다면 그것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 답은 영화에서 가장 이질적인 서사라고 할 수 있는 질곡동 사건에 있다. 형사와 피의자 간의 거부할 수 없는 사랑의 서사와 질곡동 사건은 은밀히 내통한다기보다 차라리 평행하다. 왜 영화는 이 질곡동 사건을 중요하게 다루는 것일까. 해준은 이 사건에서 홍산오의 자살을 목격한다. 홍산오는 가인을 "죽을 만큼 좋아"해서 그녀에 대한 사랑을 현세에 남겨두고 떠난다. 그때 프레임 바깥에서 거의 절규하듯 소리치는 가인의 목소리가 들린다. "홍산오, 하지 마!" 해준은 이를 통해 두 가지를 배운다. 상대를 너무 사랑하면 자신을 파괴할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남겨진 자는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아주 처절하게 괴로워한다는 것. 해준은 질곡동 사건에서의 교훈을 토대로 서래의 행동을 예측하고, 그것을 막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그는 서래를 잃을 수 없고, 그로 인한 고통을 견딜 수 없다.


홍산오와 서래의 자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홍산오는 자살 행위가 경찰에 잡히지 않고 사랑을 보존하는 유일한 길이었지만, 서래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해준과 서래 사이의 어두운 거래가 담긴 핸드폰은 버리면 그만이며, 가장 큰 제약이었던 해준의 아내는 그와 결별하고 집을 떠났다. 이제 둘은 만나서 사랑하기만 하면 된다. 이를 거부한다는 건 서래의 마음에 사랑보다 증오심이 더 커졌다는 방증이다. 해준이 그녀의 마음을 충만한 사랑에서 증오와 고독과 체념으로 변화시킨 흔적은 이포에서 벌어지는 영화의 중후반부에 계속 감지된다. 임호신이 살해당한 날 해준은 자신을 보기 위해 이포에 온 서래를 찾아가 "이러려고 이포에 왔어요?"라며 그녀를 범인으로 낙인찍는다. 사랑의 전제 조건이 믿음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서래에게 이 말은 사실상 '배신'이다. 믿을 수 없다면 사랑은 끝난 것이다. 그러니 해준의 말은 이렇게 번역할 수 있다. "난 널 사랑하지 않아." 심지어 해준은 임호신의 살해범이 왼손잡이라고 직접 말하면서도 오른손잡이 서래를 의심한다. 그의 새로운 파트너 연수가 "저분(서래) 오른손잡인데요?"라고 의문을 표하면, 해준은 서래가 지켜보고 있는지도 모르고 마침내 쐐기를 박는다. "그러니까 생각을 해야지. 어떻게 해서 저 여자가 범인인지." 부산에서 해준이 서래에 의해 붕괴되었다면, 이포에서는 서래가 해준에 의해 붕괴된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순수하지 않다. 거기에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증오와 혐오의 감정도 포함된다. 사랑과 증오는 동전의 양면처럼 수시로 모습을 뒤집으며 위험천만하게 곡예를 탄다. 해준을 죽을 만큼 좋아한 서래는 이제 그를 파괴하려 한다. 그녀는 부산에서 그의 붕괴를 목격하면서, 그에게 직업윤리라는 가치가 무엇보다 우선한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실제로 해준은 서래를 만나기 전까지 지나칠 정도로 열정적이고 모범적인 형사였다. 그는 아내와 섹스를 하는 와중에도 사건 생각을 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그에게 직업윤리의 붕괴는 곧 삶의 붕괴를 뜻한다. 서래는 미결된 사건, 다시 말해 형사로서의 직업적 결함이 극심한 불면증의 원인이 되어 그를 허약하게 만든다는 사실까지 인지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서래가 그간 저질렀던 살인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에 수장되기로 결심한 것은, 자신을 다시 사랑하기로 한 해준에게 그것의 불가능성을 선언하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그녀는 지금 해준의 형사로서의 무능력을 지적하는 것이다. 해준은 그녀의 연인으로서, 특히 형사로서 그녀를 찾을 때까지, 어쩌면 죽을 때까지 계속 고통받을 것이다. 서래의 표현을 빌리자면 해준은 "참 불쌍한" 남자다.



2. 맥베스의 비극 (The Tragedy of Macbeth) / 조엘 코엔



<맥베스의 비극>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고결과 타락, 정의와 불의, 운명과 자유의지, 상승과 몰락, 금욕과 탐욕, 현실과 환상 사이를 오가는 숨 막히는 내적 갈등일 것이다. 조엘 코엔은 이 내적 갈등과 그것이 야기하는 불안과 고독감을 아주 영민하게 연출한다. 어떻게 하면 이 치열한 내적 혼란을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달할 수 있을까. 조엘 코엔은 이에 대한 해답으로 미니멀리즘을 택한다. 그는 인물, 소품, 조명, 색조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최소한의 것만 남긴다. 심리적 폐쇄성을 강조하는 1.37:1의 화면 비율, 콘트라스트를 강조하는 흑백 화면, 운명의 명과 암을 은유하는 빛과 그림자, 여백을 강조하는 단출한 세트에 이르기까지 그는 인물의 혼란스러운 내면과 대사의 아름다움을 부각하기로 작정한다.


시나리오 전문가 로버트 맥키는 자신의 저서 『DIALOGUE,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 2』에서 내레이션은 관객에게 말하는 것이지만, 배우의 독백은 그 자신과의 대화라고 규정한다. 그러면서 '반사적 갈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내재된 딜레마를 해결하려는 인물의 노력이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 돌아오면서 인물의 내면에서 벌어지기 시작하는 다툼을 말한다. 위기에 대처하려던 노력은 결과를 악화시키는 원인이 된다. 그렇게 원인이 결과로, 결과가 다시 원인으로 이어지면서 갈등은 도저히 풀 수 없게 된다. 여기서 로버트 맥키는 "일시적으로 한 사람이 둘로 쪼개져, 자신의 핵심 자아와 자신의 다른 측면 사이에 종종 비판적 관계가 형성된다."라고 기술한다. <맥베스의 비극>은 이러한 반사적 갈등의 궁극이다. 조엘 코엔은 인물의 두 자아가 대립하는 혼란스러운 내면의 풍경을 진실된 대사의 향연을 통해 구현한다.


2015년에 개봉한 저스틴 커젤의 <맥베스>는 이미지에 현혹되어 대사의 위용을 제대로 뽐내지 못했다. <맥베스의 비극>과 마찬가지로 <맥베스> 역시 배우의 입에서 셰익스피어의 위대한 대사들을 직접 발화하게 두었지만, <맥베스>는 배우가 대사를 하는 동안 그것과 관련된 이미지나 전후의 상황을 드러내는 장면들을 삽입함으로써 대사를 이미지의 증거 자료 혹은 이미지의 화력을 보강하는 보조 장치로 격하시킨다. 또한, 대사를 하고 있는 배우의 얼굴 대신 다른 이미지가 화면을 대체하면서 대사는 작품 내부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라 외부에서 들려오는, 즉 내레이션처럼 여겨지게 된다. 그런 탓에 영화의 대사는 인물이 자신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에게 직접 말하는 것처럼 왜곡된다. 반면, <맥베스의 비극>은 위에 기술한 미니멀한 연출을 통해 대사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을 조금도 훼손하지 않고 그야말로 온몸으로 느낄 수 있게 한다.


<맥베스의 비극>은 원작과 달리 맥베스 부인의 가증스러운 부추김을 약화하고, 맥베스의 주체성을 보다 강화하였다. 때문에 그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두 자아의 팽팽한 결투는 더욱 무겁게 느껴진다. 또한 원작에서 묘사되는 맥베스의 급격한 몰락과 달리 낙차의 정도를 완만하게 만들어 보다 사실적이고 점층적인 몰락을 그렸다. 여기에 운명 자체를 은유하는 자욱한 안개, 인위성을 강조하여 관객과의 거리감을 획득하는 건축물, 혼곤한 인간 심리를 표현하는 음악과 효과음이 더해져 맥베스의 몰락은 경탄스러울 정도로 우미하게 재현된다. 공기 입자 하나까지 통제한 듯 느껴지는, 물샐틈없는 조엘 코엔의 연출 능력은 다시 한번 정점에 이른 것 같다.


추가로 로저 디킨스 이후 <인사이드 르윈>, <카우보이의 노래>를 함께한 프랑스의 유명 촬영감독 브루노 델보넬과 코엔 형제의 거의 모든 영화에 참여한 위대한 음악 감독 카터 버웰의 공도 빼놓을 수 없다. 또한, 로더릭 제인스 편집 감독과 메리 조프레스 의상 감독도 언급해야 한다. 이들은 하나의 군단을 이루어 눈부신 작품들을 연이어 쏟아내는 중이다. 문자 그대로 환상적인 군단이다.



1. 큐어 (Cure) / 구로사와 기요시



<큐어>는 내부가 텅 비어 있는 영화다.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 어려운 표면이 영화 전체를 가득 메우고 그 내부는 사실상 무의 상태로 머문다. 작중 세계는 공간도, 표정도, 감정도, 사연도, 동기도 없는 추상적인 세계로 재현되면서 그 이면의 텅 빈 공간을 관객이 직접 채워 넣어야 하는 사태에 직면한다. 그러나 영화는 관객이 상상력을 동원할 수 있을 만큼의 정보도 제공하지 않기에 사태는 더욱 심각해진다. 요컨대 <큐어>는 거기에 아무것도 없음을, 남은 건 '나'라는 존재의 표면일 뿐임을, 오직 그러한 감각만이 있을 뿐임을 드러낸다. 그렇게 함으로써 영화는 '부정'의 감각을 길어 올린다. 이것은 역으로 내가 누구인지 자문하게 만드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이때 부정은 존재의 부정이다. 기요시는 지금 내가 누구인지 잊거나 부정해야 비로소 지탱 가능한 삶의 공포를 다루고 있다. 이는 논리적으로 설명이 안 되는 최면술사 마미야의 기이한 행동과 오컬트적인 능력을 통해 구현된다. 문자 그대로 설명이 불가하도록 설계된 마미야는 자기가 누구인지, 지금 있는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채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당신은 누구지?"라고 묻는다. 이후, 몇 번의 미끄러지는 대화가 발생하고, 마미야는 정중히 이렇게 요구한다. "나는 당신 얘기가 듣고 싶어." 이 요구를 들은 사람들은 초등학교 교사, 파출소 소장, 내과 의사 등 겉보기에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마미야에게 자신의 얘기를 늘어놓고는 갑자기 화산이 분출하기라도 하듯 억눌려 있던 어두운 욕망을 깨워 사람을 죽인다. 평범한 사람들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심지어 무표정으로 사람을 죽이는 광경은 끔찍하다 못해 소름이 돋는다. 여기서 복기해야 할 것은 마미야가 화면에 등장하는 방식이다. 그는 어딘가로 이동하는 과정이 생략된 채 그냥 불쑥 등장한다. 어떻게 그곳에 갔는지, 어떤 경로로 얼마나 움직였는지 영화는 전혀 제시하지 않는다. 그는 누군가를 찾는다기보다 누군가 자신을 발견해주기를 기다리듯이 그곳에 그냥 있다가 발견된다. 말하자면 마미야는 하나의 인물이라기보다 차라리 내면의 형상이다. 그는 최면을 걸어 살해 욕구를 증진시키는 단순한 최면술사가 아니라, 우리 심연에 흐르는 파괴적 욕망을, 여태 억누르고 있던 어두운 진실을 직시하도록 유도하는 내면의 또 다른 자아다. 이는 사회적 규범을 지키고 도덕을 실현하려는 선한 자아를 일순 불식시킨다.


흥미롭게도 살인을 저지른 사람들은 하필 그 살해의 순간을 기억하지 못한다. 마미야가 일말의 내면적 진실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존재라면 그에게 최면을 당해 살인을 저지른 결과는 얼마간 진실을 향해 있을 것이다. 요컨대 그들은 자기 내면의 진실을 볼 때 사람을 죽이고, 자신이 누구인지 모를 때 일상적 삶을 살아간다. 내가 누구인지 잊거나 부정해야만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아이러니. 무지의 평안과 기지의 공포. 구로사와 기요시는 공포가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는 방법임을 완벽하게 증명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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