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서른 먹도록 가까운 동네 병원을 다녔기에 아버지의 차를 몇 번 빌려 탄 것 외에는 차를 몰 일이 없었다. 어쩌다보니 신도시의 새로 생긴 병원에 다니게 되었고 나는 엘란트라를 출고했다.
어쩌다 나는 집에서 한 시간 거리의 병원에 출퇴근하게 되었을까. 네오 러다이트 테러리스트 '유나바머'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기술의 발전은 처음에는 인간을 자유롭게 해주지만 종국에는 기술에 의존하는 세상으로 변한다고. 자동차가 처음 나왔을 때는 모두 자유롭게 여행다니는 장점을 생각했지만 전 세계의 일터는 버스와 자동차로 출퇴근 해야하는 환경으로 변했다. 수도권의 정신나간 집값 때문에 우리는 미로같은 지하철과 버스환승에 가축수송이라 한탄하면서도 순응한다.
자동차와 자유의지. 도로는 인생의 축소판이라던 아빠의 말처럼 운전하다 보면 온갖 인간 군상을 보게 된다. 찰나를 못 참고 칼치기를 하는 난폭운전, 깜빡이 버튼을 까먹고 차선을 바꾸다 클락션에 출렁이는 차, 언제 튀어나올 지 모르는 고라니같은 퀵보드, 자전거 운전자들. 속도가 생명인 배달기사들의 난폭운전. 먼저 간다고 좌회전 전용차선으로 앞질러 새치기하거나 차로 진입을 잘못했다고 역주행하는 추태를 보고 있노라면 정말 도로는 혼돈 무법사회의 미니어처 같다. 물론 몇몇 몰상식한 택시나 배달업자들의 과속과 법규 위반이 곧 더 많은 '건수'를 위한, 궁극적으로는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행동이겠지마는. 나는 무단횡단을 하거나 신호를 위반하다 반으로 갈라져서 온 환자들을 받기 싫다.
나는 창문을 열고 운전하는 습관이 있는데 귀가 먹먹해지는 맞바람을 맞으면 답답했던 가슴이 풀리고 기분이 좋아진다. 이브닝 근무가 끝나면 밤 11시에서 자정 즈음인데 혹여나 졸릴까 신나는 신스웨이브나 펑크를 들으며 교외를 질주하고, 시원한 밤공기를 맞으면 자유로움을 느낀다.
(우파적) 자유지상주의는 제도가 인간을 얽맨다고 설파한다. 자유지상주의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무한한 자유를 추구한다. 한밤중 공도에서의 불법 과속 레이싱은 자유지상주의적인 관점은 과속으로 인해 선량한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을 경우에만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글세... 자유지상주의는 이상향일 뿐,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같은 도로 위의 무질서는 감시카메라와 교통 신호, 경찰력으로 통제된다. 토마스 홉스는 <리바이어던>에서 개개인의 무질서한 상태를 해소하고자 개개인의 자연권까지 침탈할 수 있는 강한 공권력을 만들어 냈다. 공권력과 과속 카메라 라는 규제와 처벌 앞에선 모두 정속 운전하는 모범 시민이 된다.
하지만 법은 만인에게 평등할까? 과속하다 딱지를 떼이면 20파운드의 벌금을 낸다. 20파운드는 가난한 자에겐 큰 돈일 수 있으나 억만장자에게는 새발의 피도 안된다. 벌점이 무서울까? 부유한 자들은 벌점이 쌓인 운전자를 해고하고 새 운전수를 고용할 것이다.
마가렛 대처 이후로 신자유주의의 광풍에 양극화가 심화된 이 사회에서 정량의 형벌을 가진 법은 평등하지 않다. 누군가에게 500파운드의 벌금은 큰 돈일 수 있다. 수백억 파운드나 되는 사기를 치고도 500파운드의 벌금을 무는 솜방망이 처벌 사례를 보자. 보석과 집행유예는 합법적인 처벌 회피 수단 중 하나다. 구속은 범법자의 자율권 박탈하는 처벌이지만 집행유예라는 관대한 판결과 보석이라는 부유함으로 풀려난다. 혹은 '기소되지 않는다'.
나같이 힘없고 가난한 서민들은 법을 지킨다.
덴마크처럼 벌금을 최소벌금 20파운드에서 그 사람, 법인 수익의 몇 퍼센트로 추궁하는 게 더 평등한 게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물론 '준수한' 입법은 포퓰리즘이니 뭐니 여론이 분열되고, 의회 문턱에서 막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