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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섀도우 Dec 28. 2020

쇼스타코비치의 '증언', 예술의 탄압


https://youtu.be/dhH6D5YAZ3M


쇼스타코비치의 생전 구술을 바탕으로 작성된 '증언(Testimony)'을 토대로 만들어진 영화, Testimony : the story of Shostakovich는 소련의 위대한 음악가이자 한없이 나약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준다.


자동생성되는 영문자막이라 오타가 있고, 짧은 영어실력이라 제대로 이해하면서 보진 못했지만. 쇼스타코비치를 너무나 좋아하는 나로선 가뭄의 단비같은 영화였다.




영화는 소련의 위대한 음악가의 장례식에서 시작한다.

"누구냐고? 바로 나, 쇼스타코비치."


젊은 시절 쇼스타코비치는 보드카 빠는(고증...) 글라주노프를 사사하고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젊은 음악가로 성장한다. 비록 당 기관지의 소소한 비판이 있었지마는.


그러나 쇼스타코비치에게 큰 시련이 다가오는데...




스탈린이었다.



스탈린의 대숙청으로 그는 몇몇 지인들.... 투하쳅스키, 에이젠시테인... 많은 사람들을 잃었다.

험난했던 숙청 시기, 그는 딸 갈리나와 아들 막심이 태어나 그를 위로해주었다.



쇼스타코비치의 다음 시련은 전쟁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발생하고 나치 독일은 소련을 침공했다.

그와 가족들이 있던 레닌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는 포위되었다.

"900일동안 포위당했고(seas X ->sieged), 900일동안 우린 살아남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시체를 먹었다."


"우린 유대인들을 먼저 먹었다. 그들은 싸우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은 간단하다... 고 들었다."



예로부터 유럽 뿐만아니라 러시아 전역에 암암리에 퍼져 있었던 반유대주의에 대해 쇼스타코비치는 인지하고 있었다. 그는 열 세번째 교향곡 '바비 야르(Babi Yar)*'에서 유대인들의 학살을 다룬다.


*바비야르 학살은 2차 세계대전 때 나치의 유태인 학살지 중 하나다.




쇼스타코비치는 나치독일의 레닌그라드 포위에서도 살아남았지만 그에겐 더 큰 시련이 남아있었다.

문화부장관 안드레이 즈다노프가 벌인 끔찍한 문화 숙청 - 즈다높시나(즈다노프 독트린) - 이 벌어진다.


즈다노프 : "우리 소비에트의 음악은 쇠퇴하고 이씁니다! 프로코피에프, 하차투리안...그리고 쇼스타코비치의 여러 작품들,"


즈다노프 : "동지들이여 난 음악가가 아니지마는, 음악가가 아닌 안드레이 알렉산드라비치는 민요 600여곡이나 알았소. 난 300곡 정도 알고! 깔깔깔" (청중들 박수)


즈다노프 : "무료한 불협화음(gratuitous dissonance), 괴상하게 충돌하는 소음... 쇼스타코비치 동지의 최근 음악은, - 비트호픈(베토벤)의 위대한 9번과 달리 ... 난장판으로 삐걱거리오(carnival squeaks)"

*2차대전 전후 작곡된 그의 9번째 교향곡은 높으신 분들의 입맛과 달리 단촐하고 아기자기했다.


쇼스타코비치는 바닥에 널부러진 자신의 9번 교향곡 악보를 밟고 연단에 올라선다.


"...네. 저는 실패했습니다. 저는 규범에 어긋났습니다..."

쇼스타코비치는 자아비판을 했다. 살아남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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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 예술 교육을 받았는지 의심되는, 소위 '좆문가' 머저리들이 현업 예술가들을 '부르주아 음악', '퇴폐 음악', '인민의 정서에 해로운 음악'으로 몰아 매도한다.


잉크펜을 짓누르는 모습에서 쇼스타코비치 내면의 분노를 함축적으로 잘 나타냈다.

쇼스타코비치는 스탈린의 비위를 맞추는 칸타타를 작곡하거나 영화 음악을 작곡하면서 즈다노프가 주도한 '문화 정화운동' - 학살에서 간신히 살아남았다.



진시황의 분서갱유, 소련의 즈다높시나, 중국의 문화대혁명,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불온서적과 탄압, 박근혜 정부의 예술인 블랙리스트 등등...

부패한 권력은 좌파나 우파나 다를 바 없다.

부패한 권력은 예술가들의 사소한 풍자나 저항, 비판조차 짓밟으려 든다.





영화를 보는 내내 스탈린 치하 소련이라는 끔찍한 독재 국가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쳤던 불쌍한 한 가장의 모습이 너무 서글펐다. 쇼스타코비치의 자식들 - 딸과 아들의 천진난만한 얼굴에서 아버지의 그늘 따라 어두워지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쇼스타코비치는 레닌그라드 출신의 젋은 음악학자 - 솔로몬 볼코프와 심층 면담을 하면서 여러 증언을 남겼고, 자신과 가족의 안위를 생각하여 사후 출판하도록 설명했다. 서방으로 망명한 볼코프는 쇼스타코비치의 생전 기록들을 정리하여 '증언'을 출판했고 소련 정부와 '소련에 남아있는' 가족들은 날조된 거짓이라 발표했다.


그러나 소련이 멸망한 뒤 그의 지인들과 후처 이리나와 딸 갈리나, 아들 막심은 볼코프의 '증언'이 사실과 가까움을 증언했다. 독재 권력이 무너지고나서야 비로소 그의 가족과 지인들이 진실을 말할 수 있었다.




예술인으로서 족쇄와 같았던 시대를 살아간, 인간 쇼스타코비치를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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